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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일터엔 쉴 곳이 있나요

화장실, 창고, 복도, 계단에서 쉬는 노동자들… 8월 ‘사업장 휴게시설 의무화’하지만 ‘20명 미만’ 제외도 거론
등록 2022-04-05 18:46 수정 2022-04-06 06:54
경기도 반월공단의 한 금속가공 공장 휴게실 모습. 박태현 부지회장 제공

경기도 반월공단의 한 금속가공 공장 휴게실 모습. 박태현 부지회장 제공

한 손엔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한 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 종이 설문지를 받아들 확률은? 지켜본 바로는 거의 없다. 2022년 3월28일, 수도권의 한 공단 지역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이 ‘산업단지 휴게실 실태조사’를 한다기에 점심시간에 맞춰 나가보았다.

노동조건 따라 휴게공간도 갈린다

설문 문항에 ‘휴식을 취하는 곳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이 있다. 답을 골라야 한다. ‘탈의실, 탕비실, 화장실, 창고 같은 분리된 실내 공간’과 ‘복도, 비상구·계단, 자판기 주변 같은 개방된 실내 공간’이라는 보기가 있다. 이 두 공간을 구분한 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옥상, 야외, 나무 그늘, 흡연실’이라는 다음 보기를 보니 하는 일, 노동조건에 따라 휴게실이라 불리는 공간이 얼마나 다양할지 상상해야 하는구나, 깨달았다. 이런 질문이 들어 있는 줄 알았다면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서 설문지를 받아 가지 않았을까.

‘협력 업체를 위한 휴게실이 따로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어떠한가. 휴게실이 따로 있는 게 좋은 것일까. 그러나 나는 노동자들에게서 “정규직 직원들과 한 휴게실에 있으면 눈치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회사가 휴게실을 설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묻는 문항의 보기 1번에 ‘법적 의무가 아니라서’가 있다. ‘비용 때문에’ ‘회사가 좁아서’라는 다른 보기 항목에 동그라미를 칠 수도 있지만 1번을 골라도 맞는 답이다.

사실은 몰랐다. 휴게실 설치가 법으로 정한 의무가 아니라는 것, 의무가 아니어서 휴게실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업하려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이 쉴 곳을 마련해야 한다. 2022년 8월부터 산업안전보건법으로 휴게시설 설치 의무가 발효된다고 한다.

5월부터 일하게 될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필요에 따라 노동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20세기 공장법 방식으로’ 노동시간과 임금을 묶어두지 않고 노사가 자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대통령 당선자의 소속 당에서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명목만으로 겨우 규율되는 근로 기준의 질서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허물자고 하는데, 휴게시설 같은 노동환경은 아직 20세기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대통령 당선자의 노동정책이 인터넷에서 유행하는(유행이 지났던가?) 농담처럼 ‘혼돈의 아노미’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경기도 안산시 반월국가산업단지(반월공단)의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오래 일한 박태현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흥안산지회 부지회장은 4월부터 ‘휴게실 실태조사’ 설문지를 들고 공단의 거리로 나가려고 계획 중이다. “공단에 들어서면 매연은 당연하고 먼지 많고, 차들은 급히 달리고, 공단 건물들은 낡았죠. 공단의 사업체 97%가 50명이 안 되는 작은 공장에, 최저임금 맞춰주면 괜찮은 회사, 호봉 있고 성과급 있으면 좋은 회사라고 소문나는 곳이에요.”

1980년대에 운영을 시작한 산업단지이니 겉모습이 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10만 명 넘는 노동자가 터전 삼은 공단 환경이 사람이 덜 불안하고, 덜 불편한 방향으로 왜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깨끗한 환경에 젊은 노동자가 많이 다니는 제약업체나 식품회사 같은 곳도 있지만 금속가공, 화학공장 같은 곳은 노동자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어디든 박스 깔고 쉬어요”

“춥거나 덥거나 사람으로서 보호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기대 수준이 낮아지죠. 방진마스크를 써야 하는 현장인데 달라고도 안 하고요.” “휴게실도 마찬가지죠. 작업복 갈아입는 곳, 거기서 쉬죠. 작은 공장은 탈의실도 없으니 공장 한 귀퉁이에 옷가방 놓고 점심시간에 박스 깔고 낮잠도 자고요. 먼지 있는 건 안 중요해요.” “여성들은 주부 사원이 많은데, 화장실이 관리되는 데는 여자화장실에 박스 깔고 쉴 수 있죠. 쉬기는 해야 하니 어디든 박스 깔고 쉬어요.” 박 부지회장이 반월공단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휴식은 인권이며 건강권’이라는 말로 휴게시설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가 많다. 노동하면 쉬어야 하는 것은 봄비가 내린 뒤 나뭇잎이 초록이 될 것이라는 말처럼 지당하다. 휴게실이 생기면 노동자들 사이에 말이 오가게 될 것이다. 회사 이야기, 공단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휴게실 벽에 무엇을 붙일 수도 있다. 휴게실이 생기면 정보도 이야기도 교류도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로 휴게실 설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섬처럼 떠 있는 공장의 노동에서 정보 교류는 건강권만큼 중요하다.

8월부터 지켜야 하는 휴게실 설치 의무를, 정부는 20명 이상 일하는 곳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시행령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시행령이 정하는 바가 곧 실제 법의 내용이니, 20명을 기준으로 더 작은 규모에서 일하는 이들을 밀어낸다. “직원 5명이 안 되는 공장들이 모인 곳이 있어요. 편의점, 공동휴게실 만들어 점심시간에라도 모여서 쉬게 추진하면 되거든요. 작은 공장들이 밥을 먹는 컨테이너 식당들도 있고요.” 박태현 부지회장이 말했다.

한 공단에 있지만 교류할 수 있다는 기대도 상상도 없다. 외롭다. 밥 한 끼 먹자고 하는 것이 큰 위로인 날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혼자 버티다 회사가 힘들어지면 떠나는 사람이 많다.

“공단에서 일한다는 건, 빨리 끝내고 가야 하는 곳, 피하고 싶은 곳이에요. 10분을 쉬어도 권리의식이 생기는 일이 되겠죠. 휴게실을 만들라고 하는 건, 일한 만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모여서 해보라’ ‘방법을 찾아보라’고 제안하면 답이 보인다. 박태현 부지회장처럼 좀더 나은 공단을 만들고 싶은 이들이 휴게실 설치가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공단 노동자들 사이에는 요새 근심이 생겼다.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용직처럼 들어오는 이른바 불법파견은 변한 게 없는데 최저임금제도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이다. 파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최저임금이 안 되는 돈을 받고도 일하겠다 하면 공단의 임금수준이 더 낮아질 것이다.

최소한의 기준마저 ‘낡은 것’ 취급하는 시대

“실태조사를 나가면 사람들이 기대가 있을까요?” 물었다. 박 부지회장이 답했다. “아뇨, 별로. 급여 향상 아니면 관심은 없죠. 제일 큰 관심은 월급 문제니까.” 휴게실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공간은 있으면 좋죠. 항상 생활하는 곳이니까. 사람들이 좋아할 거예요. 어쩔 수 없지 하며 다니는데, 포기했던 걸 하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휴게실이 생기면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역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 노회찬 재단 × <한겨레21> 공동기획 ‘내 곁에 산재’: 일터에서 다치고 아픈 이들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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