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 ‘러스틱타운’은 예상을 비껴가는 곳이다. 산 중턱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아침은 새소리가 연다. 그런데 어쩌면 당신은 이곳에서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잠자리에 들 수도 있다. 일에 몰입하는 곳이다. 자동차 키만 뺏으면 도망도 못 간다. ‘러스틱타운’의 지향점은 힐링이 아니라 불빛이 꺼지지 않는 ‘판교’다. 원래는 한옥 체험 관광용 ‘심청마을’이었는데 코로나19 이후 발길이 끊겼다. 협동조합 팜앤디가 곡성군의 골칫덩어리가 된 심청마을을 2022년 러스틱타운으로 바꾸고 기업 문을 두드렸다. 2023년 이곳에서 프로젝트 하나씩 끝낸 기업이 150여 개다.
2024년 3월28일 러스틱타운에서 만난 서동선(32) 대표의 답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치밀했다가 헐렁하다. 그를 포함해 친구 4명이 2018년 협동조합 팜앤디를 꾸렸다.
“어~ 축구나 모임 하다 알게 돼 밥 먹고 맥주 한잔 하고 빠이빠이 하는 사이였어요. 별별 얘기 막 하다가 농촌 공동체 정신은 가져가고 규범은 우리 스타일로 바꿔보면 재밌지 않을까? 그래서 온 거예요. 그때는 우리끼리 잘 맞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안 맞아요.”
“원래 다들 농촌에 관심이 많았나봐요.”(질문)
“어~ 완전 도시 ‘러버’들이에요.”
왜 굳이 곡성에 왔을까? 그는 광주광역시에서 나고 자랐다. “커뮤니티가 목적이었어요. 농촌이 더 적합했을 뿐이에요. 외로움, 고립 같은 ‘1인가구’가 겪는 문제를 농촌 마을 공동체가 가졌던 정신이 해결해주거든요. 이제 관계 단절이 쉬워졌잖아요. 축구동아리가 마음에 안 들면 안 가면 끝이죠. 그런데 농촌 커뮤니티는 다층적 관계를 맺어요. 싸우더라도 다음날 같이 일 나가고…. 삶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생활공동체인 연고지이거든요.”
이쯤 들으면 자기 철학과 확신이 확고한 사람 같은데 다음 답에선 또 방향을 튼다. “곡성에서 그리는 삶이 있나봐요.”(질문) “음, 별생각 없었어요. 깊이 생각 안 해요.” “싫은 건 확실한가봐요.”(질문) “싫은 것도 딱히 없어요. 뭐 하고 싶다는 개념이 원래 없어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을까?
그는 제대 뒤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 딸기를 땄다. 대규모 농업회사가 운영하는 밭이었다. “1등 한번 해보려고 열심히 땄어요.” 매니저 눈에 띄어 취직해 서브 필드매니저까지 됐다. 생육주기와 출하량을 조절하는 일 등을 했다. 돈도 잘 벌고 일자리도 튼튼했는데 호주 생활 3년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별로 깊이 생각 안 해요. 돈 보고 모이는 관계에 좀 신물이 나기도 했어요. 일단 군대 가기 전 1학년만 다닌 대학을 마쳐야겠다 해서 돌아온 거예요.” 그렇게 돌아온 대학을 중퇴했다. “별로 배우는 게 없어서 그만둔 거예요. 무슨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2017년 그가 먼저 할머니가 사는 곡성에 왔다. 이듬해 친구들이 합류했다. 그가 보여준 사진 속엔 그 친구들 중 한 명이자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개발자로 일했던 제이(닉네임)의 얼굴이 담겨 있다. 곡성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모내기 품앗이에 나간 제이는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표정이다.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간다니 네 명의 부모님이 반대했다. 2박3일 동안 부모님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설득했다.
서 대표가 곡성에 와 처음 한 일은? “노가다 뛰었어요. 돈 벌면서 집 짓는 거 배울 수 있잖아요. 지금도 제가 지은 집에 살아요.” 밤엔 창업을 준비했다. 처음엔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을 살려 농작물을 대규모로 생산하고 브랜딩하는 농업회사를 운영하려 했는데 땅을 구할 수 없었다. “생판 모르는 놈이 와서 빌려달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접었어요.” 기획재정부 주최 협동조합 창업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6개월 동안 24개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토란 정미소’가 그중 하나다. “토란 선별 기계를 발명한 농부가 계셨는데 이를 확장해 토란 가공을 한 번에 처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우체국과 협업해 지역 취약 농가를 위한 ‘500원 택배’도 만들었다.
협동조합 팜앤디의 이름을 확실하게 알린 계기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벌인” ‘청춘작당’(2019~2021년)이다. 청년들이 살아보고 지역에 정착하도록 돕는 ‘청년마을 사업’은 보통 3년 정착률이 1%를 넘기 힘든데, 100일 동안 곡성에 살아보는 ‘청춘작당’은 참가자 90명 가운데 26명이 3년 이상 곡성에 남았다. 한 기수에 30명씩 뽑았는데 400명씩 지원했다. 지원서엔 질문이 빼곡한 설문지가 있다. 이를 활용해 팜앤디는 지역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세부 데이터를 축적하고 타깃 마케팅을 벌였다.
‘청춘작당’ 프로그램의 세포마다 팜앤디가 생각하는 커뮤니티의 개념을 집어넣었다. “혼자 와서 우리가 되는 곳”이다. 그러려면 ‘형질변경’이 필요하다. 갈등은 필연이다. 서 대표는 청춘작당의 성공 이유로 ‘갈등 추적 매뉴얼’을 꼽는다.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요. ‘관계를 끊는 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시작해요. 싸워야죠. 싸움이 없는 건 갈등까지 가지 않은 아주 가벼운 관계라는 거죠.”
생판 모르는 사람이 5명씩 한집에 산다. 첫 20일은 자기 자신과 지역을 알아가고 이후 50일 동안 게임처럼 지역이 내준 ‘퀘스트’ 2개를 주민과 함께 깬다. ‘농가 딸기 체험 마케팅해주세요’ ‘도자기 명인 작품의 새로운 패키징을 만들어주세요’ 등이다. 이 험난한 게임을 거치면 지역 네트워크가 생긴다. 마지막 30일 동안은 전시, 취업박람회 등을 함께 연다. 이 모든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 룸메이트와, 팀원끼리 오만 가지 갈등이 쌓이고 터진다. 운영진에겐 이를 다루는 비기가 있다. “100쪽이 넘는 매뉴얼이에요. 갈등의 단계를 설정해놓고 운영진이 어떻게 조정해가야 하는지 세세하게 집대성했어요. 그 매뉴얼은 대외비예요.” 2년 동안 ‘추적’한 갈등을 예로 들었다. 닉네임 톰과 디디가 싸우고 말을 안 한다. 둘이 말을 섞을 수밖에 없도록 은근슬쩍 술자리를 만들고,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를 주고, 일대일 상담도 하고, “이걸 무한 반복해요. 해결되지 않는 갈등 하나 때문에 커뮤니티 전체가 못하는 게 많거든요.” 톰과 디디는 곡성에 정착했다. “지금 둘은 친구예요. 만날 싸우는데 또 잘 풀어요.”
그 100쪽 매뉴얼에는 팜앤디 초창기 멤버 4명이 겪은 온갖 갈등과 눈물이 녹아 있다. “엄청 많이 싸웠어요. 제가 가출해서 애들이 저 잡으러 광주에 오고 그랬어요. 지금은 저희만의 규칙이 있어요. 커뮤니티엔 공동의 목표가 있잖아요. 개인의 다양성은 존중하되 각 개인의 성향, 욕망 탓에 공동의 목표가 왜곡되면 안 돼요.” 더 동글동글하게 깎이는 과정은 괴로웠다. 왜 깨버리지 않았을까? “그게 공동체의 핵심인 거 같아요. 내가 빠졌을 때 커뮤니티에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하면 쉽게 못 빠져요. (젊은이들이) 커뮤니티를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커뮤니티를 만들기까지 과정이 싫은 거죠. ‘타인’을 위한 ‘내’가 돼야 하니까요. 배려, 양보, 주장, 설득, 대립 다 포함돼요. 공동체가 행복하냐고 저한테 묻곤 해요. 애초에 행복이랑은 다른 개념이에요. 공동체는 개인에게 좋은 영향을 확실히 줘요. 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돼요. 저도 원래 성격이 불같았어요. 앞뒤 안 가리고 틱틱 쏘고요. 이제 조절할 수 있어요. 상대에게 맞게 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요. 이건 ‘행복’이 아니라 ‘좋은 거’예요. 좋은 건 힘들어요. ‘힘들지만 좋다’이지 ‘즐거워서 좋다’가 아니에요.”
‘청춘작당’ 1기가 끝나자 24명이 남겠다고 했는데 16명이 집을 구하지 못해 돌아갔다. 팜앤디가 청년마을프로젝트 ‘청촌’을 시작한 까닭 가운데 하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함께 빈집을 리모델링해 청년들에게 10년 장기 임대했다. 입주 조건은 딱 하나다. “마을 공동체 활동을 함께 하는 거예요.”
27살에 곡성으로 이주했을 때 그는 집뿐 아니라 관계도 맨땅에 지어야 했다. 처음엔 그가 정착한 화양마을 담벼락을 꾸미겠다는데도 주민들이 반대했다. 지금 화양마을 담은 무지개색이다. 인사하고 일손 돕는 것부터 시작했다. 서울 대학생들의 ‘힙’한 옷을 화양마을 노인들이 입어보는 패션쇼도 벌였다. “처음엔 안 한다고 하시다 다 하세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닉네임’을 정했다. 햇님, 국화…. “‘산토끼’를 두고 두 할머니가 싸우셨는데 한 할머니가 다람쥐로 양보하셨어요.” 일본, 한국, 중국, 홍콩 대학생들이 8박9일 동안 화양마을을 방문해 주민 이야기를 듣고 옛 마을의 모습을 교회 벽화에 남겼다. “처음엔 외부인이 많이 오는 거 싫다 하시더니 청년들 언제 오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2018년 34명이던 마을 노인은 이제 17명만 남았다. 그가 청춘작당을 시작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 늙어도 이 마을이 유지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성공 사례였던 청춘작당 사업을 팜앤디는 3년 만에 멈췄다. 곡성군에 ‘팩폭’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자리가 없어요. 청춘작당으로 지역 인구 유입을 늘려갈 수는 있지만 살아남기 힘든 곳에서 살라고는 말 못하겠더라고요. 곡성군에 ‘이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라고 보고했어요. 저희 별명이 ‘싸가지 없는 애들’이에요. 대신 성과를 내죠.”
곡성군엔 주거, 문화콘텐츠, 일자리, 그리고 사람이 부족했다. “새로운 산업 구조를 들여와야 했어요. 새롭게 일하는 방식을 실현하는 장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었어요.” 팜앤디는 곡성군과 함께 관계기업, 관계인구를 늘리고 이들의 정착을 유도하는 정책 로드맵을 만들었고 그 1단계가 2022년 시작한 곡성판 ‘판교’ 러스틱타운이다. “‘워케이션’은 이미 저물었어요. 기업을 지역에 오게 하는 방법이 과연 관광일까? 몰입, 집중, 성과로 초점을 바꿨어요. 처음엔 지방정부나 행정안전부 설득하는 게 힘들었어요. 왜 관광 프로그램이 없냐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러스틱타운을 ‘에이치알(HR·인사관리) 서비스, 새로운 근무방식’이라고 홍보해요. 인사 담당자들의 편의에 맡는 결재 방식, 보안 서버 연결, 근태 관리 시스템 연동 같은 37개 서비스가 저희 강점이에요.” 130개 기업 인사 담당자를 만나 모델을 다듬어갔다. 곡성군이 예산을 지원해 1박에 6만원을 넘지 않는 공격적인 가격정책을 쓸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더 많은 기업이 곡성과 ‘관계’를 쌓아가게 하는 것”이다. 지난해 150곳에서 평균 4.6일을 보냈고, 재방문율은 43%였다.
2단계는 벤처캐피털 투자자들과 협업하는 창업마을이다. 벤처캐피털이 선발한 팀이 1년 동안 곡성에 살며 창업한다. 회사가 곡성에 남으면 여러 혜택을 주고 창업 뒤 수도권으로 옮겨가더라도 주식을 공공펀드로 취득해 연결 고리를 이어갈 계획이다.
3단계가 먼저 가시화했다. 러스틱타운이 관계기업 수 확장을 목표로 삼았다면 관계의 질을 심화하는 단계다. 좀더 오래 곡성에 머물게 하려면? 기업이 순환근무로 머무는 ‘유니콘빌리지’가 곡성군 삼기중학교 부근에 2024년 12월 문을 열 계획이다. 곡성군이 지역소멸대응기금을 투입했고 주택 20채와 200평짜리 공유 오피스가 들어온다. “기업과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계속 오고 가게 만들면 이 사람들이 관계인구가 되죠. 청춘작당은 끝났지만 참여자들은 1년에 한 번씩 홈커밍데이로 곡성에 모여요. 지역 브랜딩을 명확하게 하면 차별화할 수 있어요. 속도전이에요.”
“별생각 없다”며 왜 곡성에 사람을 끌어들이려 애쓸까? “어~, 그냥, 여기 사니까요.” 관계인구 늘리기 3단계 계획을 설명하던, 용의주도 전략가인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앞으로 꿈이 뭐예요?”(질문) “딱히 없어요. 그냥 주어지는 대로 살아요.” “전혀 주어지는 대로 안 살잖아요.”(질문) “팜앤디 공동체의 일원으로 해야 하니까 하는 거고요. 저희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잘 모르겠고 해봐야 알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망하더라도 저렇게 하면 망하는구나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거니까, 해보자, 그 정도 동기부여가 있는 상태예요.” 그는 이럴 때는 그래도 성취감이 든다고 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걸 볼 때요.”
팜앤디 4인방은 둘씩 부부다. 서 대표 친구 부부가 2022년 화양마을에서 딸을 낳았다. 마을 사람들은 군청 앞에 플래카드를 걸었다. “40년 만에 화양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 들렸다. 부럽냐?”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
*[희망제작소×한겨레21 공동기획] X의 지역작당: 경쟁이 아닌 연대, 개인이 존중받는 공동체, 자연을 해치지 않는 인간의 삶을 찾아 다 아는 길 대신 미지의 X를 택한 사람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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