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경력 있는 기술자를 인터뷰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을 때, 내가 떠올린 직업은 세공사였다. 금을 다루는 사람. 구석진 자리에 등지고 앉아 동전만 한 금덩어리를 두들기고 톱질하고 광내고. 윤기를 더한 금은 반짝이는데 그가 일하는 작업장은 낡고 어둡다. 이 명암 대비가 세공사를 더욱 ‘장인’처럼 보이게 했다. 내 머릿속 주얼리 작업장 풍경이다.
이것이 나의 환상임을 안다. 우리는 타인의 직업에 환상을 품거나 편견을 가지거나, 그도 아니라면 무지하거나 무심하니까. 그래서 그의 일터로 간다. 평생 ‘일’을 다뤄온 사람과 마주 앉아 그의 손끝에, 어깨에, 발뒤꿈치에, 입가에 노동이 남긴 흔적을 본다. 관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흔적을 따라잡다보면 노동이 삶에 새긴 흔적, 어떤 저력과 만나게 되는데 그제야 비로소 누군가의 일에 환상과 편견을 가지는 일이 멈춘다. 주얼리 세공사를 만나고 싶었다.
김세모(50)씨. 1991년, 열아홉 살의 나이로 주얼리 작업장에 왔다. 당시에는 기술자라 하면 “주물 굽는 것부터 해서 뻥튀기(세척)하고 광내고 시야기(마무리)하는 것까지” 세공의 시작과 끝을 두루 다룰 줄 알아야 했다. 세모씨는 장인의 손을 수백 번 타야 작은 귀금속 하나가 나오는 과정을 보며 일을 배웠다.
7년쯤 지났을 때 주얼리 제작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 공정이 나뉘고 저마다 전문 분야가 생기기 시작했다. 분야별 기술자를 지칭하는 말은 ‘기사’였다. 세모씨도 어느덧 ‘광 기사’가 됐다. “사람들이 귀금속을 찾는 이유가 광택이잖아요.” 여기 말로는 ‘광을 친다’고 하는데, 세공 마지막 단계다. 이때부터 일터에서 이름이 아닌 ‘기사님’으로 불렸다.
“금이 처음부터 반짝거리진 않거든요. 맨 처음에는 시커메요. 그게 점점 색을 찾다가 어느 순간 빛나는 정도가 있어요. 그럼 됐다, 하는 거죠.”
광택이 완성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알아보냐고 묻자 그는 말한다.
“보면 알죠.”
그러면 광 기술의 차이는 어떻게 구분하냐고 물으니, 이번에도 보면 안다고 한다.
“사람마다 내는 광이 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잖아요. 사람이 손으로 다루기 때문에, 각자 체형도 자세도 다르고, 배워온 방식도 다르고. 똑같이 하기 힘들죠. 아, 이건 물건을 딱 보면 아는데.”
지금 당장 나를 주얼리 상점에 데려간다 해도 반들거리는 제품들 사이에서 어떤 차이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객 처지에선 다 같은 반지고 귀고리지만 작업자에게는 마치 제품에 이름표가 붙은 듯 저마다의 기술과 숙련도가 보인단다.
“파지(불량)가 나왔다고 가져오면, 저희끼리는 그거 누가 만든 건지 알아요. 기술자들은 보면 알아요. 미세하게 조금씩 차이가 있으니까.”
광택의 정도가 다르고, 곡선의 매끄러움이, 표면의 균일함이, 고리의 휘어짐이 다르다. 그것이 기술이라 했다.
인터뷰하기 전, <극한 직업>(EBS)을 포함해 세공 작업이 담긴 영상 몇 편을 봤다. 광내는 데 중요하다는 랩 기술이 나온다. 휠(랩장)이라 부르는 둥근 기계가 굉음을 내며 돌아간다. 빠르게 회전하는 휠 기계 날에 금속 조각을 가져다 대며, 영상 속 작업자는 말한다. “여기는 밀듯이 해주시고요. 이 부분은 가져다 댄다는 느낌으로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만 이 말은 이해가 간다. “힘 조절에 주의해야 합니다.” 힘 조절을 잘못했다가는 휠 날에 금속 대신 사람 손가락을 갈게 생겼다. 영상에선 반복 숙달을 강조했는데, 세모씨도 같은 소리를 한다.
“자꾸 보고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휴대전화가 있고 카메라가 있지만 30년 전, 그가 일을 배울 때는 보고 또 보고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차근차근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일은 많고 사람은 적었다. 신입에게 일을 가르쳐준 시간만큼 자기 물량이 밀리게 마련이다. 열아홉 살 세모씨는 한동안 작업장에 서서 지켜만 봤다. 그렇게 곁눈질로 일을 익혔다.
“손재주라는 게 있더라고요.”
같이 들어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랑 자신이 만들어내는 게 다르더란다. 자신은 아무래도 재주를 타고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저걸 하려면,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겠구나.” 그는 늦게까지 남아 값싼 금속으로 연습했다.
“우리는 경력이 기술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 기술은 내가 만드는 거거든요.”
기술만 있다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어 보였다. 일 많고 사람 거친 것을 못 견딘 친구는 한 달 만에 떠났는데, 그는 이곳에 30년을 남았다.
30여 년 세월 동안 주얼리 업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망치로 금을 때려 평평하게 펴고 열을 가해 모양을 잡던 것은 옛일이 됐다. 더 빠르고 강한 모터를 가진 기계가 들어왔다.
“기계 힘이 약하면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게 되거든요. 손목 이런 데가 다 휘어지죠.”
옛날이 아득하면서도 무탈하게 지나온 세월이 새삼스럽다. “예전에는 가림막도 후앙(환기)시설도 없어서 광을 내면 금 먼지가 얼굴에 다 붙었어요.” 금만 붙으면 다행인데, 코를 풀면 검은 분진이 섞여 나오고 손톱에는 이물이 잔뜩 끼었다.
“엔간해선 손톱 검은 게 안 지워져요. 양말을 스무 번은 비벼 빨아야 해.”
기계 성능이 좋아졌다고 일이 편해진 것만은 아니다. 기계로 인해 다양한 귀금속 디자인이 가능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디자인이 점점 화려해지는 거예요.” 그에 따라 세밀한 세공 기술이 요구됐다. 이때부터 기술 가진 숙련공 대우가 달라졌다. 반면 기계화에 따라 저숙련자를 찾는 수요는 크게 줄었다. 기술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이 들어가는 동안, 젊은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임금은 낮고 주말·휴일도 따로 없고 고용보험조차 가입이 안 되는 일터. ‘요즘 직장’과는 다른 분위기를 신입들은 견디지 못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기술 가진 사람이 젊은 사람 두세 명이 할 일을 너끈히 해냈다. 그만큼 대우받았다. 다만 밤 10시가 넘어도, 자정이 지나도 퇴근할 수 없었다. 세모씨도 이전 직장에서 광파트(광실)를 혼자 맡았다.
“하루 14시간, 15시간, 쉬는 시간도 없이 그렇게 일하다보니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몇 개월 쉬겠다고 했죠. 아예 그만둔다고 하면 사장이 안 놓아줄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숙련을 얻은 시간 동안 그의 몸이 감당해온 것을 물어볼 참이었다.
“망가졌죠. 저는 뜀박질도 못해요.”
집중을 놓치면 휠 날에 금속이 튕긴다. 다칠 위험은 둘째이고, 마지막 단계인 광 작업에서 불량이 나면 앞선 노동이 아무 소용 없어진다. 주물, 줄질, 땜질… 작은 반지 하나가 광실에 오기까지 무수한 손을 거친다. 이 생각을 하면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저희는 손 떨면 안 되거든요.” 휠의 회전력을 오롯이 손가락 서너 개로 버텨낸다. 손가락은 감각이 없어지고 손목은 휘고 어깨가 말린다. 허리 골병도 따라온다. “척추뼈 4번, 5번을 누르고 있다는데. 근데 이 정도는 여기선 다 가지고 있는 거라.” 일주일에 한 번씩 디스크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이 정도’는 ‘여기’에선 흔한 일이란다.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다행이라고 하니 그가 웃는다.
“크게 다치면 베테랑이 아니겠죠.”
그렇다면 서서히 병드는 몸이 베테랑인가.
‘공임이 세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지만, 실제 일한 시간을 따져보면 그리 많은 월급이 아니었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적도 없으니, 반평생 넘게 일하고도 월급쟁이라는 증거가 없다. “평생 일했는데도 직장인 대출 한번 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 출퇴근 시간만 길어진다. 많은 세공사가 서울 외곽에서 종로까지 두세 시간을 오간다. 서울의 높은 집값을 대출 없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고용보험마저 가입할 수 없을까. “여기가 좁아요.” 귀금속세공학과나 직업학교가 생기가 전에는, 지인이 없으면 ‘이 바닥’에 들어오는 일도 쉽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수십 년 기술을 쥐고 버틴 사람도 많았다.
“내가 오늘 일을 그만두면, 바로 그날 저녁에 ‘너 일 안 구하냐’고 연락이 오는 거예요. 그만큼 좁아요.”
이런 소문만 빠를 리 없다. 누가 고용보험을 가입해달라 하더라, 누가 야근수당을 요구하더라. 사장들 사이에 소문이 돌면 취업이 어려워진다. 기술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받아주는 업체’가 줄어든다는 건 단순한 고용불안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기술과 쓸모가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니 불만이 있어도 입을 다문다. 아니 말없이 일터를 옮긴다. 기술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으며.
그렇게 기능공이라는 자부심이 잃어버린 권리의 자리를 채웠다. 세모씨는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직장을 옮겼다. 종로를 떠난 것이다.
새로 옮긴 직장은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고용보험에 가입하고, 시간외수당을 계산하는 ‘회사 같은 회사’였다. 주얼리 업계에서 흔하지 않은 노동환경이다. 규모가 있는 업체로 더 많은 기술력을 요했다.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더라고요.”
백화점에 입점하는 제품을 만든다. 여기도 일을 가르쳐주진 않았다. 모두가 숙련된 기능공이라는 믿음, 아니 그런 사람만 쓴다는 방침. “제품 주고 ‘이 모양으로 나와야 해요’ 그러죠. 그러면 요령껏 해야 돼요.” 한동안 적응하느라 고생했다. 늘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기능공의 세계가 듣는 나는 무섭기만 한데,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열심히 하면 되니까요. 열심히 하는 걸 못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30년 전처럼 이번에도 보고 또 봤다. 제품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것을 반복한다. 반복 숙달. 한층 기술을 갈고닦은 세모씨는 요즘 동료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한다.
“기술은 종이 한 장 차이더라. ‘내 기술이 최고야’ 하던 시간이 나도 있었는데, 그것도 이 좁은 바닥에서의 이야기였고. ‘내 기술, 내 기술’ 할 시간에 ‘우리’가 일하는 곳을 한번 보라고. 그 시간에 후배들 어떻게 일하는지 보라고 하죠.”
기술을 연마하라는 말이 아니라 동료를 챙기라는 이야기를 한다.
“오래 일한 사람에겐 여기가 불편할 것이 없어요. 기술이 있으면 아무도 건들지 않으니까요.” 자신도 주얼리 작업장 한쪽에 자리를 틀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렇게 홀로 작업했다. 긴장된 동시에 지루하고 이따금 뿌듯했다. 그러다 돌아보니, 이곳이 젊은 사람은 오지 않는 일터가 됐더라. 어느 날 갑자기 그리된 것이 아니다. 30년 동안 바뀌지 않고,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기술’에 파묻혀 공임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후배를 지나치고, 법정 공휴일에도 쉬지 않는 일터를 ‘나 때는 말이야’로 넘겼다. 그는 세공이 혼자 하는 작업 같아 보여도 꽤 긴밀한 협업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내가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동료들과 협업하지 않으면 제품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 혼자 기술 욕심을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노동조건도 한 사람의 기술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혼자인 ‘베테랑’은 없다.
“내가 기술적으로 명품과 비교될 만한 정도의 퀄리티(품질)를 맞추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일한다는 마음으로 일해야지. 저는 그게 베테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희정 기록노동자·<두 번째 글쓰기> 저자, 사진 최형락
*베테랑의 몸: 기록노동자인 희정이 자신의 분야에서 숙련공(베테랑)으로 일해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몸과 숙련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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