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전남 순천에 이상한 집이 생겼다. 파란 대문을 단 79㎡(24평) 가정집인데 오만 사람이 맘대로 드나든다. 이 ‘공유공간 너머’는 임경환(46) 재미난협동조합 이사장의 질문에서 시작했다. “모두의 집은 가능할까?” 임 이사장은 개인 연구실로 빌린 이 집 문을 모두에게 열었다. 규칙은 없다. 아무나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문다. 청소도 빨래도 하고 싶은 사람이 한다. 엉망진창이 되지 않을까?
“신뢰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질문은 곧 이렇게 바뀌었다. ‘너머’에는 ‘모두의 냉장고’ ‘모두의 서랍’ ‘모두의 돈통’이 있다. 음식, 물건, 돈을 넣고 싶은 사람이 넣고, 누구나 가져갈 수 있다. 누군가 청소를, 누군가 빨래를 했고, 누군가 공과금을 냈다. 돈통에 돈이 빈 적이 없다. 2024년 4월 ‘너머’가 이사했는데 폐기물 처리는 돈통에 남아 있던 7만원으로 했다. 초기엔 월세를 임 이사장이 냈는데 누군가 나눔장터를 열어 수익금을 보탰고 이어 기부자들이 나섰다.
이사한 ‘너머’ 아래층 ‘재미난가게’에서 임 이사장을 6월7일에 만나 물었다. 악당 한 사람 나타나면 다 깨지는 거 아닌가? “미리 그런 사람을 상정하면 계속 그 상태를 경험하잖아요. 완전히 다 풀어놔도 별문제가 없다는 걸 경험할 수 없죠. 질문하고 큰 고민 없이 가볍게 해보는 거예요.”
‘너머’는 임 이사장에겐 ‘자기 관찰’ 프로그램이다. ‘모두의 돈통’에서 한 청년이 옷을 산다고 10만원을 가져간 적이 있다. 400여 명이 모인 ‘너머’ 온라인 밴드에서 토론이 일었다. “모두의 돈이라고 생각하면 누가 어떻게 쓰든 상관없지 않나? 넣은 사람 돈이라고 생각하니 그 사람 취지에 맞게 썼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 아닐까?” 그래서 ‘너머’엔 계속 아무런 규칙이 없다. 한 동네책방 사장은 ‘너머’에 이런 후기를 남겼다. “이 공간에 오면 자유로워요.”
‘완벽한 타인’을 향한 마음을 실험하기에 ‘너머’는 한계가 있었다. 온라인 밴드에 들어와야 대문 비밀번호를 알 수 있다. 밴드 가입 조건은 없지만, 밴드의 존재는 누군가의 소개로 알 수밖에 없다. 불특정 다수가 신뢰를 경험할 수는 없을까? 재미난협동조합이 카페 ‘재미난가게’를 2023년에 연 이유다. 33㎡(10평) 남짓한 이 공간의 한쪽 벽면엔 “맡겨놓은” 포스트잇이 빼곡하다. “에이드 한 잔, 실수해도 괜찮아.” 하고 싶은 만큼 선결제하고 포스트잇을 붙여놓으면 순천 청소년 누구나 그 포스트잇을 떼어내 쓸 수 있다. 동네책방 사장님은 ‘맡겨놓은 책 10권’을 고를 수 있는 쿠폰을 내놨다. 다른 가게로도 옮겨 간다. 임 이사장이 동네 닭갈빗집에서 2만5천원을 선결제하고 “제일 먼저 들어온 청소년에게 주라”고 “맡겨놓는” 식이다.
재미난가게는 후원금으로 빵을 만들어 매주 100원에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처음엔 아이들이 의심했다. “마약 탄 거 아니에요? 마케팅이에요?” 요즘엔 매주 줄을 선다. 한 초등학생은 재미난가게 ‘맡겨놓은’ 게시판에 “빵 사 먹고 싶은데 100원이 없을 때만 가져가면 굿”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100원을 붙여놨다. 그 100원을 쓴 청소년은 “네 덕분에 굶주린 학생 살맛 난다”고 답글을 달았다. “아이들한테 보통 뭘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주잖아요. 다 교환이죠. 그걸 깨고 싶었어요. 뭘 해서가 아니라 순천 청소년이니까 주는 거예요. 저는 이런 게 환대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그런 느낌을 한 번이라도 받았으면 좋겠어요.”
“화폐란 무엇일까?” 재미난가게의 ‘이로운 이용권’은 이 질문에서 탄생했다. 이용권 뒷면엔 이걸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적혀 있다. ‘김성근님에게 비폭력대화법 배우기’ ‘박혜성님과 핸드드립커피 마시며 이야기하기’ 등이다. 1만원을 낸 사람이 이용권으로 박혜성씨와 이야기 나누면, 혜성씨는 받은 이용권을 들고 다른 사람에게 간다. “이 이용권이 돌면서 사람을 연결하죠. 소개팅하는 기분이에요.”
“은행의 역할은 뭐지?” 공유공간 ‘너머’의 두 번째 확대 버전은 공동체은행이다. 2022년 ‘너머’의 집주인이 전세 전환을 요구했다. 보증금 3천만원에 월세 30만원씩 내왔는데 목돈 8천만원이 필요해진 거다. ‘너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돈을 모았다. 전세금을 내고도 269만원이 남았다. 공동체은행을 실험할 종잣돈이다. 이자는 없다. 상환 기한도 빌려간 사람이 정한다. 대출 조건은 딱 하나다. ‘너머’ 온라인 밴드에 들어와 있는 400여 명이 대출이 필요한 사람의 사연을 읽고 반대만 안 하면 된다. 휴대전화 요금, 식비…. 첫 대출 60만원으로 시작해 2024년 3월까지 13명이 빌려갔다. 돈을 보태서 갚기도 한다. 사연을 읽고 자기 돈으로 빌려주라며 공동체은행에 송금하는 사람도 있다. 이 은행의 잔고는 965만원으로 늘었다.
“나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나.” 지난 3월 공동체은행이 한 언론 보도로 알려지면서 이제까지 알음알음 밴드에 들어왔던 사람들을 넘어 완벽한 타인들에게서 사연이 몰렸다. “카카오톡 연결 계좌로 입금하려 했는데 그 사람 프로필과 사연이 너무 다른 거예요. 결국 돈을 안 보냈어요.” 그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자기 마음을 봤다. “난 진짜 사람을 믿나? 믿는다는 건 뭐지? 제 신뢰의 범위를 점검하게 되죠. 제게 엄청나게 큰 공부인 거 같아요.” 차용증이나 담보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온라인 모임에서 나왔다. “그러려면 우리가 왜 이걸 하지?” 공동체은행은 일단 멈추고 의견을 모으는 중이다.
그는 왜 신뢰의 경계를 탐색할까? 왜 연결이 중요할까? 전북 완주가 고향인 그는 8살 때 부산으로 이사했다. “완주에선 만날 애들하고 냇가에서 놀았어요. 마을에서 보살펴줬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 어릴 때 그 마을을 떠나면서 근원적 그리움이 남았던 거 같아요.”
대학에서 야학 활동하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만났다. “대안학교에서도 거절당한 애들이 있었어요. 어떻게 야학이 아이들을 품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죠.” 그 아이들이 삶의 방향타가 됐다. 신문사, 출판사 등을 거치고 국어교사로 일한 뒤 학교 밖 청소년 네트워크인 ‘학교너머’에서 활동했다.
“왜 학교는 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우리가 가면 안 되나?” 2011년 그는 낡은 경찰버스를 샀다. 그 차에 학교 밖 아이들 18명과 그를 포함한 선생님 3명이 타고 300일 동안 전국을 돌았다. ‘공감유랑’이다. 가는 곳마다 숙소와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고생길이기도 했다. “돈 있는 집안 아이들이 며칠 누리고 가는 캠프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매일 밤 날 선 말이 오고 가는 회의가 열렸다. “제가 많이 깨지는 과정이었어요. 처음엔 저한테 뭔가 교사스러운 게 있었죠. 동등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거죠. 아무리 헐거운 규칙이라도 규칙이 있으면 매이게 되더라고요. 여행 마지막엔 아이들이 그러더라고요. ‘선생님도 많이 컸네요.’”
이 규칙을 파괴하는 질문자에게 2018년 행정이 손을 내밀었다. 마을교육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중간지원조직인 순천시마을교육지원센터(현 순천시 풀뿌리교육 자치협력센터)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행정하고 일해본 적도 없고 중간지원조직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까지 해왔던 공동체와 교육 활동이 연결되겠더라고요.”
순천시 풀뿌리교육 자치협력센터에 가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타임라인이 있다. 2018년부터 이제까지 매월 벌여온 ‘정담회’와 거기서 다룬 주제들이다. 지역주민, 교사, 교육지원청과 지방자치단체, 시의원 등이 만나 토론하는 자리다. 보통 공공기관에서 민의를 모을 때 주민 가운데 몇몇을 위원으로 위촉하는데 이 정담회에는 멤버십 제한이 없다. 아무나 들어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공유공간 ‘너머’와 ‘공감 버스’의 행정 버전이다.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누가 올까? 욕먹을 일밖에 없을 거 같은데 공무원들이 참여할까? 그런데 주민이며 공무원이며 20~30명씩 꼬박꼬박 모인다. 변화를 체감하기 때문이다.
주제 가운데 하나는 ‘교육경비보조금’이었다. 주로 성적 좋은 아이들에게 돌아갔던 보조금이 ‘정담회’에서 나온 의견에 따라 2020년부터 ‘보통의 지역 아이들’용으로 바뀌었다. 균형발전을 위한 학교혁신 프로젝트, 장애 학생 교육프로그램 지원 사업 등이 생겼다. 스터디그룹 같은 소규모 마을정담회들도 생겼다. 순천마을배움터는 23곳으로 늘었다. “잘 연결되면 기분 좋잖아요. 누구나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진짜 마음이 있거든요. 상대의 그 마음을 인정하면 이어져요.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 같은 재미난 일이 일어나요.”
어떻게 사람이 선하다고 확신할까? “글쎄, 뒤통수 맞아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자꾸 돈을 줘요.” 재미난가게에서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공짜로 돌릴 머핀을 만들 때도 그랬다. 341명에게 1천원씩만 기부받는 프로젝트는 하루 만에 마감됐다. “그냥 믿어버리는 거예요. ‘아, 별일 없네’ 그러면 더 믿게 되고요. 믿는 만큼 이뤄지는 거 같아요.”
3년 전엔 ‘임경환의 허리’ 프로젝트가 벌어졌다. 공감유랑을 하며 대형버스를 몬 뒤 그의 척추측만증이 심해졌다. 누군가는 그를 위해 통성기도를 올렸고, 누군가는 한약을 지어 왔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구나. 모두가 돌보는 몸이구나. 이래서 공동체가 필요하구나.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했으면 좋겠어요. 한 사람을 위한 공동체, 그 한 사람이 공동체로부터 돌봄 받는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해요.” 공동체를 경험하는 순간은 조건 없는 환대를 받았을 때다. 돈이 신인 한국에서 그런 환대가 가능할까? “한계가 있겠죠.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그 경험을 잠깐이라도 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의 꿈은 “(완벽한 타인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물하는) ‘맡겨놓은 가게’를 100개 만드는 것”이다.
김소민 희망제작소 시민연결부문 연구위원
*[희망제작소×한겨레21 공동기획] X의 지역작당: 경쟁이 아닌 연대, 개인이 존중받는 공동체, 자연을 해치지 않는 인간의 삶을 찾아 다 아는 길 대신 미지의 X를 택한 사람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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