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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막손 산재 상담부장, 산재로 숨지다…그 이름 남현섭

[노회찬재단×노동건강연대] 달력에 새겨지지 않은 기념일, 4월28일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등록 2023-04-21 15:24 수정 2023-05-18 16:13
전봇대 개폐기 조작 작업을 하다 감전사한 한국전력 협력업체 노동자 김다운씨 유가족 및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2023년 1월10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은 기자회견장 들머리에 마련된 추모공간. 한겨레 김혜윤 기자

전봇대 개폐기 조작 작업을 하다 감전사한 한국전력 협력업체 노동자 김다운씨 유가족 및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2023년 1월10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은 기자회견장 들머리에 마련된 추모공간. 한겨레 김혜윤 기자

달력에 새겨지지 않은 기념일이 있다. 4월28일,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International Workers’ Memorial Day). 전세계 각국에는 노동조합의 연맹조직이 있고, 이 연맹들이 모인 국제조직이 있다(유엔처럼). 1996년 4월28일, 이 노동조합 조직의 국제회의장에서 전세계 노동조합 대표들은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을 밝혔다. 그 전에도 미국·캐나다 같은 국가는 노동자를 추모해왔지만, 1996년 이후 더 많은 나라에서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해마다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성명을 냈다. 2023년에도 미국 노동부는 각 주에서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안내하고 있다. (www.osha.gov/workers-memorial/workers-memorial-day-events)

일어난 사실로 쓰는 추도사

죽어간 노동자를 생각하며 추모의 말을 찾으려 한다. 2023년 3월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이렇게 죽어갔다. 3월3일 서해안의 신도시에서 수도관 배수관로를 설치하던 노동자가 굴착기 앞바퀴에 깔려 사망했다. 노동자의 고향은 우즈베키스탄이었다. 같은 날 또 다른 공업도시, 자동차에 사용하는 특수강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고온의 석탄 슬래그(찌꺼기)가 두 노동자를 덮쳤다. 두 노동자는 전신화상을 입었다. 한 노동자가 사흘 만에 사망했다. 다른 노동자는 엿새 만에 사망했다. 특수강 시장점유율 1위라는 이 기업의 본사, 서울의 푸른 유리 빌딩 앞을 나는 자주 지난다. 6일, 아파트를 짓는 현장에서 환풍기를 달던 노동자가 15층 높이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이 아파트는 ‘21세기 주거문화를 리드하는 최고급 주거문화’를 지향한다고 광고된다. 불이 난 곳에서 구조 활동을 하던 소방관이 같은 날 사망했다.

영국 노동조합(Unite the Union)의 2023년 ‘4·28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포스터’

영국 노동조합(Unite the Union)의 2023년 ‘4·28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포스터’

서울의 대형 빌딩에서 보안 업무를 하던 노동자가 나흘 연속 당직 근무를 하던 2023년 3월8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병원에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9일, 퀵서비스 배달을 하던 노동자의 오토바이가 버스를 추월하려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노동자는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10일 새벽 2시20분, 25톤 트레일러와 25톤 화물차가 고속도로에서 부딪쳤다. 트레일러를 운전하던 노동자가 사망했다. 15일, 신도시 아파트를 짓던 노동자가 13m 길이의 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이 아파트의 브랜드 이름은 ‘삶 그 이상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소개된다.

16일, 반도체부품 생산 공장을 짓다가 옹벽이 무너졌다. 옹벽에 깔린 노동자 세 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금속 가공 공장에서 노동자가 세척기를 수리하다가 작동되는 기계에 끼여 사망했다. 경기도 한 공장에서 512㎏의 기계 덮개를 크레인으로 옮기다가 덮개가 떨어졌다. 노동자가 깔려 사망했다. 20일이었다. 22일, 직진하던 배달 오토바이와 좌회전하던 승용차가 부딪쳐 오토바이 배달노동자가 사망했다. 23일 서울의 오피스텔 지하 6층에서 건물관리 노동자가 엘리베이터 기계장치에 끼여 사망했다. 노동자는 손님이 떨어뜨린 물건을 찾던 중이었다고 경찰은 추정한다.

산재 대기업들의 ESG 등급은 한결같이 A등급 이상

그날, 남해안의 조선소, 고소작업차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23m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26일, 경기도의 한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엘리베이터실의 철근을 자르던 노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사망했다. 노동자가 짓던 오피스텔은 분양가에 ‘프리미엄’이 붙을 만큼 인기 있는 브랜드였다. 서울의 ‘핫플레이스’에 들어서는 쇼핑몰 공사현장, 지하 1층에서 배관을 설치하던 노동자가 지하 5층으로 떨어져 사망했다. 27일이었다. 3월에 일어난 죽음 가운데 몇몇 노동자의 죽음만을 열어 나누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을 추도사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두 개의 언어로 된 두 개의 세상을 산다. 차도 사람도 들어가기 어려운 높고 깊은 골짜기에서 금속을 제련하는 거대 공장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산과 물과 사람을 향해 제약 없이 중금속을 배출해온 재벌기업으로 오명이 높았다. 이 기업은 수십 년 악행의 끝에서 ESG(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경영의 유행에 올라탔다. 거대 공장 안에서 노동자의 직업병과 사고와 사망이 줄지 않아도 큰 걱정거리는 아닌 것이,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는 대기업들의 ESG 등급은 한결같이 A등급 이상이다. ‘기업 홈페이지 새단장’ ‘무난한 실적’ ‘성장동력 확보’가 노동자 사망 기사와 함께 실릴 수 있다. 노동자 사망이 연이어 일어나 여느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대국민 사과를 할 때, 그 기업이 처한 대내외 경제적 도전과 주가 하락을 우려하는 방송 리포트도 준비되리라. 죽음을 곁에 두고 무심히 뉴스가 흘러간다. 노동자의 죽음은 세탁되고 표백된다. 노동자의 죽음은 기업의 언어, 경제의 문법과 분리됐다. 죽음의 배후를 말하지 않는 추모, 노동자 사망의 사회적 구조에 눈감는 추모를 해온 것은 아닌가. 그래서 죽음이 멈추지 않는 게 아닐까.

조막손 산재상담 부장님의 산재사망

그리고 오래전 3월에 떠난 한 죽음을 기억하려 한다. 20대 초반 공장의 프레스에 오른손이 눌렸다. 손가락 넷을 잃은 손이 주먹이 됐다. 입원한 병원에서 산재보상 상담을 배웠다. 산재상담이 직업이 되어 서울 구로에서 인천 공단 지역에서 노동자 상담을 했다. 공단 지역의 병원마다 빈자리 없이 다친 노동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는 이름보다 상담부장으로 더 많이 불렸다. 상담부장으로 15년, 부장님이었지만 돈은 못 벌었다. 생계를 위해 다시 들어간 공장. 폐기물처리 공장의 스티로폼 파쇄기에 상반신이 압착돼 사망했다. 2016년 3월29일이었다. 그의 이름은 남현섭이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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