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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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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하청 노동자 생명줄을 깎았다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죽는 일이 끊이지 않는 이유
등록 2021-08-31 14:45 수정 2021-09-01 02:12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한 노동자가 건조 중인 선박 앞을 지나가고 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70%가량은 하청 노동자다. REUTERS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한 노동자가 건조 중인 선박 앞을 지나가고 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70%가량은 하청 노동자다. REUTERS

2020년에만 노동자 10만8천여 명이 업무상 사고를 당하거나 업무상 질병에 걸렸다. 산업재해(산재)는 멀리 있지 않다. 일터에서 다치고 아픈 이들은 우리 곁에 항상 있다. 이철 작가와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산재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들은 ‘내 곁에 산재’ 이야기를 전한다. 노회찬재단과 〈한겨레21〉이 공동기획했다. 앞으로 격주로 이들의 기록을 연재한다. _편집자
 노회찬재단× <한겨레21> 공동기획

내 곁에 산재

① 평택항 이선호 친구 이용탁씨

②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동료 이준석 지회장

③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하창민

④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한 청년노동자들

하창민(49)씨가 조선소에서 일을 시작한 해는 1998년이다. 현대미포조선에서였다. 3년 뒤 현대중공업으로 자리를 옮겼고 실력 좋은 용접사로 묵묵히 일했다. 2007년에는 현장 관리자로 발탁됐다. ‘직장’이라는 직위였다. 보통 40대 중후반이 돼야 맡는 자리인데 당시 그는 35살이었다. 그는 ‘싸움’을 잘했다.

“노가다가 어떤 게 있냐면, 기술로 이기든 나이로 이기든 뭐가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말을 안 들어요. 통제가 안 돼. 그러니까 기술도 내가 나아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잘 싸워야 해요. 그래야 권위가 생기거든요.”

분노한 산재 환자만 노조를 찾아왔다

2009년 겨울 어느 날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현장 관리자로 조용히 몇 해 더 일하면 ‘업체 사장’이 될 수 있었다. 현대중공업 내에서 일하는 수많은 업체는 ‘일 잘하는 애들 몇 명’만 있으면 차릴 수 있으니 터무니없는 계획은 아니었다. 업체는 대부분 80명에서 100명 사이 규모였지만 이 중 70%는 ‘물량팀’(재하청 일용직 노동자)으로 채우면 되니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그는 노동조합에 불현듯 가입했고, 곧 일하던 자리를 잃었다.

“뭔가에 미쳤어요, 그냥. 관리자로 잘살면 되는데 찾아갔어. 찾아가서, 해야겠다 하니까…. 그때 하여튼 2004년 박일수 열사 투쟁 때 다 깨지고 조합원이 한 명도 없었어요, 한 명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이 설립된 때는 2003년 8월이다. 조합이 설립되자마자 원청인 현대중공업은 조합원이 소속된 하청업체를 폐업시키는 방법으로 노조를 짓눌렀다. 폐업은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이었다. 이듬해 2월 박일수 열사가 분신했다. 이후 노조는 업체 소속 노동자의 집단 가입 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위압을 견뎌낼 수 없었다. 여러 업체의 폐업이 이어졌고 조합원은 일과 자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2011년 하창민씨는 금속노조 울산지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이 됐다. 하지만 노조 사무실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산재 환자’만이 가끔 찾아왔다. 그는 현장 속에서 하청 노동자의 조합 가입을 독려하는 여러 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부당해고, 임금체불, 원청의 블랙리스트 운영 등 원·하청 구조에서 발생하는 여러 불합리와 싸웠고 산재 피해자를 지원했다. 조합원은 시나브로 200여 명으로 늘었다.

하청이 사라져야 죽음도 없어질까

일하다가 사람이 죽는 일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발생한 여러 산재 사고에 대응하며 산재에 관한 뚜렷한 감각을 얻었다. 2012년 발생한 황종철씨 사망사고가 특별했다. 사내 탈의실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된 황종철씨는 구급차가 아닌 현장 작업차량으로 이송됐다. 사고 발생시 긴급하게 운용할 수 있는 구급차가 사내에 준비돼 있음에도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더라고요, 그 하청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으면 이 죽음이 안 없어지는 거예요. 고용구조와 산재가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거라. (…) 그리고 산재로 상담을 오는 거는, 살아 있으면서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와도 해고하고 같이 연결돼 있고요. 여러 가지가 중첩된 사건이라는 거예요. 결국엔 사장의 못된 짓거리가 다 드러나는 거고. 현장 분위기까지 다. 산재 뒤 복직해도 결국 못 버티고 다 나가요.”

겨우 먹고살 정도로 돈을 벌려면 하청 노동자는 주 75시간, 월 300시간을 일해야 했다. 임금은 항상 ‘시간곱’이 전부였다. 원청은 항상 공기, 즉 공사 기간을 빠듯하게 잡았다. 하청업체는 일감을 빨리빨리 쳐내는 상황에 몰렸다. 원청은 맨아워 산정에도 팍팍했다. 맨아워는 노동자 한 사람이 1시간에 생산하는 생산성을 셈하는 단위인데, 가령 100 맨아워짜리 작업을 60 맨아워로 산정하는 식이었다. 원청은 이런 방식으로 ‘비용 절감’을 했다.

하청 노동자는 일을 ‘빨리 시키니까’ 다칠 수밖에 없었다. 중복 작업은 당연했다. 밑에서는 용접하고, 위에서는 (안전 발판을 설치하는) 족장 작업을 했다. 일을 멈출 수 없으니 웬만큼 다쳐서는 말도 하지 않았다. 목발을 짚고도 출근하고 손에 붕대를 감고도 일했다. 병원을 찾을 때면 다친 이유를 둘러댔다. 산재 처리를 하면 원청이 일감을 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원청 노동자는 월요일마다 안전교육을 받았다. 하청 노동자는 공기가 항상 급했다.

“어떤 법(중대재해처벌법)이 생기든 적용받는 건 다른 개념이에요. 이게 생겼다고 현장까지 내려오지 않아요. 만약에 근로감독관이 조사를 나오면 작업을 안 시켜요. 간 뒤에 시킨다니까. 어떻게 확인을 해, 더 숨기지 더.”

사내에서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하창민씨는 있는 힘껏 지원했다. 산재는 원·하청 구조의 결과였다. 하청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청 정규직 노조와의 연대가 절실했다. 민주노총은 파업을 예고할 때마다 비정규직 문제를 중요하게 거론했다. 하창민씨의 노동 현장이 비정규직 문제의 불합리로 가득한 바로 그 현장이었다. 원청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의 비율은 3 대 7 정도였고, 하청업체 내에는 근로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고 일감만 받아 일하는 ‘물량팀’이 70%를 차지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현장은 정파와 계파로 쪼개져 있었다.

언젠가는 그 일을 글로 기록하리

하청과 비정규직 문제를 거론하는 일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체가 있는 운동이 되려면 하청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창민씨는 믿었다. 2017년 그는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임원 선거에 본부장 후보로 출마했다. 2020년에는 울산 동구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모두 낙선했다. 그에게는 정파도, 계파도 없었다. 정규직 노동자라면 으레 갖추는 ‘멤버십’조차 없었다. 노동운동의 길에서 만나 연대한 모두가 ‘동지’라는 믿음을 놓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을 뿐이다.

2009년 노동조합 가입 이후 십수 년이 흘렀다. 2020년 그는 현장을 떠났다. ‘개인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었다. 인생에는 상승이 있으면 하강도 있는 법이다. 언젠가는 그간의 일을 글로 기록할 생각이다. 개인의 삶만을 산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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