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창업하기 좋은 곳이 농촌이라고? 빈말 아니다. 서울 토박이 김만이(36) 초록코끼리 대표가 충남 홍성에서 직접 보여줬다. 안정적 직장인 국책연구소(한국농촌경제연구원)를 그만두고 허허벌판에서 밀키트를 만들더니, 홍성의 유기농 농작물로 새벽배송까지 판을 넓히다, 이제 홍성 원도심을 스타트업이 모이는 로컬판 ‘성수동’으로 만들고 있다. 급커브를 팍팍 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스스로 정한 북두칠성을 기준 삼아 자기 인생을 항해 중이다. 그 북두칠성은 저평가된 농촌의 가능성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이다. 그를 2024년 2월5일 홍성 초록코끼리 사무실이 있는 ‘잇슈창고’에서 만났다.
“농촌에 정말 할 일이 많다.” 외삼촌의 이 말을 듣고 영문학을 공부하며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농업 이슈를 찾아봤다. “이 분야에서 진심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을 하건 한국 농촌에 긍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평판으로 제 커리어를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가 농업자원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국책연구소에 들어갔는데 1년 만에 사표를 던진 까닭도 그 결심을 이루지 못할 거 같아서였다.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농업·농촌 관련 교육·컨설팅 기업에 입사해 3년을 일했다. “시도할 때마다 농촌에서는 안 된다고들 하더라고요. 그런데 다 됐거든요.”
그가 인구 3만 명인 충남 청양의 버려진 여관을 청년들의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도 “청양에 청년이 어딨느냐, 탁상공론”이라는 냉소가 돌아왔지만, 프로젝트는 성공했고 이 공간을 바탕으로 청양은 행정안전부가 지원하는 청년마을 사업지로 선정됐다. 청양 특산물인 고추로 햄버거를 만들었는데 잘 팔렸다. “누군가 진심으로 파고들면 지역에 가능성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직접 그 가능성을 실현해보고 싶었어요.” 지역에서 창업하겠다니 아내 빼고 모두 “은퇴 뒤 가라”며 반대했다.
2020년 서울시가 청년들의 지역 창업을 돕기 위해 마련한 ‘넥스트로컬’ 사업 공고가 눈에 띄었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140개팀 가운데 서바이벌 형식으로 10~20개팀만 최종 선발한다. 그는 홍성을 택했다. “홍성은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유기농업특구예요. 역사와 철학을 가진 분들과 뭔가 해보고 싶었어요. 청년이 귀농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농촌에서 잘살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요.”
홍성에 간 10팀 중 그가 이끄는 초록코끼리만 지역에 남아 창업했다. “사무실에서 농부님 만나 계약서 놓고 농작물을 ‘사주겠다’는 태도는 통하지 않아요. 농부님들에게 땀과 정성으로 기른 작물은 거의 반려동물이거든요. 이분들의 한 시간은 대도시 직장인의 한 시간보다 훨씬 귀할 수 있어요. 한두 시간 내린 소낙비에 대처 못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기도 하거든요. 이분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죠.” 그래서 그는 밭으로, 하우스로 갔다. 모종을 안절부절못한 채 심으며 농부들과 이야기했다. “진심이 전해졌어요. 지역의 특성이 처음은 어렵지만 한번 받아들여지면 가만히 있어도 알려져요.”
애초 계획은 상품성이 떨어지는 ‘파지’ 농산물을 활용해 비투비(B2B·기업 간 거래)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었는데 농부들은 “그런 사업은 필요 없다, ‘파지’를 딸 사람도 저장해둘 공간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홍성 유기농산물을 활용한 밀키트로 방향을 틀었다. “코로나로 간편식 수요가 늘어나는데 당시 친환경, 로컬 밀키트는 전무했어요.” 목살스테이크, 남당항 감바스 등 20여 가지 메뉴를 개발했다.
그가 가진 자본금은 1천만원이었다. 돈 안 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마케팅했다. “식품, 테이블링 예쁜 사진 올리는 사람들이 못하는 거, 우리만 할 수 있는 게 뭘까? 원재료가 나오는 현장은 그 사람들이 못 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상품 재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줬어요.” 2020년 10월 초록코끼리의 밀키트가 세상에 나오고 3년 뒤 매출은 6억원까지 꾸준히 늘었다. 전국 택배가 매출의 30~40%, 지역 주민이 20%, 홍성군에서 30%, 나머지가 10%를 차지했다. 여기서 그는 방향을 틀었다.
왜 새벽배송인가? 대도시 외에도 이게 가능할까? “농산물 유통 문제를 건드려보려 했어요.” 한국 농산물 유통 시장은 도매 중심으로 설계됐다. 서울 가락시장, 경기도 구리 도매시장 등이 수도권을 떠받치는 식량의 전초기지 구실을 한다. 전국의 농수산물 60%가 도매시장에 모이고 이곳에서 가격표를 받는다. 홍성 농산물이 가락시장을 거쳐 홍성 주민의 식탁에 오르는 셈이다. “1980년대부터 똑같은 문제가 이어지고 있어요. 다른 나라들은 식품 생산지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리인 푸드마일리지를 줄여가는데 우리는 계속 늘어나요. 신선한 농작물이 지역에서 나오는데, 왜 지역 사람들은 마지막 수요처가 돼야 하나요?”
그는 대도시에서만 벌어지던 ‘핫’한 서비스인 새벽배송으로 홍성의 유기농산물을 홍성 주민과 연결하는 방식을 구상했다. 대표적 유통업체도 적자를 내는데 배송기사도 직접 고용할 수 없고 식품을 보관할 냉장창고도 없는 초록코끼리가 어떻게? 2022년 7월 초록코끼리는 한국 최초로 시군 단위 새벽배송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지역에 이미 새벽배송이 있는 거예요. 우유요. 우유 업체들은 저온창고도 있잖아요. 우유 업체에 제안했더니 반겼어요.”
새벽배송에 알맞은 메뉴를 고민하다 샐러드 구독 서비스를 하는 홍성의 청년 사업자와 손잡았다. 샐러드는 잘 팔렸다. 7월 첫 매출은 1천만원, 12월엔 4천만원까지 올랐다. 이 모델이 가능함을 확인한 그는 천안, 세종, 공주까지 확장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2023년 초 다시 방향을 틀었다. 새벽배송뿐만 아니라 밀키트 사업에도 일단정지 버튼을 눌렀다.
2022년 어느 새벽, 밀키트 주문이 한꺼번에 600개씩 몰려오던 날, 그는 허허벌판에 만든 제조실에서 홀로 일하고 있었다. “얘기할 사람이 없으니 너무 고독하더라고요. 이러다 내가 홍성을 떠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여기 있지? 이걸 하려고 내려왔나?”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금을 받아 공장을 지을 기회가 왔을 때도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식품공장 사장이 되려고 홍성에 왔나?” 그는 자신을 홍성으로 이끈 첫 결심을 꺼내보고 공장은 접었다.
지역에 있는 자기처럼 외로운 청년 창업가들을 찾았다. “처음엔 제가 사기꾼인 줄 알았다더라고요. 이야기하다보니 다들 저랑 비슷한 거예요. 각자 홀로 모래성을 계속 쌓는 느낌이요. 그래서 우리 이렇게 저렇게 합쳐 일해보자 제안했고, 실제로 시너지를 확인했어요. 샐러드 새벽배송이 그 예죠.”
2023년 초 그는 경기가 나빠져 가공식품 산업에 겨울이 닥칠 거라 판단했다. “농업의 여러 문제를 비즈니스로 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제가 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가능성을 보여줬으니 밀키트 식품 사업을 불황기에 무조건 끌고 갈 이유가 없었어요. 적어도 제 돈벌이 할 기반은 마련했으니, 다른 청년들이 농촌에서 잘살 수 있도록 지원해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농촌에는 다양한 시각으로 농업의 부가가치를 띄워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디자인, 브랜딩, 마케팅… 농촌의 많은 문제가 정부 예산을 푼다고 풀리지 않아요. 민간에서 청년이 창업으로 해결해볼 만해요.”
그와 홍성의 창업가 다섯 팀이 뭉쳐 ‘집단지성’이란 이름으로 행안부의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에 도전한 까닭이다. 행안부는 2021년부터 매해 지역에 청년마을 12곳을 뽑아 3년 동안 지원해왔다. 2023년엔 161개팀이 도전했다. ‘집단지성’이 뽑혔다. 예산이 끊기면 청년마을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집단지성’의 제안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달랐다. 이들이 내세운 건 지속 가능한 ‘로컬 스타트업 빌리지’다.
그게 뭐가 새롭냐고? 제안이야 다 지속 가능하다고 하지 않냐고? ‘집단지성’의 차별점은 직접 지속가능성을 증명해 보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가공유통업, 관광, 콘텐츠, 디자인 등 분야별로 지역에서 3~7년 고군분투하며 쌓은 노하우가 있다. “농촌에 스타트업 콘텐츠가 정말 많은데 사람은 부족해요. 도시보다 경쟁이 덜하죠. 그러니 가능성이 커요. 제대로 된 아이템과 열정만 있으면 수익을 낼 수 있어요.”
2023년은 ‘집단지성’의 “양적 실험”의 해였다. 120명이 홍성에서 3박4일 체류하며 식품, 농업, 콘텐츠 분야를 탐방했다. 그 뒤 창업 과정까지 도전해볼 12팀을 뽑았다. 원래 계획의 두 배 규모였다. “요즘 지방자치단체에선 예산 지원 경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저희는 팀당 지원 예산이 300만원밖에 안 됐어요. 그래도 청년이 몰렸어요. 청년은 시간을 들인 만큼 성과를 가져갈 수 있는지를 따지거든요. 같이 이야기하고 자원을 연결해줄 멘토가 필요해요.”
코딩을 잘하는 한 청년에게 그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지역을 알리는 방법은 다 비슷할까? 그 청년이 “홍성 홍동면을 방탈출 게임의 장으로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홍동마을 탐사대’ 게임이다. 한 장소에서 미션을 수행하면 온라인으로 힌트가 나온다. 두세 달 동안 30~40명이 실제 이 게임을 해봤다. 그 청년은 이 테스트를 바탕으로 로컬관광 콘텐츠형 게임제작 업체인 ‘로터리’(로컬+스토리)를 2024년 론칭할 예정이다.
초기 구상했던 ‘파지’ 프로젝트도 있었다. “시골에 있으면 기후위기를 체감해요. 2023년 감자 작황이 정말 안 좋았어요. 가락시장에서 정해놓은 농산물 규격을 벗어나면 ‘파지’가 돼서 다 버려야 해요. 저희가 ‘파지’ 감자를 ㎏당 300원, 1톤(t)을 사서 워크숍을 했어요.” 청년들은 감자 문제를 파헤치는 게임, 감자붕어빵을 만들었다. 장터에서 감자붕어빵은 인기가 좋았다. “파지도 부가가치 높은 콘텐츠가 될 수 있는 거죠.”
홍성 유기농 콩으로 낫토도 만들고, 문 닫은 우사에서 ‘레이브 파티’(여러 사람이 빠르고 현란한 음악에 맞춰 춤추며 즐기는 파티<em>)</em>도 열었다. 그렇다고 ‘양적 실험’을 벌인 2023년이 온통 무지갯빛이었던 건 아니다. “창업을 쉽게 보거나 농촌을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지역을 낮추보는 건데, 원재료를 ‘사주겠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2024년 ‘홍성판 성수동’의 가시적 성과를 거둬야 한다. ‘집단지성’은 홍성읍 원도심에 공유오피스 하나, 브랜드 상점 4곳을 여는 걸 시작으로 ‘스타트업 거리’를 만들어가려 한다. 2023년 참가자 가운데 4팀이 2024년 창업 예정인데 그중 둘은 이 공간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인지도가 낮은 홍성에서 그런 거리가 가능할까? 인천 개항로처럼 내세울 역사적 특색도 없다.
“우리가 잘하는 게 뭐지? 새로운 접근, 혁신을 키워드로 잡았어요. 로컬에서 새로운 것이 매주, 매달 일어나는 공간을 만들자고요. 그걸 홍성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홍주읍성 안에서 해보자고요. 홍성 유기농 낫토, 폐우사 레이브 파티도 우리가 최초였잖아요.”
이 거리에 ‘셰프의 학교’도 계획하고 있다. 홍성 친환경 유기농 식재료와 젊은 셰프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다. “친환경 농산물은 판로가 부족해요. 셰프들은 새로운 식재료를 원하고요. 셰프들이 홍성에 머물며 메뉴를 개발하고 여러 형태로 활용하는 거죠.” 작고 혁신적인 브랜드들이 각각 수익을 내는 구조와 스타트업을 하고 싶은 청년이 오고 싶은 문화를 만드는 게 그의 목표다.
불안하지 않을까? “대학 나와 대기업 다니다 집 사서 아이 낳고 이런 ‘도시의 방식’을 보통 정답이라고 하잖아요? 정말 그럴까? 벗어나보니 다른 방식도 보이더라고요. 불안하죠. 그런데 긍정적인 불안이라고 생각해요. 제 삶의 결정권을 제가 쥐고 있어 생기는 불안이거든요. 걱정에 압도되지 않으려면 숲과 나무를 유연하게 옮겨가며 보는 게 중요해요. 너무 큰 그림이 허황하게 느껴지면 세세한 나무에 집중하고요, 나무만 보다 걱정거리가 늘면 다시 숲을 봐야죠.”
그가 회사 이름을 ‘초록코끼리’라고 지은 데는 이유가 있다. “코끼리는 힘이 세고 지능이 높은, 생태계에서 중요한 동물이에요. 저는 우리 농촌, 농업이 코끼리 같아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공간인데 무시당하는 곳이요.” 그가 꿈꾸는 지역의 미래는 온갖 색깔 코끼리들이다. “어떤 곳은 농업으로 어떤 곳은 디자인으로, 전국 140개 시군이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곳”이다.
홍성(충남)=글·사진 김소민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경쟁이 아닌 연대, 개인이 존중받는 공동체, 자연을 해치지 않는 인간의 삶을 찾아 다 아는 길 대신 미지의 X를 택한 사람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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