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자아의 감옥 넘으니 딴 세상이 열렸다

새를 만나고 남해 갯벌 걷고 달집 태우며 배운 것들
모든 감각 열고 규정을 유보할 것, 자연과 연결할 것
등록 2025-02-28 21:35 수정 2025-03-05 10:56
탐조하는 몽덕이. 김소민 제공

탐조하는 몽덕이. 김소민 제공


어둑어둑한 숲은 소리를 품었다. 취취, 뾰로르, 딱딱딱…. 거의 평생 수도권에 산 내겐 잘 들리지 않는다. 2024년 10월 아침 6시 금산, 남해탐조클럽 ‘명상’과 함께 쌀쌀한 청색 공기 속을 천천히 걸었다. 숨죽인 19명이 낙엽 밟는 소리가 자박자박 흩어졌다.

“여기 쇠딱따구리, 직박구리가 있네요.” 김경원 박사(남도자연생태연구소 소장)가 고개를 들고 멈춰 선다. 보이지 않는다. 가는 현을 긋는 소리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같은 새라도 시시각각 소리의 리듬과 멜로디가 변한다. 곧게 솟은 소나무 아래 전나무, 참나무가 자리잡았다. 그 아래 관목들이 자란다. “지금부터 겨울까지 떠돌이 박새가 떼를 지어 와요. 동물의 움직임은 나무가 결정하고, 나무의 움직임은 동물이 결정해요.”

줄기가 매끈한 나무엔 벌레가 들기 어렵고 그런 나무엔 새들이 잘 모이지 않는다.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울퉁불퉁해지는데 새들이 줄기를 통통통 두드려 그 안의 벌레를 잡아준다. 손바닥 절반보다 작은 올리브색 상모솔새는 솔에 붙은 작은 진드기를 먹는다. 덜꿩나무 잎은 보들보들하고 폭신하다. 들꿩이 좋아하는 열매가 맺힌다. 끼륵끼륵, 짹짹…. “어치네요. 어치는 고양이나 다른 새소리를 흉내 내요.”

모든 감각을 열어 처음 만난 새

나는 휴대전화에 새들의 이름을 적었다. 답답했다. 나무, 새, 숲 이런 커다란 보통명사로 이뤄진 내 세계는 얼마나 뭉툭한가. 오십이 되도록 이토록 흐릿하게, 어렴풋이 세상을 감각해왔다는 생각에 조급해진다. 안 외워진다. “이름 하나하나 외우려 하지 마세요. 새소리가 작고 짧아 저걸 어떻게 듣지 싶겠지만 한번 들리기 시작하면 정말 잘 들려요. 새를 통해서 숲과 교감하는 거예요. 이 숲에서 내가 보는 이 새는 이 숲에서 지금 내가 처음 보는 새예요. 자기가 본 만큼, 들은 만큼만 들으세요. 그러지 않으면 봤다고 착각하게 돼요.” 찌쯔찌리릭 박새, 취이취이 동박새, 티유티유 어치…. 나뭇잎 사이로 스민 햇살이 축복처럼 머리 위로 내렸다. 숲은 더 시끌벅적해졌다. 쇠딱따구리 한 마리가 소나무 가지를 두드렸다.

오후엔 남해 갯벌을 따라 걸었다. 주둥이가 당근처럼 길고 주황색인 검은머리물떼새들을 기다린다. 이 새는 밀물에 굴이 입을 열면 벌어진 틈으로 재빨리 주둥이를 밀어 넣어 굴을 먹어치운다. 꼬리 끝이 까맣고 고양이 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들이 도톰하게 솟은 모래 둔덕에서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경관 전체를 보세요. 펄이 있어야 먹거리가 많죠. 물이 들어올 때 쉴 곳이 있어야 해요. 경관이 변하는 건 새에게 큰일이에요. 새를 만나는 순간의 모든 감각을 열어보세요. 바닷물이 들어올 때 어떤 느낌인가요? 그게 새를 만나는 거예요.” 재갈매기, 괭이갈매기, 붉은부리갈매기, 가마우지, 중대백로…. 남해 강진만 입현매립지엔 월동하러 온 오리들이 유영한다. 흰뺨검둥오리, 알락오리, 발구지, 쇠오리….

남해 갯벌에서 만난 새들. 김소민 제공

남해 갯벌에서 만난 새들. 김소민 제공


교감할 때 알게 되는 ‘나’라는 존재

“모든 장소는 유일무이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놓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55년 동안 80여 개 나라를 여행하고 2020년 75살로 숨진 배리 로페즈는 알래스카 선주민들에게서 배운 것을 유작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에 썼다. 알래스카 유픽족은 집합명사로 물으면 답하지 않았다. 곰이 아니라 어떤 한 마리의 곰이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했는지만 말했다. 선주민들은 경험을 곧바로 언어로 규정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건 속에 다만 자신을 던져놓고 관찰했다. 로페즈가 곰을 만난 순간을 ‘곰과의 조우’로 요약할 때 “그들은 공기 중에서 냄새의 흔적을 찾거나 새의 울음 혹은 스치듯 부딪치는 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이면서 사실상 곰과 조우한 순간을 시간의 앞뒤로 연장해갔다. 나에게 곰은 명사, 즉 문장의 주어이고, 그들에게 곰은 동사, 즉 ‘곰이 하는 것’이라는 동명사였다.” 수없는 순간들, 수없는 방식으로 신은 현현했다. 모든 감각을 열고 관찰할 뿐 요약·규정을 유보할 것, 로페즈가 자아의 감옥을 넘어 자연과 교감하고, 깊은 충만감에 이른 방법이다. “(장소와 나) 서로가 (서로에게) ‘알려지는’ 이런 교감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현대인이 고독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이유가 그 연결감이 끊겨버렸기 때문이라고 로페즈는 보았다.

언젠가는 떨쳐버릴 수 있을까? 사람마저 몇 분 만에 카테고리에 나눠 집어넣는 나는 이 헐떡거림, 마른 넝쿨 같은 정처 없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025년 2월12일 정월 대보름, 어스름이 내려앉은 남해 상주면 주차장에 1층 높이 불꽃이 타올랐다. 며칠 전부터 상주면청년연합회에서 쌓아놓은 대나무 더미 위로 불꽃이 어둠을 잡아챘다. 달집태우기였다. 동네 사람들 머리카락은 사정없이 바람에 흐트러졌고 볼은 붉게 달아올랐다. 검은 산 위에 검은 구름이 흘렀다. 대나무를 삼킨 불꽃은 맹렬하게 분노하고, 간절하게 몸부림쳤다. 삶에 대한 갈망 같기도, 파괴의 열망 같기도 한 처연한 것이었다. 그 불꽃의 기도를 따라 검은 산, 검은 구름 사이로 창백한 달이 천천히 떠올랐다. 달, 산, 하늘, 불이 서로 할퀴고 보듬는 풍경에는 혼을 부르는 신성함이 있었다.

내가 지워지는 걸 느낀 순간

둥둥둥둥…. 상주풍물패가 꽹과리, 북, 장구를 쳤다. 강강술래가 시작됐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누군지 모를 여자의 손을 잡았다. 동네 사람들은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원을 돌았다. 풍물패들이 노래한다. “술래가 돈다. 술래가 돈다. 술래가 돈다.” 대형은 달팽이 모양으로 바뀐다. “여자들이 나온다.” 여자들이 원 안으로 들어가 춤췄다. “남자들이 나온다.” 남자들이 원 안으로 들어가 춤췄다. 앞집 빵집 여자 콩풀, 빵집 일을 도와주는 은하, 책을 좋아하는 초등학생 재홍이, 그림을 잘 그리는 세영이, 아직 코딱지를 먹을 수 있는 재하…. 풍물패가 둘이 짝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발치기, 발치기, 발치기.” 나는 동그란 여자 콩풀과 짝을 지어 그의 발에 내 발을 부딪쳤다. “손치기, 손치기, 손치기.” “엉덩이 치기, 엉덩이 치기, 엉덩이 치기.” 웃고 있는 콩풀을 보며 웃는 나는 내가 지워지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하늘로 이어지는 수직선, 체온으로 이어지는 수평선, 그 십자에 흡수되는 거 같았다. 그런 흡수에는 천진한 활기와 순전한 기쁨이 있었다. 어느새 대나무들은 재가 됐고 보름달은 떠올랐다.

글·사진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희망제작소 연구위원

*‘인간관계 신생아’인 중년 여성과 간식 말곤 관심 없는 개의 도시 탈출 합동 도전기. 경남 남해에서도 남쪽 끝 작은 마을 상주에서 동네책방으로 망하지 않고 연결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4주에 한 번 연재합니다.

상주풍물패가 꽹과리, 북, 장구를 쳤다. 강강술래가 시작됐다. 김소민 제공

상주풍물패가 꽹과리, 북, 장구를 쳤다. 강강술래가 시작됐다. 김소민 제공


대나무를 삼킨 불꽃은 맹렬하게 분노하고, 간절하게 몸부림쳤다. 김소민 제공

대나무를 삼킨 불꽃은 맹렬하게 분노하고, 간절하게 몸부림쳤다. 김소민 제공


2025년 2월12일 정월 대보름, 어스름이 내려앉은 남해 상주면 주차장에 1층 높이 불꽃이 타올랐다. 김소민 제공

2025년 2월12일 정월 대보름, 어스름이 내려앉은 남해 상주면 주차장에 1층 높이 불꽃이 타올랐다. 김소민 제공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