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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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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싹찰싹 소리 나도록 때려서 깨끗하게

20년 경력 세신사 조윤주씨… 굴곡 따라 시원한 곳과 아픈 곳을 골라 미는 세신의 기술
등록 2023-03-14 04:43 수정 2023-04-04 08:16
때수건을 손에 끼고 밝은 얼굴을 한 조윤주씨. 그는 세신사 일이 사람들의 건강을 돕는 일이라고 여긴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때수건을 손에 끼고 밝은 얼굴을 한 조윤주씨. 그는 세신사 일이 사람들의 건강을 돕는 일이라고 여긴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목욕관리사 학원이 있는지 몰랐다. 일명 때밀이 학원. 이곳을 나오면 세신사가 된다. 세신사, 다들 벗고 있는 목욕탕에서 혼자 위아래 속옷을 입은 사람. 속옷은 언제나 빨강이거나 검정 망사다.

유니폼이 빨강이나 검정 망사인 이유

“눈에 잘 띄어야 손님이 다가오기 쉬워요. 망사는 천보다 잘 마르니까.”

세신사들의 유니폼이다. 이들을 찾는 사람은 많다. 목욕탕 구석 벽에 번호표가 줄지어 걸려 있다. 사물함 열쇠로, 붉고 둥근 플라스틱에 적힌 숫자가 사물함 번호다. 그 번호가 벽에 걸리면 세신 대기 줄이 된다. 번호표 고리마다 푸른 지폐가 돌돌 말려 있는데, 세신비다. 목욕 바구니로 대신 줄을 서는 곳도 있다. 동네마다 ‘룰’이 다르다.

32번! 17번! 카랑카랑한 외침이 수증기 가득한 목욕탕을 울리면, 번호의 주인이 세신침대(세신사끼린 ‘때다이’라 부른다)에 오른다. 쓱쓱, 사샤샥, 찰싹. 경쾌한 소리가 이어진다. 그 손놀림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이 기술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세상에, 이 또한 학원에서 배우는 일이라니.

조윤주(59)씨가 목욕관리사 학원을 찾은 것은 20년 전이다.

“병원에서 간병일 할 때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 옆에서 이야기하는데, 때밀이를 하면 300은 번다고 하는 거예요.”

간병에 들어가면 짧게는 사나흘, 길게는 한 달가량 병원에 묶여 있었다. 자녀 셋을 키우는 처지에서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다른 일을 찾아야지 생각하자 그때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길로 목욕관리사 학원을 찾았다.

“매일 학원에 오이랑 요플레랑 우유를 사 들고 가는 거예요.”

아는 사람은 안다. 예전엔 여자목욕탕이 세신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갖가지 미용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얼굴에 요구르트를 덮어쓴 채 세신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본다. 저게 효과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런 풍경에 목욕탕 갈 재미가 있달까.

마흔 살을 코앞에 둔 그가 가방에 세 가지 준비물을 챙겨 넣고 학원에 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어딘가 귀엽다. 하지만 이것은 내 상상일 뿐, 현실은 치열했다. 다들 하루라도 빨리 정식 세신사가 되려 했다. 그런 까닭에 수업은 실전과 다를 바 없이 이뤄진다.

“학원 침대가 ‘카바’를 딱 벗기면, 대중탕에 있는 진분홍 때다이랑 똑같거든요. 실제 물 뿌리면서 해요. 매번 가서 옷 벗고, 오이 갈아서 붙여보고, 서로 때 미는 실습 하고. 그렇게 매일 하다보면 살이 까져요. 어제 하고 오늘 또 미니까.”

종일 거친 때수건을 끼고 일하다 보니 세신사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종일 거친 때수건을 끼고 일하다 보니 세신사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도 햇볕 볼 일 없는 일

초면인 사람들과 속옷 바람으로 수업을 듣는 광경을 떠올리니 어쩐지 민망스럽다. 하지만 윤주씨는 이 말로 가벼이 응수했다. “먹고살려면.” 당시 그는 어떤 부끄러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쌍둥이가 고등학생이었어요. 그때는 무상급식이 아니에요. 급식비를 한꺼번에 내는데 100만원이나 해요. 내가 타는 월급이 120만원이었어요. 나는 그때 늘 ‘300은 벌어야 하는데’ 이 생각만 했어요.”

그러니 병원 구내식당에서 들은 300이란 숫자를 잊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남편과 컴퓨터 소매상을 했다. 286 컴퓨터가 있던 시절이었다. 인근 대학에서 축제를 하면 컴퓨터를 들고 가서 시연도 하고 테트리스 대회도 열었다. 젊었고 좋았던 시절이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 거래가 생겨나면서 사람들이 동네 상점을 찾는 빈도가 줄었다. 얼마 뒤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직원들 다 내보내고 살던 아파트마저 날아가고 나서야 사업을 포기했다. 이후 윤주씨는 ‘여자 일자리’로 일컫는 일들을 전전했다. 청소, 병간호, 간호조무사 등. 그리고 목욕탕으로 왔다.

“신이 났어요. 왜 신났냐면, 저녁에 때 밀고 번 돈 중에 2만원을 쓰면 애들 먹을 거를 한 보따리 사서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도 돈이 남았단 말이에요.”

영업을 마치면 세신사끼리 모여 앉아 빨간 통을 뒤집었다. 세신비를 넣어둔 통이었다. 돌돌 말린 지폐를 하나하나 펴서 동료 세신사들과 똑같이 나눠 가졌다. 몸은 천근만근이어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몇 개월만 지나면 다른 일을 찾게 됐다. 좋았다면서 왜?

“해를 못 보는 거예요. 지하에서 항상 일하잖아요. 새벽에 가니까 출근할 때 깜깜해요. 지하철 타고 내려서 목욕탕에 들어가 지하에서 종일 보내고 밤늦게 캄캄할 때 집에 오는 거예요. 지하 6층에서도 일해봤어요. 거기서 먹고 자고 하던 언니가 유방암으로 죽었어요. 거기서 나와야 해.”

일한 만큼 벌이가 되니 몸을 쉬게 두지 않는다. 피로와 습기가 들러붙은 몸은 탈의실 밖으로 나와도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햇볕에 몸을 보송보송 말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일 그만두고 얼마 못 가 다시 세신사 모집 공고를 뒤적인다.

“이만치 버는 일이 없으니까요.”

2000년대 중반, 찜질방처럼 규모가 큰 사우나 시설이 성행한다. 대부분 24시간 영업을 했다. 그에 따라 세신사도 1박2일로 근무해야 했다.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고 있으면 깨워 세신을 맡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몽사몽으로 때수건을 손에 꼈다.

“옛날에는 그랬어요. 새벽 1시에 일이 끝났는데, 3시에 손님이 와서 깨워요. 때 밀어달라고. 그렇게 밀고 와서 자면 5시에 일어나야 해. 처음에는 내가 거부했어요. 5시에 일 시작하니까 그때 다시 오세요.”

목욕물 온도는 41도로 맞춘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목욕물 온도는 41도로 맞춘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같이 일 못하겠네요” 들으면 그날로 끝

그날 바로 쫓겨났다. 고용된 처지가 아니었으나, 해고가 있었다. “같이 일 못하겠네요.” 이 한마디면 다음날 출근할 수 없었다. 세신사는 목욕탕에 고용된 직원이 아니다. 자릿세를 내고 들어오는 구조다. 전국 목욕탕 6천여 곳에 자리한 세신사들 모두 소속 없이 일한 거였다. 보증금을 내고 들어와 하루하루 목욕탕 사장에게 물값, 청소비 명목의 돈을 낸다. 보증금은 많게는 천만원 단위다. 세신사가 갑자기 그만두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받기 시작한 돈이 야금야금 늘었다. ‘여자 일치고’ 벌이가 제법 된다는 이유로 그 돈 내고서도 목욕탕에 자리를 잡으려는 세신사가 넘치던 때였다.

“일 많은 곳은 한 사람당 20분 안에 때를 못 밀면 쫓겨났어요.”

빠른 손놀림은 필수다.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렇다고 실력만으로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보통 한 목욕탕에 세신사 두엇이 같이 일했다. 단골손님이 많은 자가 권력을 쥔다. 기술 좋고 처세도 좋아 단골이 많은 세신사가 “저 사람과 같이 일 못한다” 하면 잘리는 거다. 목욕탕 주인은 단골 가진 세신사 편을 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제 막 세신의 세계에 입문한 신입은 내내 눈칫밥 신세다. “살벌하지요?” 그 눈칫밥 세월을 이겨내야 진짜 세신사가 된다.

처세와 기술이 두루 필요한 곳에서 20년을 일했다. 하루 서른 명을 만난다고 해도, 한 달이면 어림잡아 800명. 1년이면 1천 명 정도다. 숱한 몸을 봤다. 고급 호텔 스파부터 동네 작은 목욕탕까지 세신사는 어디에나 있지만, 일하는 동네마다 보는 몸이 다르다. 동네 목욕탕에서 자주 보는 건, 고생한 몸. 관절과 근육을 아낌없이 쓴 사람들이 ‘몸 지지려고’ 목욕탕을 찾는다.

“혈이 막혀 있다고 해요. 때를 밀다보면 엉덩이골 이 부분이 동글동글 뭉쳐 있는 게 느껴져요. 젊을 적에는 무릎도 얄팍하고 뼈 모양이 다 드러나는데, 점점 두툼해지고 커지잖아요. 순환은 못하고 쓰기만 하니까, 혈이 막힌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눕혀 때수건이 지나가는 순간이라도 시원해지라고 꾹꾹 눌러준다. 침대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쇠약한 노인들도 몸을 맡긴다.

“부축받고 올라요. 와서도 엎드리지 못하는 분들이 계셔요. 어르신이 혼자 왔다 싶으면 주시를 해요. 10분이 지나도 안 나오셔. 그러면 때수건 빼놓고 탕으로 쫓아가요. 모시고 나오는 거죠.”

간혹 노인들이 탕 안에서 의식을 잃는 일이 있다. 그래도 잔소리하지 않는다. 거동 불편한 몸으로 목욕탕을 찾는 마음을 안다. 고생만 한 몸을 뜨끈한 물에 담근다. 잠시간의 위안이다. 목욕탕 찾는 사람들은 이 시간을 통해 기운을 회복한다고 믿는다. 세신사도 이런 마음에 동참한다.

“손바닥으로 기운이 전해지잖아요.”

닦고 문지르고 관절을 긁어주고 근육을 눌러준다. 골파기, 빨래하기, 헤엄치기, 쪼개기… 손동작마다 다양한 이름이 붙는다. 주황, 초록, 노랑 알록달록 때수건 안에서 손놀림이 현란하다.

“세신은 잘하고 못하고가 아주 작은 차이예요.”

미세한 동작으로 기술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말.

“못하는 사람은 시원한 부분을 빼놓고 지나가는 거예요. 몸이 굴곡졌잖아요. 관절이 솟아오른 곳은 손끝으로 민다든가. 옴폭한 곳은 또 방법이 달라요. 널찍한 데는 손바닥으로 미는데, 또 약한 부분이 있어요. 거긴 밀면 아프니까 살짝 비벼주는 거예요. 어떤 곳은 당기는 기분으로.”

이것이 세신의 기술이라 했다.

내 몸 챙기면서 다른 사람 몸 챙기기

세신을 마친 사람들은 개운하다고 한다. 그 말 듣는 일이 좋았다.

“옛날에 컴퓨터 장사하다가 망했을 때 ‘내가 왜 망했지?’ 생각했어요. 내 식구 먹고사는 일만 걱정하고 내 돈만 벌려고 해서 그랬나, 후회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들어 한동안 헌혈하기도 했어요.”

몇 달 지나자 어지럼증이 생겼다.

“이거는 안 되겠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게 뭐가 있지? 나는 육체가 건강하지. 타고난 육체가 있으니까 내 노동력을 주자 이랬거든요.”

문지르고 닦다보면 왠지 그들의 건강에 작게나마 이바지했다는 뿌듯함이 든다. 오래 일한 세신사라면 한번쯤 겪어봤을, 유방암 의심 환자를 찾아 치료받게 한 일화도 있다.

“멍울이 잡히는데 혹시 알고 계셔요? 물어봐요. 심한 사람은 복부에서도 느껴지는데 자기는 몰라.”

그 자신보다 더 구석구석 몸을 매만지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 좋은 일’은 목욕탕 안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윤주씨가 기술을 알려줘 세신사 일을 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근무 첫날, 그 사람과 퇴근하는데 가족이 마중 나와 있더란다.

“그걸 보면서 내가 기술 알려주고 일자리 배려한 게 이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었구나. 저 가족 모두에게 돌아가겠구나.”

자신도 300만원이란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학원을 찾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기술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서울 대림동에 목욕관리사 학원을 차린 지 10년이 됐다.

그가 수업 때 특히 강조하는 것은, 몸 다치지 않게 하기. 한쪽 다리에만 하중을 두지 말고, 허리를 너무 굽히지 말고, 손가락만 쓰지 말고. 계속 염려한다.

“손가락 끝을 쓰는 게 제일 편해요. 손바닥이나 다른 데는 좀 둔탁하기 때문에 기술이 없으면 고객도 세신사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덜해요. 그러니까 손가락만 쓰는 거예요.”

손가락은 약한 부위다. 자칫하면 인대가 끊어진다. 제대로 배우지 않고 현장에 가면 내 몸 상해가며 일할 수밖에 없다. 현장 선배로서 하는 말이다. 다른 사람 몸 챙기는 것만큼 내 몸을 챙길 줄 알아야 오래 일한다.

종일 거친 때수건을 끼고 일하다보니 세신사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조윤주 제공

종일 거친 때수건을 끼고 일하다보니 세신사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조윤주 제공

그런데 3년 전, 위기가 닥쳤다. 코로나19가 퍼지고 목욕탕이 우후죽순 문을 닫았다. 세신을 배우러 오는 이도 없었다. 수강생이 한 명 남은 상태에서 학원 문을 닫았다. 일하던 대중목욕탕 풍경도 달라졌다.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던 탈의실 평상이 사라졌다. 평상에 가져온 음식을 펼치고 담소를 나누는 장면도 볼 수 없었다. 그 또한 속옷 바람에 마스크를 쓰고 일했단다.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2023년 학원은 다시 문을 열었다. 윤주씨는 1인 세신숍으로 자리를 옮겼다.사람 모인 곳보다 독립된 공간을 선호하게 된 사람들이 1인 세신숍을 찾았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였다. 이제 사물함 열쇠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인터넷으로 예약한다. 세신비를 넣던 빨간 바가지도, 조잡하지만 정감 가는 파란색 타일도 볼 수 없다.

윤주씨는 이제 숨 좀 돌리며 일한다고 했다. 기본급이 나오고 시간마다 예약자만 받는다. 대중목욕탕에서 일할 때 찍은 자신의 손 사진을 보여준다. 손끝마다 벗겨지고 하얗게 일어났다. 물 마를 일이 없는 사람의 손. 까슬한 때수건에 손바닥이 쓸린다. 이곳으로 옮긴 뒤 손이 보들보들해졌다고 한다. 보여준다며 내민 손이 동글동글하다. 그가 웃었다.

“이렇게 도톰한 손이 때 밀기에 좋아요. 면적이 크잖아요.”

갈라진 발뒤꿈치를 가졌을 이들

윤주씨가 수강생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걸 들었다.

“1인 세신숍에선 발뒤꿈치를 타월로 문지를 때 약하게 해야 해요. 1인 세신숍 고객들은 발이 보드라워요.”

불편한 걸음으로 동네 목욕탕을 찾아들던 나이 든 몸을 떠올린다. 갈라진 발뒤꿈치를 가졌을 이들. 노동의 세월이 뒤꿈치 각질에, 절뚝이는 다리에, 굽은 등에 녹아든다. 이제 그 사람들은 누구에게 몸을 맡길까. 그들을 매만져온 윤주씨의 손을 본다. 그의 노동이 두 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희정 기록노동자·<두 번째 글쓰기> 저자

*베테랑의 몸: 기록노동자인 희정이 자신의 분야에서 숙련공(베테랑)으로 일해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몸과 숙련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4주마다 연재.

조윤주씨는 대중목욕탕에서 20년 동안 세신사로 일했다. 지금은 경기도 안양의 한 1인 세신숍(여휴)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조윤주씨는 대중목욕탕에서 20년 동안 세신사로 일했다. 지금은 경기도 안양의 한 1인 세신숍(여휴)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최형락 사진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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