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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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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매일 다른데 월급은 항상 최저임금

[노회찬재단X노동건강연대]
울릉도·독도행 여객선에서 일하다 해고된 박성모 선장
“대한민국에서 선원은 사람이 아니구나” 2년째 팻말 시위
등록 2022-12-19 17:13 수정 2022-12-21 06:24
박성모 선장이 독도까지 운항을 마친 뒤 사진을 찍었다. 박성모 선장 제공

박성모 선장이 독도까지 운항을 마친 뒤 사진을 찍었다. 박성모 선장 제공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원도 삼척 장호항. 바다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바다가 좋아 배를 타는 항해사가 됐다. 이 이야기는 여객선 선장 박성모(44)의 이야기이다.

2022년 12월5일은 매섭게 추웠다. 박성모는 자신이 선장으로 있던 여객선사의 강원도 원주시 가족회사 앞에서 팻말 시위를 하고 있었다. 팻말을 들고 서 있는 6차선 도로가에 같이 섰다. “여기는 기관장, 저기 방송차는 씨스타3호 선장이에요.” 박 선장이 동료들을 소개한다. 인터뷰 한 시간이 넘어가니 몸이 다 어는 것 같다.

서른 살의 박성모는 뉴질랜드에서 4년의 트롤선 항해사 생활을 마치고 2008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강원도에 자리잡았다. 강릉항, 묵호항에서 출발해 울릉도를 거쳐 독도로 가는 여객선 운항 사업이 막 시작됐다. 배 4대가 날마다 운항하는 큰 사업이었다. 여객선 항해사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은 박성모는 2011년 잠시 떠났던 바다로 돌아가 다시 배에 올랐다. 수도권에서 가까운 강릉에서 울릉도, 독도를 갈 수 있는 여객선은 인기가 많았다. 박성모 항해사는 여객선 일이 좋았다. 운항 초기에는 최저임금으로 시작했지만 자리를 잡으면 임금도 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2등 항해사 박성모는 1등 항해사가 되고 선장이 됐다.

사업은 번창하는데 떠나는 선원들

울릉도, 독도 여객선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나 강원도에서 리조트 사업을 하면서 여객선 운송사업 면허를 취득하고 강원도~울릉도~독도 여객선 사업을 시작한 ‘씨스포빌 주식회사’는 직원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최저임금은 변할 줄 몰랐다. 해마다 계약서를 갱신하는데 월급이 오르지 않자 선원들은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적은 돈을 받아도 회사가 잘되게 일부터 하자고 생각했던 박 선장은 불안해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부터 불안은 구체적인 고민이 됐다. ‘지금처럼 회사가 최소 인원으로 이득을 보다가 큰 사고라도 나면 누가 수습하지? 로봇이 아닌 이상 매일 일하니 병이 생기고 지치는 것 아닌가?’ 급여를 올리고 선원을 더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 선장이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회사는 듣지 않았다. 2017년 케이티엑스(KTX) 강릉선이 개통되고 나서는 여행객이 더 많아졌다. 회사는 돈을 더 벌었을 것이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됐다. 여객선 2대를 쉬고 2대로 운항하면서 회사는 선원은 10%, 관리자는 20% 급여를 깎자고 했다. “온 세계가 그러니 이해했죠.” 여전히 수백억원의 매출이 있고, 선원들 이름으로 코로나19 보조금을 받으면서도 회사는 다시 급여 50% 삭감 통보를 했다. 직원의 반이 배를 떠났다. 14명이 남아 여객선을 운항했다. 박 선장은 다시 한번 불안을 느꼈다. ‘대체할 인원이 없지 않나, 사고라도 나면 수습할 방법이 없다.’ 회사에 이야기했다. “필요 없고, 회사가 어려우니 나갈 사람은 나가라.” 박 선장은 회사에 이야기하던 마음을 접고 돌아보았다. “우리 선원들이 힘이 없어서 회사가 내게 이러는구나.”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2021년 5월의 일이다. 노동조합이 생긴 뒤 정기건강검진을 가야 하는 박 선장에게 회사는 퇴직한 전직 선장을 데려왔다. ‘당신이 하루 휴가를 쓰면 이 사람이 임시선장을 하게 되니, 휴가를 가려면 가라’는 식이었다. 한 달은 집중교육을 받아야 여객선 선장 업무를 할 수 있는데 겨우 사흘 교육받은 이가 임시선장을 한다고 하니 휴가를 가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항의하는 박 선장을 회사는 운항을 쉬고 있는 묵호항으로 전보시켰다. 같이 배를 타던 후배 선원들도 임시선장이 배를 타면 ‘승객을 나르는 배인데 사고가 나면 수습할 수 있느냐’고 불안해했다. 운항을 거부한 후배 선원들도 묵호항으로 전보됐다. 이 사건은 회사가 노동조합을 없애기 위해 이후 벌이는 일의 서막 같은 것이었다.

노조 만들자 선장과 선원을 부당징계

선장과 선원들은 ‘선원노동위원회’에서 부당징계, 부당전보 판정을 받았지만 회사는 이들이 근무기록표를 제출한 것이 기밀유출이라며 해양경찰에 고발하고 해고해버렸다. 박 선장과 선원들은 이때부터 모든 단계의 행정적·법적 절차에 불려다니고 있다. 하는 조치마다 부당하고 위법하다고 판결이 내려졌지만 회사는 버틴다.

박 선장도 알게 된 게 있다. 1962년 만들어진 선원법은 선원을 위한 법이 아니라 선박회사 사업주가 ‘선원을 어떻게 부려먹느냐’를 정한 법이었다. 사업주가 싫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출항 준비부터 운항을 마치고 항구로 돌아와 여객선 정리까지 15시간을 일해도 최저임금만 주면 괜찮다고 선원근로감독관은 말했다. “대한민국에 선원은 사람이 아니구나.” 박 선장과 조합원들은 선원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국 항구로 연안 여객선 선원들을 만나러 다니고 있다.

박 선장이 몰던 ‘씨스타11호’는 울릉도, 독도까지 가는 여객선 중 승객을 가장 많이 배려하는 배였다고 박 선장은 말한다. 아침 8시 강릉항을 출발하는 여객선, 아침 6시부터 선원들은 안전 점검을 하고, 선장은 배의 전반적 상태와 기상 상황, 선원들의 컨디션을 체크한다. “울릉도, 독도는 마음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기상이 허락돼야 올 수 있어요.” 지금도 배에 있는 것처럼 박 선장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배는 울릉도까지 3시간30분, 다시 독도까지 3시간30분을 간다. 회사는 한 끼 밥값만을 보조해주기에 선원들은 배에 전기밥솥을 놓고 밥을 해먹었다. 독도는 부두시설이 좋지 않아 날씨가 안 좋으면 접안하기 어렵다. 접안이 어려워 독도에 내리지 못할 때 승객들은 세상 다 잃은 얼굴이 된다. 미안한 마음에 박 선장은 독도를 선회한다. 개인 휴식도 미루면서 더 천천히 독도를 돈다.

“싸워야지, 잘못된 거니까”

바다는 박 선장의 집이었다. 아버지는 어선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지금도 해녀 일을 한다. 형님은 대게 배를 탄다. “떠날 수 없죠. 배를 탔던 사람들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매일 보는 바다가 그렇게 좋을까.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파도는 매일 다르잖아요.”

바다를 사랑한 아이가 선장이 된 이야기는, 선장은 노동조합 지부장이 되어 거리에서 2년째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는 이야기로 끝맺게 될까. 가족들은 박 선장에게 말한다. “바다는 노력한 만큼 보답을 준다. 싸워야지. 잘못된 거니까.“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내곁에 산재: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일터에서 다치고 아픈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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