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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으러 막 뛰어오는 게 좋아요

급식실 하영숙 조리사… 작은 키로 평균 높이 싱크대에서 일하기 26년, 밥 주는 일 하니 웃는 일 많아
등록 2022-08-15 17:26 수정 2022-08-16 01:47
하영숙 조리사는 마흔 넘은 나이에 일을 시작해 26년간 조리사로 살았다. 2016년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당시로는 드물게 정년퇴임을 했고, 지금은 서울의 한 시민단체에서 일한다.

하영숙 조리사는 마흔 넘은 나이에 일을 시작해 26년간 조리사로 살았다. 2016년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당시로는 드물게 정년퇴임을 했고, 지금은 서울의 한 시민단체에서 일한다.

하영숙(66). 사진작가의 요청에 맞춰 살짝 웃는 모습이 꽤 자연스럽다. 보통 카메라 앞에선 어색하기 마련인데. “애들 상대로 일해서 그런가봐요.” 그러면서 동그란 눈매를 구부려 웃는다.

“이 일을 20년쯤 하니까, 주변에서 얼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애들이 예쁘기도 하고. 또 애들 앞에선 웃게 되잖아요. 급식실에 있을 땐 애들이 밥 먹겠다고 막 뛰어와요.”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20년간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사로 일하다 정년퇴임을 했다. 이것도 6년 전 이야기. 지금은 시민단체 사무실(여성노조 등이 자리한, 공간 ‘여성과 일’)에서 점심을 담당하고 있다.

음식을 준비하는 그의 몸짓에 머뭇거림이 없다.

음식을 준비하는 그의 몸짓에 머뭇거림이 없다.

색깔도 맞추고 간도 맞추고

“싱크대가 저한테 높아요.”

굽 높은 슬리퍼를 신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사이를 누비던 하영숙씨는 자신의 키가 다소 아쉽다는 듯 말한다. 싱크대 한편에 말갛게 씻긴 양파와 당근이 소쿠리에 담겼고, 가스 불 위에는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제일 먼저 쌀부터 씻어요. 쌀을 씻어 불린 다음에 채수를 우려요. 이제 다듬어야 할 재료를 구분해야 하는데 삶아서 물기를 빼야 하는 것 먼저, 볶아야 하는 재료는 나중에. 오늘 반찬은 오징어볶음에 콩나물무침이랑 꽈리고추찜이거든요. 오징어볶음이랑 콩나물무침은 같이 비벼 먹기 좋은데, 둘만 있으면 식탁에 초록색이 부족하니 꽈리고추가 들어가면 좋죠. 반찬은 색깔도 맞추고 간도 맞춰야 해요.”

여기에 오이냉국을 곁들인다. 날이 더우니까.

“우선 해야 하는 게 오징어 손질이에요. 그다음에는 볶음에 들어갈 채소를 썰고, 끝나면 준비한 오징어를 데치고 식히는 사이 콩나물을 씻어서 삶고, 그 사이에 꽈리고추를 다듬어요. 다 삶은 콩나물은 소금간을 먼저 하고 식혀요. 꽈리고추는 삶아 바로 양념해서 제일 먼저 완성할 거예요. 오징어는 마지막에 볶아줄 거고. 물이 덜 생기는 음식부터 먼저 끝내는 거죠. 이게 말로 하려니 어렵네요.”

조리실에 들어서면 일의 순서가 한눈에 그려진다. 하지만 조리는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시작되는 게 아니다. 그의 달력에 식단표가 빼곡하다. 요즘같이 땀이 주룩 흐르는 날에도 시장에 가면 눈이 반짝인다고 했다. “제철에 나오는 식자재가 얼마나 신선하고 좋아요.” 장을 보며 다음날 준비할 반찬을 그려본다. “점심을 이렇게 해줘야지 생각이 들면 에너지가 생기고 즐거운 거예요.” 예산을 짜고 그 한도 내에서 영양, 식감, 계절, 사람들 입맛까지 크고 작은 경우의 수를 고려해 식단을 정한다. 아무리 봐도 기획 관리 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 말을 하자 영숙씨는 손사래를 친다. 하다보면 다 된단다. 하다보면 실력이 늘지 않는 일이 어디 있다고, 우리는 유독 살림에 평이 박하다.

고등학교 시절 영숙씨. 부산으로 유학까지 가서 배운 주산과 부기 실력은 소용없어졌지만 추억은 여전히 남았다.

고등학교 시절 영숙씨. 부산으로 유학까지 가서 배운 주산과 부기 실력은 소용없어졌지만 추억은 여전히 남았다.

다시 일하려니 주산·부기 시대는 가고

“고향이 경남 창녕인데, 할머니가 깨어 있는 분이에요. 그 시절에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저 국민학교 졸업하고 시골에서 부산으로 유학을 갔죠. 오빠랑 언니도 먼저 가 있었고. 그때는 할머니가 먼 데를 보내니까, 할머니 밉다고 막 울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가 참 고맙지.”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우리가 주산, 부기 세대잖아요.” 회계를 배워 사무직 경리로 취업하는 것이 여자 직업으로 선호되던 시절이었다. 영숙씨도 서울의 한 직장에서 9년을 일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때는 학교 선생님들 아니면 결혼하고 직장을 계속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자녀들이 어느 정도 크면 다시 일할 생각이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급식을 시작했다. 1996년이었다. 아이들 도시락을 쌀 필요가 없게 되자, 영숙씨는 직장을 구하러 나갔다.

“주산도 잘하고, 암산도 되고, 텔렉스(전화망을 이용해 텍스트를 교환하는 장치)도 배우고. 나는 내가 일을 참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을 구하려니 그동안 배웠던 게 소용없는 거예요. 다 디지털로 바뀌고.”

10여 년 공백 앞에 자신은 “밥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때 동네 인근에 세워진 임대주택 단지에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그곳 급식실에서 조리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때는 급식실 일이 험하다고 다들 가지 말라고 했어요. 지금보다 급여도 대우도 낮았거든. 그래도 우리 애들 학교 노는 날 내 직장도 놀고, 애들 학교 끝나는 시간이랑 퇴근하는 시간이 같고. 딱 좋지 않냐고 하며 들어갔어요.”

오늘의 메뉴는 오징어볶음. 대파, 양파 등 채소를 다듬고 자르는 솜씨가 지나온 세월만큼 능숙하다.

오늘의 메뉴는 오징어볶음. 대파, 양파 등 채소를 다듬고 자르는 솜씨가 지나온 세월만큼 능숙하다.

각자의 살림 방식을 앞세우며

힘들었다. 학생이 2천 명에 달했다.

“처음에는 큰 고무다라이에 쌀을 가득 부어서 다라이 세 개를 씻었어요. 40㎏. 이렇게 120㎏ 쌀을 매일 씻었나봐요. 밥만 한 40판(대형밥솥인 취반기의 한 칸을 ‘1판’이라고 함)을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정작 힘든 건 사람과의 관계. “내가 마흔 갓 넘어 급식실에 들어갔어요. 다들 그 나이 또래였어요.” 급식실 근무자가 8명인데, 많이들 싸웠다. 각자 살림해온 방식을 앞세워 ‘네가 옳으냐, 내가 옳다’로 소란스러웠다. 20년 가까이 ‘자기 살림’을 한 사람들이다. 쌀 씻는 법조차 서로 방식이 달랐다.

급식실 영양사까지 등장하면 살림 경력과 직무 위계가 부딪친다. 이론과 실전의 싸움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은 쌀을 70g을 먹는대요. 지금도 그 숫자를 외워요.” 대학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서 영양사로 첫 부임지에 올 경우 20대 중반. 정해진 매뉴얼대로 오이 3㎝, 소금 200g 계산해 레시피를 짠다.

“채소 중에 짠기를 더 잘 흡수하는 애들이 있어요. 같은 채소라도 철에 따라 흡수 정도가 달라요. 시금치하고 콩나물이 그래요. 똑같이 소금간을 해도 싱거워요. 간이 적당한지는 눈대중으로 아는 거예요. 애가 풀이 죽었네. 소금이 더 필요하겠네. 그래서 시금치가 반찬으로 나오는 날은 영양사와 조리사들이 싸워요.”

그래도 영양사의 말을 따를 때가 많았다. 관련 분야를 더 많이 공부했다는 생각에 한 수 접었다. 1천여 명의 식단에 대한 책임감을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저 사람은 저 분야의 전문가니까요.”

오늘의 메뉴는 오징어볶음. 대파, 양파 등 채소를 다듬고 자르는 솜씨가 지나온 세월만큼 능숙하다.

오늘의 메뉴는 오징어볶음. 대파, 양파 등 채소를 다듬고 자르는 솜씨가 지나온 세월만큼 능숙하다.

조리사로서 유일하게 정년퇴임

부대끼는 시간을 거쳐 급식실 사람들과도 합이 맞아갔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한 해 지나면 학생이 100명씩 줄어 있는 거예요.” 그때마다 조리사가 한 명씩 잘렸다.

“3년이 지나니까 1년에 한 명씩 자르는 거야. 내가 그 한 명에 드나 안 드나, 피가 마르는 거야. 처음에는 일괄적으로 사표를 다 받았어요. 학교에서 사직서를 가지고 있다가 연말에 한 명을 고른다고. 내가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아.”

그는 못 쓴다고 버텼다. 그다음 해에는 제비뽑기를 시키더란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해.” 이번에도 안 한다고 했다. 결국 교장 눈 밖에 났다. 다음해 퇴사할 사람으로 영숙씨가 지목됐다. 가장 연차가 높다는 이유였다. 받아야 할 퇴직금이 제일 많으니 나가라고 했다.

“나보고 나가면 다른 데 채용해줄 테니까 저기 하래. 그걸 어떻게 믿냐, 안 된다. 정 그러면 학교장 도장 찍어 약속해달라 했더니 그건 못한대. 그럼 나도 못 나간다.”

8명이던 조리사가 어느새 4명으로 줄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도 남지 않겠구나 싶었다. 수소문해 노조를 찾아갔다. 그렇게 2002년 전국여성노동조합(여성노조)에 가입한다. “파업도 하고, 별거 다 했어요.” 혼자 하면 외로웠을 텐데 급식실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다. 학교는 고발 조치하겠다고 엄포를 놓더니만 결국 교장 면담 자리를 마련했다.

“여자 교장선생님이었어요. 왜 파업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교장선생님은 전문직이고 나는 나대로 여기서 전문직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각자 전문 분야의 일에 충실한 거니, 탓하지 말고 내가 파업하는 걸 이해해달라고 그랬어요.”

10년도 더 된 일이다. 하영숙씨가 급식실에서 스무 해를 머무는 동안, 5명의 교장이 정년퇴임했다.

“그 학교에서 정년퇴임한 조리사는 내가 처음이었어요.” 교장과 교직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정년퇴임을 한 것이 그에겐 자부심으로 남았다.

눈만 내놓은 위생복 속에서

한편 아쉽다. 지금은 재미있던 일만 떠올리지만 ‘밥해주는 사람’이 겪는 수모는 적지 않았다. “내 직종이 지금 어쩔 수 없이 무시당하지만 이 옷 벗으면 사람 다 똑같다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했다. 버티기만 했나. 정부청사 앞에 가서 천막도 치고 꽹과리도 쳤다. “노조 생기고 우리 처우 개선하라고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이제 좋아질 만하니까 그만둬야 할 나이가 됐잖아요.”

퇴직 뒤에는 고교 운동부 선수들 급식을 맡기도, 유치원에서 원생들 점심 식사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리사로 일한 지 3년째다.

“지난해까진 괜찮았는데. 이제 나이 먹는지 살살 힘들어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아쉽다. 급식실에서 일할 때는 20㎏짜리 쌀 포대도 번쩍 들었다. “배에 힘 딱 주고 들어야지, 아니면 허리 나가요. 여긴 무거운 것 드는 일이 없어 좋죠.” 30년 가까이 조리사로 살아온 인생이 그의 몸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물었더니,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살이 쪘어요.”

작고 말랐던 영숙씨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급식실 조리사로 살면서 둥글둥글하게 변했다.

점심시간이면 동료들은 큰 대접에 국을 퍼서 밥 말아 먹고 후딱 일어섰다. “5분도 안 걸려요.” 아무리 휴게시간이라 해도 눈앞에 해야 할 일이 보이니 다들 마음이 급했다. 영숙씨는 꿋꿋하게 식판에 밥을 놓고 먹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붙는 살은 어쩔 수 없었다. 힘 쓰는 일이 많으니 음식을 더 챙겨 먹게 되더란다. “배가 볼록해야 힘이 딱 생겨서 무거운 것도 번쩍 들거든요.”

대신 피부가 보드라워졌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땐 주름도 없었어요.” 물 닿는 일을 하니 손이 상할 것 같지만, 늘 고무장갑과 위생복을 착용했다. 여기에 위생모와 마스크까지. 밖으로 보이는 것은 눈밖에 없었다. 옷 안은 땀으로 축축했다. 매번 사우나 효과를 보니 피부가 좋지 않겠냐는 농 섞인 말이었다.

고와진 피부에 화상을 입을 위험이 있긴 하다. 조리실 하면 불을 떠올리지만, 화기만이 피부를 그을리는 것이 아니다. “채수 구멍에 밥알 하나 없이 싹싹 긁어 청소해요.” 식중독에 취약한 어린이들이 모인 곳이라 위생에 철저했다. “손톱도 바짝 잘라야 해요. 위생 검사를 하거든요. 지금도 귀고리, 목걸이 안 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문제는 그 청결을 담당하는 사람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

“나 일할 때는 청소약품이 독했어요. 고무장갑 끼고 토시까지 끼는데, 그 사이로 피부가 살짝 드러나는 곳이 있잖아요. 그리로 약물이 흘러들어서 화상을 입는 거예요.”

요즘 고민은 채식 식단

화상, 골절, 난청, 위장병, 폐암. 급식실 노동자가 겪는 질환이다. 이 모든 것을 다행히 피해갔다. “운이 좋았다.” 영숙씨는 말한다. 통증을 잘 고치는 침 선생을 만나서, 소화기관이 튼튼해서, 운동을 좋아해서. 이 모든 행운 덕에 30년 가까이 조리사로 살아갈 수 있었다. 더 있다. 강단과 자존심, 그리고 배우려는 열정.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싸우면서 배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림해온 동료들에게 노하우를 배우고, 공부 많이 한 영양사에게 조리의 순서와 체계를 배웠단다. 정년 뒤 그가 찾아간 곳도 중식·양식 조리사 자격증 학원이다. “우리 손주 어린이집 메뉴판도 맨날 봐요.” 식단 고민을 하는 것이다. 배우는 일에 끝이 없다. 일주일에 한두 번만 같은 반찬을 내놓아도 맨날 같은 것을 먹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반복되는 일이기에 더 변주가 필요하다.

요즘 고민은? 지금 일하는 곳에 채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육수나 고기 재료를 많이 쓰는 기존 밥상에서 탈피해 어떻게 사람들 입맛에 맞는 채식 식단을 만들 것인가. 자신이 하는 일을 막힘없이 어려움 없이 해나가는 이가 베테랑이라던 그에게 새로이 주어진 미션이다. 역시 배움은 끝이 없다.

“그래도 인터뷰를 하니, 내가 잘 살았구나 싶네요. 한 가지 일만 파기를 참 잘했다. 방송 같은 데서 셰프가 나오고 맛집 사장이 나오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도, 나를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 이렇게 산 게 참 고맙네요.”

글 희정 기록노동자·<두 번째 글쓰기> 저자, 사진 최형락

*베테랑의 몸: 기록노동자인 희정이 자신의 분야에서 숙련공(베테랑)으로 일해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몸과 숙련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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