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관 카페를 비롯한 난임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이미지. 커뮤니티 화면 갈무리
임신 초기 유산하고도 휴가 한 번 쓰지를 못했다. 소파술(자궁내막을 긁어내는 외과수술)을 하면 유급휴가가 3일 이상 나오지만 누가 말리지도 않았는데 회사에 내 변화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유산 수술은 한 번인데, 임신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 마음을 주변에 알리는 것도 부담이었다. 푸르고 맑았던 가을의 초입, 나는 고작 1~2g에 불과했던 태아를 잃고 길거리에서 서럽게 울었다. 그게 나의 서투른 유산 대처법이었다.
하루 연차만으로 유산의 아픔을 덮기란 불가능했다. 직장 생활과 시험관 시술을 병행하는 스트레스가 쌓여갈수록 빠르게 지쳐갔다. 힘들게 채취한 난자를 수정시켜 자궁에 이식하고도 충분히 쉬지 못한 채, 내가 담당하는 기업 전무와의 회식 자리에 나갔다. 그 봄밤 11시까지 이어진 회식을 버티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런 나의 모든 노력이 부질없음을, 지금 나에게는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휴직을 결정한 뒤 난임으로 우울한 이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없는지 찾아보다 ‘권역 난임 우울증 상담센터’를 방문하게 됐다. 이곳에서는 나와 같은 표정의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울증 상담을 잠시 받은 뒤, 상담사는 마른 꽃으로 작은 하바리움(보존 기능이 있는 특수 용액 속에 마른 꽃을 보관하는 소품)을 함께 만들며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 참여를 권했다. 그곳에는 또래 여성 10명이 함께했다.
우리는 각자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짧은 목례를 했다. 나보다 언니인 40대는 3명 정도 있었고, 다들 비슷하거나 다른 이유로 난임 치료를 이어오고 있었다. 다들 담담한데 나만 내 이야기를 하며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던 기억이 난다. 나보다 경험이 더 많아서인지, 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인지 이들에게서 난임 치료 과정을 현명하게 버티게 하는 여러 조언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약 2시간 동안 작은 꽃 한 줄기 한 줄기를 유리병 안에 예쁘게 키 맞춰 꽂으며 하바리움을 완성하기 위해 집중한 시간 동안 작은 성취감도 느꼈다. 당시의 내 마음이 담긴 그 하바리움은 한동안 내 방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서울 지역에 이런 난임 우울증 상담센터가 있는 것도 잘 몰랐지만, 휴직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에서는 쉽게 당도하지 못할 지역(강남, 송파) 단 두 곳에만 센터가 있다는 점은 아쉬웠다. 결국 나는 복직한 뒤에는 더 이상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못했다. 가임 여성 또는 신혼부부 인구수에 따라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구청이나 지방자치단체도 있지만,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남편에게 여러 차례 말해봤지만, 바쁜 남편은 나만큼 난임 치료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았다. 시험관 시술의 특수성 때문에, 이 힘든 과정을 겪어본 이들만이 공유하는 초조함과 긴장감, 좌절감이 유별나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진실이었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수 있는 게 시험관 시술이었다.
유튜브도 잘 보지 않던 내가 각종 난임 여성 커뮤니티에 가입하기 시작한 건 유산까지, 한 번의 시험관 시술을 완전히 끝내본 뒤였다. 정부의 난임 치료 지원금을 받았음에도 수백만원의 약값과 수술비를 지불하고 나서야 시험관 시술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고 그제야 온라인 난임 카페에 쓰여지는 글들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회원수 11만7천 명의 한 네이버 카페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글이 올라온다. 배아의 발달 과정이나 병원 또는 의료진, 보험과 지원금, 추천하는 영양제 등 난임 생활에 필요한 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가입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차수 난임 환자인 나는 이제 고민 상담을 넘어, 난임 커뮤니티 ‘눈팅’이 꽤 즐거운 텍스트 읽는 시간이 돼가고 있다.(물론 일상이 이미 충분히 바쁘기 때문에 일상을 방해할 만큼 빠져 있지는 않다.)
“휴직하고 복직하니 커리어가 망가진 기분”이라는 한 회원은 시험관 시술을 2년간 받았다고 했다. 난임 치료를 위해 휴직하기 전에는 메인 부서에 있었으나 임신한 뒤 복직하니 서브 부서로 발령이 나 있었다고 했다. 곧 육아휴직에 들어갈 사람이니 업무 배려를 해주라고 하는 말이 괜한 차별로 들렸다는 이 여성의 글에 달린 댓글들은 공감 일색이었다.
“시험관 하면서 승진이 밀렸다. 유산 휴가 쓰고 나니 바로 자리가 바뀌었더라. 억울하고 화난다. 그래서 더 임신에 매달리게 된다. 어차피 잃을 거 잃고 임신은 됐으니 이거라도 지켜야 한다. 그런 생각 하면 마음이 가끔은 헛헛하다. 아기 무사히 낳고 한 2년 뒤 복직하면 더 일과 멀어지겠지 싶다. 아이를 선택한 대가가 크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꼬×)
“승진하고 휴직해도 경력 단절은 똑같다. 그래도 아이가 더 중요하고 간절했기에 제가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요×맘)
나 역시 이들의 댓글에 공감했다. 아이를 선택했지만, 시술 과정이 길어질수록 포기하는 것이 늘어나는 이들의 고뇌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질문하면서 말이다.
지역 난임 여성들의 고단한 상경기를 생생하게 전한 프로그램을 제작한 언론인도 온라인 카페에 모이는 난임 여성의 특수성을 말했다. 2024년 여름 여수 문화방송(MBC) 특별기획 라디오 다큐멘터리 ‘지방 난임 부부 지원 프로젝트 15% 이야기’를 제작한 이용선 현 MBC 라디오 피디(PD)는 “난임 치료라는 폐쇄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친구나 가족에게 이를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이 PD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맞벌이 부부가 늘고 만혼이 늘면서 자녀 계획이 뒤로 밀리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사회문제”라며 “인상적인 것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은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난임 부부도 적었다. 단지, 마스크를 쓰고 병원을 오가며 혼자 묵묵히 이 시간을 견디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이 의지하는 곳이 바로 온라인 커뮤니티”라고 돌아봤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지상파 라디오 부문 2024년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에 선정됐다.

시험관 시술이라는 같은 경험을 한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서사가 있었다. 난임 생활을 버티는 힘은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였다. 게티이미지뱅크
본인의 선택이지만, 난임 생활을 버티는 힘은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였다. 누구에게도 쉽게 밝히기 어려운, 그래서 외로운 난임 치료 과정에서 자기 중심을 잡고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의 고민을 엿보는 일은 그 시간을 버티는 데 꽤 도움이 됐다. 온라인상에서 이름 모를 이들의 위로가 무슨 도움이 될까 비웃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되는 건 내 경우 진실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온라인 카페 생활이 필요했다. 임상 사례를 차곡차곡 쌓아가면 꽤 큰 힘이 됐다. 그러나 참고용일 뿐이다. 의학적으로는 의사가 아닌 이상 부정확한 정보에 기대서는 안 되고, 쉽게 판단하지 않아야 했다. 모든 것은 사바사(사람마다 다르다), 케바케(케이스마다 다르다)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자신의 멘털이 흔들릴 일이 적었다.
난임 여성으로서 (내 처지를 잊는다면) 난임 여성의 서사가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콘텐츠로 제작되는 것을 보면서 반가운 마음이 크다. 인플루언서가 되겠다는 열망에서 자신의 고통을 올린다고, ‘관종’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의 지적도 다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자기 노출을 감내하고도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자체가 여성들이 화자가 되고 주체가 되는 시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보여서다.
여성들은 자신의 결정을 수용 또는 반추하면서, 모체와 직장 여성, 배우자, 딸, 며느리 등 자기 상황을 직시하면서 자기 위치를 깨달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또 내 여성성을 비하하거나 더 나아가 내 정체성마저 부정하며 기존 가치관이 무너지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여성들의 위로와 연대의 힘 덕분이었다. 무너진 여성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로서 여성 커뮤니티의 확장 속에서 여러 서사가 흘러나오며 또 새로운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벽을 부수는 밑작업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난임 여성의 이야기가 방송과 신문, 각종 콘텐츠로 제작돼 터져나오는 것과 비교해 난임 남성의 이야기는 여전히 수면 아래 감춰져 있다. 난임병원에서 스쳐가는 많은 남편 중 일부는 여성만큼 치열하게 난임 치료를 받고 있다. 여성들과 함께 주사실에서 주사를 맞고, 정자 수가 적으면 남성 역시 의료진이 직접 정자를 채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남성들은 난임을 호소하는 여성과 비교하면 소수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난임병원에서 만난 남성들의 이야기 역시 더 드러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기존 연구 자료를 찾아보니, 난임 남성들은 사회적 수치심과 두려움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난임 남성들은 배우자가 난임 치료 중에 겪는 여러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고, 재정적 고민 등에서 여성과 다른 독특한 심리·사회적 어려움을 경험한다고 한다. 난임 남성 역시 우리 사회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라는 사실을 여성 커뮤니티의 폭발적 증가 속에서 느낀다. 2019년 김선혜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연구원일 때 작성한 논문 ‘재생산의료 영역에서의 남성: 한국의 보조생식기술과 난임 남성의 비가시화’에서도 같은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난임여성 A
*우리들의 난임일기: 난임여성 A는 대학 졸업 뒤 사회생활 18년차가 된 서울 거주 여성입니다. 직업은 기자입니다. 난임 치료를 받는 1년5개월가량 꾸준히 일기를 쓰면서 난임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난임은 젠더, 의료, 인구 문제와 복잡하게 얽힌 사회문제입니다. 난임 여성이 회사, 가정, 병원에서 겪는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4주에 한 번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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