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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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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에 기댄 이야기에 저항해야 한다

왜 이 시대는 위선과 속물을 폭로하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나
등록 2023-06-09 10:48 수정 2023-06-12 13:09
2023년 6월3일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서 ‘양회동 열사 투쟁 노동시민사회종교문화단체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양회동씨 친형 양회선씨(가운데),

2023년 6월3일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서 ‘양회동 열사 투쟁 노동시민사회종교문화단체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양회동씨 친형 양회선씨(가운데),

한 이야기가 성공했다. 이 성공한 이야기에서 시민단체는 부패했고, 노조는 ‘건폭’이라는 말에서 보듯 ‘폭력배’다. 이 공격의 방향은 명확하다. 위선적이고 사악한 속물로 폭로하는 것이다.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다. 자기 잘못은 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감추거나 남에게 뒤집어씌운다는 점에서 사악하다. 위선적 속물임이 밝혀지면 죽음에 대해서조차 그 어떤 극단적인 조롱과 혐오 표현도 도덕적으로 문제없다.

언제나 ‘선동’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이야기가 성공했다는 말을 살펴보자. 이야기는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이 사이에 방향이 있다. 이야기의 고개는 사실에서 진실로 돌려지는 경향이 있다.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이야기는 ‘재미’가 생명인데 ‘사실’은 재미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재밌기 위해서는 그 사실 사이에 감춰진 진실로 나가야 한다. 진실은 사실처럼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감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진실은 ‘구성’된다고 말하는 쪽까지 있을 정도다. 실제로 구성되는 것은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실은 언제나 진실이라는 이름의 ‘선동’으로 전락할 수 있다. “거짓말도 백번 하면 진실이 된다”는 독일 정치가 요제프 괴벨스의 말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실에 반하는 짓이지만 언제든 선동의 노예로 추락할 수 있다는 점이 이야기가 존재 형식인 진실의 운명이다.

따라서 진실은 자신의 형식이자 운명인 이야기에 저항한다. 진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드러나지만, 이야기는 이야기이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이야기를 짓는 사람은 자기 이야기에 매혹당해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의 효능감에 넘어가는 것을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이야기에 매혹당하는 순간 자기가 이야기하려는 진실을 팔아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짓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윤리 감각’이다.

이 윤리 감각의 핵심은 이야기로 진실을 드러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저항해 진실을 보존하려는 감각과 책임 의식이다. 아마 정치 영역에서 이 시대가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 것이 바로 이 감각과 의식일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지 않고 ‘음모론’이 판쳤다. 지지율이나 정당성에 위험 신고가 오면 버선발로 음모론자들에게 달려갔다. 적의 진실을 폭로하는 데 진실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위험한 이야기 형식인 음모론에 기대는 것 정도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음모론만큼 쉽고 효능감 있는 이야기 형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야기 형식에 엄격해야 함을 완벽히 놓쳤다. 아니 따를 수 없었다. 형식에 엄격한 것은 정치적으로 전혀 효능감이 없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슈는 휘발성이 너무 강했고 즉각적이지 않으면 대중의 정념을 모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형식에 엄격해지는 것이 아니라 ‘팩트 체크’라는 이름으로 사실 수준에서 진실을 판가름하려 했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런데 팩트 체크라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이야기 형식이 아닌가.

양회동 지대장 분신을 민주노총 간부가 방조했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2023년 5월17일치 지면.

양회동 지대장 분신을 민주노총 간부가 방조했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2023년 5월17일치 지면.

위선을 폭로해 적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이야기가 사실의 조각을 모아 진실인 양 행세하는 순간부터 진실은 사라지고 이야기가 진실이 된다. 특히 하나의 이야기가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순간 그렇다.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을 다루는 하나의 이야기가 승리했다는 것은 진실이 승리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이야기가 승리하는 순간 진실은 패배한다. 한 이야기가 성공했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모든 것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로 승리했다는 말이다.

지금 정치적으로 성공한 이야기가 들려주는 모든 것의 진실은 바로 ‘위선’이다. 작게는 정치인이 위선자이지만 보편적으로 모든 존재는 위선자이며 동시대성의 핵심이 위선이라고 말한다. 모든 존재의 본질, 즉 진실이 위선이라는 말은 스스로가 위선자가 아닌 양 행세하는 존재가 가장 가증스러운 존재가 된다. 자신의 진실, 존재의 본질에 반하는 말과 행세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는 가차 없이 발가벗겨져야 한다.

동시대 사람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위선적 속물이다. 정치적 책략은 이 점에 주목한다. 적을 속물로 폭로하는 데 성공한다면 대중의 분노를 모으기는 손쉽다. 성공하기만 하면 어느 쪽이든 35% 정도는 먹고 들어갈 수 있다. 50%를 넘겨야 하는 것이 정치이지만 지지율 위기에서 가장 손쉽게 위기 상황을 무마하거나 돌파하는 방법이 적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기다.

모든 것의 본질이 ‘위선’이라는 이야기가 승리하면 리버럴/진보와 보수 사이의 도덕적 정당성은 완전히 기울어진다. 시장주의에 기초한 보수는 자신이 세계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지키려는 이기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게 인간의 본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가 이익을 추구하다 들통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실에 매우 부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놓고 이야기한다. 자신들은 속물이라고 말이다.

반면 이른바 리버럴/진보는 매우 불리해진다. 보편적 가치와 도덕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위선이 진실인 시대에 이들을 공격하기는 매우 간편해진다.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면 된다. 아니 이들을 위선자로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면 된다. 물론 이번 <조선일보>가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의 죽음에 대해 시도한 것처럼 사실관계가 전혀 없는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지만 이건 하수 중의 하수다. 진실은 이미 거기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사실’만 나열해 이야기를 만들면 된다.

조선의 공격은 실패했으나 ‘건폭’은 진실로?

그런데 이게 정말 이야기를 조작해 선동하는 것만으로 가능할까? 반대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 중단시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양회동 열사의 죽음에 대한 조선일보식 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건설노조의 진실이 ‘건폭’이라는 폭력적 이야기는 거의 상처받지 않고 ‘진실’에 대한 이야기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동시대인에게 왜 위선이 진실이 되고 속물을 폭로하는 이야기가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한 진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됐냐는 점이다.

위선적 속물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치 자기 이익을 희생하며 전체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이다. 이 속물의 가장 역겨운 점은 정작 자신이 진짜 속물이면서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을 ‘속물’로 만들고 경멸한다는 것이다. 위선적 속물로부터 소시민은 자기 삶이 모욕받았다고 느낀다.

리버럴/진보가 언제 보통 사람에게 상처를 줬냐고 반문할 것이다. 줬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옳은 삶’에 강한 지향이 있는 언어를 가진 이들은 ‘좋은 삶’을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을 시대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시대를 외면하고 자기만을 ‘보호’하려는 가망 없는 속물로 여겼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시대의 사명을 저버린 부패하고 타락한 속물로 이들을 경멸했다. 흔한 말로 자기 말을 따르면 ‘민중’이고 그러지 않으면 쾌락과 욕망에만 충실하기에 교화돼야 하는 한심하고 위험한 ‘대중’으로 치부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을 속물로 치부한 이 위선자들의 실체가 폭로되는 것은 자존감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욕을 되돌려줄 통쾌한 복수의 시간이다. 나에게 모욕감을 준 존재가 몰락하는 이야기만큼 상처받은 존재에게 재밌고 환호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 새로운 이야기를 애써 만들 필요도 없다. 몇 가지 ‘사실’만 던져주면 그 사실은 자동으로 이미 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들어가 ‘진실’로 구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환호의 이면에는 더 어두운 동시대의 암흑이 있다. 추락하는 위선적 속물만이 아니라 환호하는 자신까지 포함해 인간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환멸이 그것이다. 이 시대는 사람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성장하기는 불가능하며 그것이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나병철에 따르면 인간이 내적 성숙을 통해 교양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기만이라고 생각할 때 ‘환멸 문학’이 등장한다. 원래 예술이 시민 교양의 속물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하지만 교양 자체가 허구적인 것으로 밝혀지고 불가능해지면 예술의 역할 또한 무력화된다. 남는 것은 ‘환멸’밖에 없다.

위선에 대한 환멸, 속물에 대한 환멸

이런 점에서 동시대의 이야기에서는 두 가지 환멸이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하나는 속물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위선에 대한 환멸이고 다른 하나는 속물에 대한 환멸이다. 전혀 다른 것 같은 이 두 환멸은 동시대 환멸의 두 얼굴이다. 위선에 대한 환멸은 타자에 대한 환멸로서 일체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 전체를 가증스러운 것으로 부정하며 불가능하게 한다. 속물에 대한 환멸은 자신에 대한 환멸로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애초에 시도조차 못하게 부정하며 불가능하게 한다.

불가능. 이것이 환멸에 기댄 동시대 이야기의 진실이다. 위선을 행위의 진실로 폭로하고 속물을 존재의 진실로 혐오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효능감을 극대화한 ‘성공한 이야기’의 진실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자기에게도 환멸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이 ‘성공한 이야기’에는 너, 나, 우리 그리고 모든 것에 환멸을 갖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능한 일이 없다. 모두가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며 이 환멸스러운 서로의 몰락에 환호하는 지옥 말고는. 이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위해 이 이야기에 저항할 것인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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