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아.기.
서울 동작구 이수역에서 사당역 방향으로 걷다보면 고층 빌딩 유리창에 다섯 글자가 적혀 있다. 난임 여성인 나는 저 단어만 바라봐도 마음이 시리다. 잠시 멈춰 서서 단어를 바라보는 누군가는 나와 같이 임신과 출산을 간절히 바라는 난임 가족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모든 산업이 그러하듯 난임 산업도 수요가 있는 곳에 깃들인다. 보건복지부는 2024년 3월31일 기준 전국에 154개의 난임병원이 있다고 밝혔다. 154개의 병원 주소를 따져보니 서울 36곳, 경기도 34곳, 부산광역시 15곳, 대구광역시 10곳 순서로 많았다. 인천광역시와 대전광역시가 7곳으로 뒤를 이었고, 전라북도 전주시와 광주광역시는 각각 6곳과 5곳이었다. 충청남도 천안시가 4곳, 울산광역시와 경상북도 포항시는 3곳이었다. 2곳의 난임병원이 있는 지역은 세종특별시를 포함해 충청북도 청주시, 강원도 원주·춘천시, 전라남도 순천시, 경상남도 창원시였다. 1곳의 난임병원이 있는 곳은 제주시와 충청남도 아산시와 홍성군, 강원도 강릉시, 전라북도 익산·군산시, 경상북도 안동·구미시, 경상남도 진주·김해시였다. 인구 분포와 비례해 수도권 쏠림 현상이 뚜렷함을 알 수 있다. 지역 난임 여성들은 케이티엑스(KTX) 열차를 타고 유명한 병원이 있는 서울이나 광역시를 오가며 체력을 소진하고 있다.
종합병원을 서울로, 광역시로 다니는 한국인들이 볼 때 ‘특별한’ 치료를 받는 난임병원은 상급 병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54개 병원 중 의원급이 72곳이었다. 상급종합병원이 24곳, 종합병원은 23곳, 병원은 35곳이었다. 의원급이 대부분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원급보다 규모가 큰 병원이 많고, 종합병원의 지역별 분점 격인 의원들도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뿐 아니라 남성을 위한 비뇨기과와 임신·출산 과정에서는 갑상선 질환 등을 면밀히 살펴야 하기 때문에 내과 등 다른 전공 전문의가 함께 근무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원해서 찾아가지만, 마치 여성 부인과 진료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난임병원을 계속 오가다보면 나는 이 거대한 난임 산업의 착실하고 충성스러운 소비자란 것을 확실히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소비자로서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며 성공이든 실패든 어떤 결과를 받아 들든, 언젠가는 끝내야 한다는 것도 잘 느끼고 있다.
한국의 높은 의료 수준 때문일까. 난임병원에서 외국인 환자들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내 주치의는 병원 내 중국인 전담 의료진이었다. 1~2시간은 기본으로 진료실 앞에 앉아 대기하고 있을 때 주로 쳐다보게 되는 건 대기 순서를 알 수 있는 화면이다. 띵동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한 글자씩 가려진 채 대기 중인 환자의 이름이 화면 위에 떠오른다. 한국인의 이름과 다른 형식, 영어, 한자음 등이 적힌 이름이 눈에 띈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 곁에는 중국어를 하는 통역사가 이들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또 중국어로 누군가와 전화하는 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난임병원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성 무리가 의사를 만나러 오가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의사의 휴게 시간을 기다리는 듯 이 남성들도 환자들과 섞여 대기했다. 잠시 문이 열리고 이름이 남다른 그 여성이 들어갈 때 내 주치의는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어로 인사했다. 한국 여성들만 난임일 리가 없었고 우수한 의료 기술이 있다면 전세계인이 찾아오는 건 산업적으로 당연하다. 이렇게 의료산업이 고도화되면서 더 많은 이익을 많은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은 산업화의 장점일 것이다.
다만, 난임병원 의사 말만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원인 모를 난임 진단을 받은 나 역시 그런 착한 환자였다. 지식과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오는 권력관계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동이자, 생명을 다루는 ‘인술’을 펼치는 전문가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고차수 환자 역시 경험에 의해 체득한 것들이 있었다. 매달 생리할 때마다 반복해서 난자 채취 시도를 하고 주치의와 함께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임상 경험이 쌓인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을 쓰지 않더라도, 내 몸을 대상으로 하는 수차례 시술 행위를 직접 겪다보면 의사만큼은 아니지만 처음과는 달리 보이는 게 많아진다. 그러면서 의사들의 판단과 진단, 제안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차츰 학습해갔다.
의사의 필요에 의해 중복해서 검사하는 경우도 있고, 3분 진료를 하는 바쁜 의사가 판단을 잘못해서 실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부모가 될 이들의 유전자 검사, 보조 치료 목적의 비급여 주사나 비급여 시술 등은 전적으로 의사의 판단으로 진행된다. 그 시술이 필수적인지 아닌지 환자인 내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병원에서는 배아의 유전자 검사(PGT)를 의무로 시행한 뒤에야만 자궁에 착상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유전자 검사는 다 비급여 항목이며 그 검사를 받지 않는다고 모든 배아가 착상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검사를 위해서는 배아 한 개당 수십만원이 들어간다. 정부가 지원금을 쏟아붓고 있음에도 정작 난임 가족들이 병원비에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비급여 항목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이런 소비를 감당할 여윳돈이 없다면 쉽게 병원을 찾아오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보통은 의사의 검사 요구가 싫으면 병원을 옮기면 된다. 그러나 정보가 부족한 난임 가족은 위치, 운영 방식 등에 따라 병원 선택에 제약을 겪는다. 보통은 울며 겨자 먹기로 주치의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2024년 7월20일 랜싯을 통해 공개된 ‘생식산업, 취약성으로부터 이익 얻기’라는 논문은 1978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시험관아기가 출생한 뒤 선진국 기준 약 9%의 출생아가 시험관 시술로 태어난다고 밝혔다. 나아가 2023년 347억달러였던 난임 산업은 10년 뒤 628억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환자의 몸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난임병원의 운영 방향이 주주 수익과 경영 성과 중심으로 옮겨질 수 있다며 지금도 비급여 진료를 과다하게 적용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난임 산업의 소비자인 내가 느끼는 불안감, 불편함 역시 점점 난임병원이 기업화돼가고 난임 산업적 측면에서의 운영이 강화되는 과도기여서라고 생각한다. 기업화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장점보다 단점이 커지지 않도록 이를 제어하는 노력도 함께 자라야 한다.
수요가 있기에, 현재 난임 산업은 풍선처럼 부풀고 있다. 난임 여성 또는 난임이 우려되는 여성 등의 취약해진 마음을 파고드는 상술도 발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치료와 상술 사이 어딘가에서 난임 가족들은 부유한다.
병원만이 난임 전문을 내세우지 않는다. 한의원에서도 부인과와 관련해 특화한 곳들이 난임 당사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노력한다. 난임병원 의사에게 비관적인 이야기를 들은 날, 나는 유튜브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서울 강남의 난임 전문 한의원을 찾아갔다.
낙심한 나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희망을 말하는 원장의 위로에 큰 위안을 얻었다. 한 봉에 약 1만원 하는 한약을 짓고, 1회에 9만원 하는 약침과 뜸을 놓는 치료를 주 2회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의료보험도 전혀 되지 않는 난임 치료는 도저히 한 번 이상 할 수 없었다. 내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있었다면, 그 한의원을 열심히 다녔을지도 모르겠지만 도저히 그 비용과 시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그래도 받아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실패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기에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노화를 방지하고 회복을 돕는다는 백옥·신데렐라 주사와 같은 갖가지 회춘 시술도 난임 여성에게 희망을 말한다. 이 주사들은 대체로 멜라닌 합성을 억제하는 글루타치온 성분을 피부에 직접 주사해 피부톤을 개선하고 잡티를 제거하고 항산화 작용을 통해 피부의 노화를 막는 용도인데, 난임 여성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입소문이 나 있다. 성형수술 정보와 각종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피부과 진료를 받을 때 할인받으라는 조언들이 난임 카페에 많이 올라와 있다. 한 번에 5만~10만원씩 하지만 주사를 여러 방 맞아야 성과도 좋다는 말에 조금 더 저렴하고 후기가 좋은 병원을 찾아 폭풍 검색을 하다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 역시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한약과 각종 의약품, 영양제 등을 구입해 복용하며 충성스러운 난임 산업의 소비자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산업과 자본은 취약성을 잘 파고든다. 개인적으로 난임을 둘러싼 산업은 아마도, 더 확장될 것으로 예상한다. 결국 난임 여성의 손을 잡아줄 곳이 이곳뿐이기도 하고, 미래에도 만혼의 영향으로 난임 치료를 요구받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난임 여성으로 살면서,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개편 논의 중 산부인과와 관련한 논의는 얼마나 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산과 의사는 늘어날까. 저출생 시대에 산과 의사를 지원하는 의대생이 많을 리가 없다. 반면 부인과 의사는 미래에도 수요가 있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난임 전문의를 희망하는 의대생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난임병원 의료진은 필수 의료인일까. 우리 사회는 난임 치료에 대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커가는 난임 산업에서 난임 당사자가 소외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부의 적절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해 보인다. 현재 의사의 판단에 따라 실시하는 급여 치료와 비급여 치료의 구분에 빈틈은 없는지, 비급여 진료를 급여 진료보다 더 먼저, 더 많이 하고 있다면 이는 온당한지, 희망과 낙관을 쉽게 말하며 난임 환자들의 미래를 좀먹는 그런 산업의 오용은 없는지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난임여성A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경호처 ‘윤석열 찬양곡’ 원곡자 “이렇게 개사 되다니 당혹”
‘윤석열 체포적부심 기각’ 판사 살해 위협…경찰 수사 착수
[속보] 헌재 ‘윤 탄핵심판’ 첫 증인신문, 1월23일 김용현
[단독] 이재명, 윤 체포 관련 “과격 발언 삼가라” 당내 당부
삼성전자 반도체 성과급이 겨우…모바일은 연봉 44% 주는데
공수처 “윤석열 구속영장 서부지법에 청구할 듯…준비 거의 마무리”
트럼프 취임식 참석 나경원 “야당의 내란 선동 알리겠다”
그런데 김건희는…?! [그림판]
[단독] 강정혜 인권위원도 ‘윤석열 방어권 보장’ 안건 철회
접니다, 윤석열 ‘가짜 출근’ 잡아낸 기자 [The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