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밥의 신성함 말하면서 밥하는 노동을 하대하다니

남해에서 나와 몽덕이를 먹여 살리는 바람, 리사, 콩풀… 연대는 추상이 아니라 연결의 뼈와 살을 먹는 것
등록 2025-03-28 21:02 수정 2025-04-04 17:51
2025년 3월20일 동동빵집의 동그란 여자 콩풀이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 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 생일이라고 밥을 지었다. 그날 저녁 열댓 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2025년 3월20일 동동빵집의 동그란 여자 콩풀이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 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 생일이라고 밥을 지었다. 그날 저녁 열댓 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나와 내 반려견 몽덕이는 경남 남해에서 여기저기 얻어먹고 산다. 밥때가 되면 제집 가듯 개를 끌고 책방 앞 동동빵집이나 옆집 동고동락협동조합으로 가 밥을 먹는다. 다이어트 사료 먹으면 뭐 하나. 뚱뚱했던 몽덕이는 살이 더 올라 물개를 닮아가고 있다.

바람이 가르쳐준 상추의 맛

5월, 봄의 열기가 차오르면 52살 여자 ‘바람’(별명)은 갈증을 느낀다. 하얀 즙을 머금은 상추가 당긴다. 내가 남해에 온 지 한 달 지난 2024년 5월 ‘바람’이 상추, 파, 열무, 수박을 가져왔다. 동고동락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리사(52)가 커다란 양푼에 햇반 8개, 달걀프라이 10개를 넣고 채소를 담아 비빔밥을 만들었다. ‘바람’이 만든 동치미를 곁들였다. 대여섯이 둥그렇게 앉아 볼이 불룩해지도록 입에 욱여넣는데, ‘바람’이 그런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상추엔 흰 즙이 흐르지 않는단다. 흰 즙? 난 그런 거 본 적이 없다. “즙이 많을수록 상추가 물러지지 않아. 밭에서 자란 상추는 마를지언정 물러지지 않아. 모종하고 발아해서 키운 상추하고 하우스 상추는 맛이 다르다니까.”

상추는 까다롭다. 작은 씨앗은 깊이 심으면 발아하지 않는다. 발아하려면 햇볕이 필요한데 또 볕이 너무 세면 녹아버린다. “상추를 10월쯤 심으면 아주 조금씩 자라 월동해. 봄이면 찬란하게 핀다니까. 그런 상추는 약이야.” ‘바람’ 밭에 월동한 상추가 아직 남았는데, 그는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아직 먹지 않았단다. 상추가 몸을 둥글게 말아 결구하고 있다.

광고

비빔밥 다음엔 ‘바람’이 사 온 수박을 먹었다. “꼭지가 싱싱하고 배꼽이 작은 거, 세로로 난 줄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게 맛있어. 당분이 찰수록 이 세로줄이 볼록해져.“ 1인가구는 수박 먹기 힘들다. 몽덕이와 나는 걸신들려 껍질과 속살이 붙은 가장자리 연둣빛까지 앞니로 긁어 먹었다.

시골 마을이 고향인 ‘바람’은 어린 시절을 되짚어보면 따뜻했던 기억이 딱 하나 떠오른다고 했다. 딱 하나.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어. 아스라해. 내가 9살 때인가 10살 때인가. 가족들이 솥을 들고 냇가로 소풍 간 거 같아. 복사꽃. 그 분홍빛.” 고등학생 때 그는 아침이면 재료를 아껴가며 반찬을 만들고 남동생 도시락을 쌌다. 남동생 도시락을 채우면 자기 도시락에 넣을 반찬이 남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어린 등을 토닥이지 않았다. 욕먹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럿을 먹였다. 지금은 날 먹인다. 내가 그의 이 이야기를 들은 건 5월 상추를 먹고 9개월은 지난 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170㎝ 정도 키가 큰 그는 웃을 때 눈가 주름에 잔물결이 인다. 흰색 오리털 점퍼를 입고 초승달 같은 웃음을 짓는 그는 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자작나무 같았다. 이제 곧 5월이 오면, 그는 푸른 상추를 덥석 물어 상추가 겨우내 품은 그 하얀 즙으로 해갈할 거다.

동동빵집의 동그란 여자 콩풀이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 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 생일이라고 지은 밥상.

동동빵집의 동그란 여자 콩풀이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 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 생일이라고 지은 밥상.


뚝딱뚝딱 밥을 해 우리를 먹이는 리사

2024년 5월, 상추의 날. 비빔밥을 벅벅 비빈 리사는 온갖 식물을 길러내는 여자다. 종자기능사부터 내가 이름을 외우기도 힘든 자격증이 여럿이다. 리사가 만든 도토리묵, 리사가 끓인 수육, 리사가 삶은 감자, 리사가 만든 마파두부밥…. 15인분 점심 정도 만드는 게 무슨 큰일이냐는 배포를 지닌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배가 고팠을 거다. 패딩 소맷자락이 새카매지도록 떠나지 않던 지긋지긋하게 긴 겨울, 그는 뚝딱뚝딱 밥을 해 나를 먹였다. 몽덕이는 리사만 보면 궁둥이가 떨어져 나가도록 꼬리를 흔든다. 너무 얻어먹어 염치가 없지만 나는 꼬리가 없어 흔들 수가 없다.

광고

대신 내가 동네 아저씨가 직접 잡아준 낙지로 낙지볶음을 해주겠다고 했다. 인간이면 한 번은 해야 할 거 아닌가. 플라스틱 통에서 살아 꿈틀대는 낙지를 바라만 보고 있는 내게 리사가 물었다. “손질할 줄 알아?” 채식 지향이라면서도 참기름에 찍은 낙지에 환장하는 나는, 산낙지를 손질해본 적이 없다. 리사가 순식간에 낙지를 낚아채 끓는 물에 넣고 데쳐버리더니 낙지의 머리를 뒤집어 창자를 끄집어낸다. 그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전날 저녁, 나는 리사와 이런 대화를 나눴더랬다. 책 ‘기후 상처’(김현수 등 지음)에 관한 거였다. “환경 파괴에 대해 죄책감, 수치심을 가지기 마련이지. 그런데 그런 감정에 과하게 압도되면 행동이나 감정이 마비되지.”(리사) 나는 욱했다. “죄책감을 안 느껴서 더 문제 아니야?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인데,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으려는 거 너무 인간 중심적인 거 아니야?” 다음날, 나는 플라스틱 통 속에 남아 있는 나머지 낙지들의 꿈틀거림을 보지 않으려고, 그럼에도 낙지가 먹고 싶은 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낙지가 먹고 싶은데 낙지를 죽이는 노동은 리사에게 떠넘긴 나를, 그렇게 낙지를 죽이는 ‘죄책감’을 리사에게 외주한 나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곧 낙지볶음에 밥을 벅벅 비벼 허겁지겁 먹었다.

리사는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투쟁했다. 아버지는 딸은 낮에 일해 돈을 벌고 중학교는 야간에 다니라고 했다. 똑똑한 어린 딸은 지지 않았다. 고기는 남자들 밥상에만 올랐고, 밥한 여자들은 부엌에서 따로 먹었다. 허벅지가 탄탄한 이 여자는 이후 여럿을 먹였다.

콩풀이 자랑한 케이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

콩풀이 자랑한 케이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

광고


콩풀이 만든 케이크 먹으며 깨달은 것들

그리고 3월20일 동동빵집의 동그란 여자 콩풀(59)이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 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 생일이라고 밥을 한다. 그는 내 생일에도, 빵집에서 같이 일하는 요가 선생님의 생일에도, 그리고 수많은 생일이 아닌 날에도 밥을 해 사람들을 먹인다. 이날 토마토, 사과에 마요네즈를 잔뜩 넣어 옛날식 샐러드를 만들었다. 콩풀은 케이크도 만들었는데 아이싱 기술이 점점 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날 저녁 열댓 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나는 부추전을 씹으며 잠깐 눈을 감았다. 항상 불안했던 학창 시절 점심시간이 떠올랐다. 언제나 유리 조각처럼 이물감이 흩뿌려져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혼자 허겁지겁 먹던 밥들이 떠올랐다. 마요네즈를 두른 사과를 씹으며 연대라는 추상이 아니라 연결의 뼈와 살을 먹는 거 같았다. 콩풀이 자랑한 케이크의 생크림을 혀로 핥으며 눈을 감았다. 밥의 신성함에 대해 글은 쓰지만, 밥하는 노동을 애써 배워야 할 거리도 아닌 것으로 하대했던 내가, 더 인정받는 내가 되라고 나를 닦달하며 밥을 주유하듯 자신에게 처넣듯 했던 내가 떠올라, 눈을 감았다.

이제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5월의 상추 같은 밥을 해 먹일 거라고 다짐했는데, 5월이 진짜 다가오니 점점 귀찮아져서 오늘도 빵집 문을 열고 콩풀에게 밥을 얻어먹으러 간다. 몽덕이가 엉덩이를 흔들며 따라온다.

글·사진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희망제작소 연구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