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네 단어로부터 자유로운 지방자치단체가 있을까? 서울 등 수도권은 그나마 덜하지만 비수도권 지역에서 ‘인구’는 그야말로 생존과 소멸의 명운이 걸린 ‘죽고 사는 문제’가 됐다. 대부분 자치단체가 인구 정책에 골몰하는데, 세계가 주목하는 곳이 있다. 충북 제천이다.
제천은 충북 최북단으로 강원에 가깝다. 요즘 같은 겨울엔 유난히 추운 날씨 탓에 ‘제베리아’(제천+시베리아)로 불린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면적(883.17㎢)도 넓은 편인데, 서울(605.2㎢)보다 훨씬 크다. 2023년 말 인구(963만8799명)를 기준으로, 서울의 인구밀도는 ㎢당 1만5927명인데 제천은 2024년 말 인구(12만8569명) 기준 인구밀도는 ㎢당 146명 남짓이다. 제천이 100배 가까이 너르게 사는 터라 인구밀도로 봐도 ‘제베리아’라는 말이 어울린다.
이런 제천이 인구 정책으로 세계의 눈을 끌었다. 2024년 8월6일치 뉴욕타임스는 “제천시장은 쇠락하는 도시를 구하려고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된 고려인에게 눈을 돌렸다. 제천은 많은 한국 도시처럼 저출생, 고령화로 소멸 위기를 맞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 민족이 (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까?”라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시멘트 산업이 쇠락하면서 위기를 맞은 제천이 추진하는 고려인 이주 정책과 더불어 제천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생활을 추적했다. 앞서 2024년 7월 비비시(BBC) 뉴스코리아도 ‘초저출생 한국에서 시작된 미래’라는 제목으로 제천의 고려인 이주 정책을 깊이 있게 보도했다.
제천은 2023년부터 고려인 이주 정책을 시행했다. 지금까지 고려인 90가구 222명이 이주·정착했고, 119가구 320명은 이주를 준비하거나 추진하고 있다. 고려인 이주 정책 1년여 만에 이미 제천에 정착했거나 곧 이주할 고려인이 542명이라는 얘기다.
이들의 국적을 보면 우즈베키스탄 170명, 카자흐스탄 164명, 러시아 154명, 키르기스스탄·우크라이나 등 기타 54명 등이다. 대부분 경기 안산, 인천, 충남 천안 등 국내 다른 도시에서 제천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30여 명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국외에서 바로 제천으로 이주했다.
이들 고려인은 제천 주민등록 인구로 잡히진 않지만 제천의 생활인구를 늘리는 데 한몫했다. 이들을 포함해 제천엔 외국인 2600여 명이 생활하는데, 최근 고려인을 위한 상점도 성업 중이다. 권세영 제천시 미래전략과 주무관은 “2024년 이후 해마다 300여 명씩 2026년까지 고려인 1천 명 유치를 목표했는데 순조롭다. 젊은 부부와 가족 등이 이주하면서 지역 상권·학교·기업 등에서 생기가 돈다”고 했다.
제천이 고려인 유치에 눈을 돌린 것은 여느 자치단체처럼 인구감소와 지역소멸 위기가 코앞이기 때문이다. 제천은 행정안전부가 2021년 선정한 인구감소지역 89곳에 포함됐다. 제천은 청주, 충주에 이어 충북 자치단체 ‘넘버 3’로 인구 10만 명이 넘는 ‘시 단위’ 자치단체지만, 인구감소지역에 포함됐다. 그만큼 인구감소가 가파르다는 뜻이다.
제천은 시멘트·광공업 도시로 1960~1980년대까지만 해도 돈과 사람이 넘쳐났다. 1976년 광산이 125개까지 있었고, 이 무렵 인구는 16만9천여 명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시멘트 등 광공업이 쇠퇴하면서 인구도 빠르게 줄었다. 2024년 13만 명대가 무너진 이후 다달이 100명 안팎씩 줄어들고 있다.
인구감소, 지역소멸 위기 대안으로 고려인 유치를 떠올린 이는 외교관 출신 김창규 제천시장이다. 김 시장은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러시아 등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김 시장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등은 한민족의 피가 흘러 이질감이 없는데다 저출생, 고령화에 따른 인구감소, 일손 부족 등을 겪는 제천의 위기를 넘는 데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다”며 “인구감소 위기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도전이 다른 자치단체에도 의미 있는 디딤돌이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김 시장은 고려인 유치 성공 등 성과를 토대로 동양일보 올해의 인물에 이어, 충북도민회 중앙회 최고자치단체장으로 잇따라 뽑혔다.
고려인 이주를 위해선 제도가 필요했다. 이에 제천은 2023년 3월 ‘제천시 고려인 등 재외동포 주민지원조례’를 제정했다. 조례엔 △고려인과 재외동포의 정의와 지위 △지원 대상 △지원 내용 등을 담았다. 조례는 ‘고려인’을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15일 사이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 및 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 및 친족으로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후손이다. 제천시는 국외 우크라이나·러시아·카자흐스탄 등에 50여만 명, 국내 경기 안산, 충남 아산, 인천, 광주 등에 고려인 10여만 명이 사는 것으로 추정한다.
조례를 만든 뒤 김 시장 등은 중앙아시아 3국을 방문해 고려인 단체 등과 고려인 유치 협약을 했고, 국내 단체인 대한고려인협회 등에 제천 유치 뜻을 전하고 협조를 구했다.
고려인들의 ‘자율 제천행’은 제천의 고려인 정책이 촘촘하기 때문이다. 제천시는 지역에 있는 세명대·대원대에 맡겨 재외동포지원센터를 운영한다. 제천 이주 고려인은 이곳에서 4개월 동안 무상 숙식하면서 사회통합, 조기 적응, 한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후 제천시의 도움으로 취업·교육·주거·복지 등 제천 생활 여건을 마련한다.
제천시는 지역 특화형 비자 사업을 통해 취업 등을 지원하는데, 단기체류(C-3-8)·방문취업(H-2)·재외동포(F-4)·영주(F-5) 등의 비자로 국내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고려인 동포가 대상이다. 여기에 제천 이주 고려인의 배우자까지 취업 활동이 허용되는 이점이 있다. 제천 이주 고려인 70% 이상이 취업했다.
이 밖에 제천은 지역 병원과 협약해 의료비 20%를 할인하고 돌봄수당(30만원), 장학금(초중고생 50만원, 대학생 100만원) 등 혜택도 지원한다. 제천에 이주한 김알렉산드르(26)씨는 “음성에서 살다가 아내와 제천으로 왔다. 다양한 지원 등 전체적으로 생활이 만족스럽다. 일만 할 수 있다면 제천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제천(충북)=오윤주 한겨레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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