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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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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몰입으로 살아온 말간 얼굴, 나의 귀인

책방지기 하러 왔다가 절망만 쌓은 날… 고통 피어오르던 곳에 그의 서각이 걸리다
등록 2024-11-29 17:52 수정 2024-12-06 08:38
경남 남해에서 ‘미광사’를 운영하는 서용길씨. 작은 쇠망치와 조각칼을 보여줬다. 70년 동안 써온 것이다. 김소민 제공

경남 남해에서 ‘미광사’를 운영하는 서용길씨. 작은 쇠망치와 조각칼을 보여줬다. 70년 동안 써온 것이다. 김소민 제공


“콘셉트가 중요해요.”

책방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조언이다. 심란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 콘셉트가 없는 게 문제 아닌가. 책방이 들어설 건물을 피해 다닌다. 1988년부터 2004년까지 동네 유일한 목욕탕 ‘약수탕’이었다. 그 뒤로 17년간 비어 있다 2년간 빵집이었다. 2024년 5월, 먼지와 곰팡이로 범벅인 동굴 같은 공간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한쪽 벽은 기괴한 돌들을 시멘트로 발라 쌓아놨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그 돌에서 건강에 좋은 파장이 나온다는데 그 벽만 보면 나는 명이 줄 거 같다. 대문 앞엔 잡풀이 자랐다. 얼마나 억센지 잘 뽑히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리게 되는 지점을 볼 때마다, 단전에서부터 깊은 울화가 올라온다. 어쩌란 말인가. 나는 우리 집 인테리어도 해본 적이 없다. 방바닥, 지붕 있고 물 나오면 되는 거 아니야? 책방지기 취향이 밴 아기자기한 동네책방들을 돌아볼수록 절망이 쌓인다. 밤마다 반려견 몽덕이를 붙들고 물었다. “우리 도망갈까?”

자기혐오 가득할 때 귀인을 만나다

아직 도망가긴 이르다. 먼저 하고 싶은 게 있다. 이 책방의 주인은 ‘삶전환연구소’다. 1편(제1530호 참고)에 소개한 ‘인간 AI’와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제1466호 참고)를 포함해 각지에 흩어진 마을공동체 활동가들과 연구자들 20명이 돈을 보태 생태와 지역공동체를 살리고 연대를 지향하는 삶을 목표로 만들었다.(‘24시간 노동의 세계로의 전환이겠지’라며 나는 비아냥거리는데, 인간 AI는 해독하지 못하는지 전혀 타격 없는 얼굴이다. 내가 오타를 내거나 과세 품목과 비과세 품목을 헷갈리면 여지없이 지적한다. ‘오류, 오류, 경보, 경보’) 책방은 끝나지 않을 조별 과제 같다. 가장 괴로운 건 ‘왜 내가 짐을 져?’란 마음이고 가장 미운 건 내 곁의 조원이다. 옛 목욕탕의 폐허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자면, ‘인간 에이아이(AI)’를 분해하고,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의 귀청을 뜯어내고 싶다. 그들이 눈에 보이니까. 책방 개업일이 미뤄질수록 내 무능의 증거 같아 자기혐오가 자랐다. 그 혐오는 너무 뜨거워서 갖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타인에게 던진다. 도망가기 전에 최소한 한 번은 인간 AI와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를 남해 바다에 던지리라 다짐했다.

그들을 해할 수가 없다. 내가 해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인간 AI를 분해할 거 같고,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는 윤석열 정권 들어 사회적기업 예산이 대폭 줄어 이미 걱정에 땅 꺼진다. 내가 먼저 바다로 뛰어들 거 같은 날, 남해읍에서 귀인이 등장했다. 검지 크기의 작은 망치를 들고서.

경남 남해 ‘미광사’ 한쪽 벽엔 경구를 새긴 서각 작품이 빼곡하다. 서용길씨가 산스크리트어를 한땀 한땀 새긴 신묘장구대다라니 범어문을 들고 있다. 김소민 제공

경남 남해 ‘미광사’ 한쪽 벽엔 경구를 새긴 서각 작품이 빼곡하다. 서용길씨가 산스크리트어를 한땀 한땀 새긴 신묘장구대다라니 범어문을 들고 있다. 김소민 제공


“한 번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남해읍 한구석, 흰색 간판에 붉은 도장이 그려져 있었다. ‘미광사’, 아름다운 빛의 도장 가게다. 7평 남짓한 가게 한쪽엔 동네 할머니 세 명이 쪼르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손님은 아닌 거 같다. 딱히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한쪽 벽엔 경구를 새긴 서각 작품이 빼곡하다. 그중 하나는 단박에 눈에 띈다. 산스크리트어를 한땀 한땀 새긴 신묘장구대다라니 범어문이다. “저거 만드는 데 6개월이 걸렸어요.” 한쪽 구석엔 두루마리가 수북하다. 서예 작품들이다. 그의 이름은 서용길(83), 아름다운 빛의 가게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는 나의 귀인이다.

그가 작은 쇠망치와 조각칼을 보여줬다. 70년 동안 써온 것이다. 8살 때 6·25가 터져 경남 하동에서 남해로 내려왔다. 그해 칠월 칠석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남해 조선소에서 나무를 다루던 아버지가 산재를 당해 누웠다.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있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으로 가 도장을 배웠다. “밥 주고 신발도 줬어. 명절 땐 용돈도 좀 받았어. (작은 쇠망치를 보여주며) 실수하면 이걸로 머리를 콩콩 맞았는데 나는 별로 혼나진 않았어.” 16살에 부산에서 ‘문화당’이란 첫 가게를 차렸다. “그때 마음은 말로 다 못하지. 엄청나게 기뻤지.” 그가 2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해 교통사고를 당해 팔까지 부러진 그는 남해로 돌아와 26살에 결혼했다. 평생교육원에서 서각과 서예를 배웠다. 서용길씨가 돌돌 말아둔 한지를 편다. 10m는 족히 될 거 같다. 검지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한자가 빼곡하다. 불상 배 속에 집어넣을 금강경 필사 ‘불복장’이라고 했다. 한 획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할머니 세 명은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고 용길씨 이야기를 듣는다.

“예전엔 잘됐는데, 이제 가게를 접어야 하나 싶어.” 젊은 시절 그는 4분이면 도장 하나를 팠단다. 수많은 도장을 파 두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다. “하나 딱 만들고 나면 쾌감이 있지. 얼마나 좋아. 마음에 안 들게 나올 때도 있지. 그게 사람인데 어쩔 거야.” “다른 일 해보고 싶은신 적 없었어요?” “한 번도 없는데. 한 번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도장 팔 때는 아무런 생각이 안 나거든. 걱정도 다 사라져.” 자기 자신마저도 먼 배경처럼 아스라이 사라져버리는 순간, 그런 몰입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말갛다. 요즘에 손으로 판 도장이 필요해? 그 몰입 속에서 태어난 한 글자, 한 글자는 존재의 다른 효용이 필요 없다. 그저 아름답다. 노안 탓에 그는 이제 도장 하나 파는 데 10분은 걸린다. 사람 가운데 일을 한다는 뜻으로 호가 인중(人中)인 그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단골 할머니 세 명밖에 가게에 오지 않아도 ‘미광사’ 문을 연다.

경남 남해의 은모래마을책방에 걸려 있는 로고. 서용길씨의 서각 작품이다. 김소민 제공

경남 남해의 은모래마을책방에 걸려 있는 로고. 서용길씨의 서각 작품이다. 김소민 제공


일단 하루 더 앞으로 가보기로 해

그가 만든 도장이 은모래마을책방의 로고가 됐다.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이 머무는 곳, 내 고통이 피어오르던 곳에 그의 서각이 걸렸다. 그 이후에도 줄곧 나는 억울하고 분한데 또 인정은 받고 싶고, 그런 시골에서 무슨 책방이 되겠느냐는 사람들한테 보란 듯 증명하고 싶고, 그런데 엉망진창이 될 것만 같아 내가 싫어지고, 내가 싫으니 네가 밉고… 결국 나, 나, 나, 나,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고, 어떤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마음 때문에 짐을 쌌다 풀었다 했다.

노을이 질 즈음, 은모래해변 콩게들은 모래로 그림을 그린다. 콩게들이 함께, 아무 생각 없이 모래를 열심히 씹어 뱉은 흔적들은 무늬를 만든다. 하트, 폭죽, 웃는 얼굴…. 곧 파도에 씻겨가겠지만 비스듬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이 무늬들을 당신이 본다면, 아마도 ‘아, 아름답다’ 할 것이다. 콩게들의 그림을 본 날, 나는 일단 하루 더 앞으로 가보기로 한다. 부디, 아무 생각 없이.

글·사진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희망제작소 연구위원

*‘인간관계 신생아’인 중년 여성과 간식 말곤 관심 없는 개의 도시 탈출 합동 도전기. 경남 남해에서도 남쪽 끝 작은 마을 상주에서 동네책방으로 망하지 않고 연결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4주에 한 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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