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산재
②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동료 이준석 지회장
이용탁(24)씨가 친구 선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건 사관학교에서다. 영어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시험을 마쳤을 땐 밖은 이미 깜깜했다. 저녁 식사 뒤에 치른 시험이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그사이 전화가 많이 왔다. 모두 친구 명근이 건 전화였다. 명근은 안 받는다고 바투 전화하는 법이 없던 친구였다.
“선호가 죽었다.”
한마디였다. 명근은 친구의 죽음을 간명하게 전했다. 경기도 평택항이라고 했다. 용탁씨는 믿지 않았다. 거기서 선호와 함께 선호의 아버지를 따라 일한 날이 많았다. 컨테이너 문을 열고 안에 들어찬 양파며 우엉이며 김치를 3분의 1쯤 꺼내는 일이었다. 식품검역관이 슬쩍 살피고 나면 깔판에 쌓았던 걸 다시 컨테이너에 실으면 그만이었다. 그건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네이버에 평택항 쳐봐라, 그거 선호다.”
명근이 말했다. 개방형 컨테이너의 날개를 접는 작업 중 일어난 사고였다. 그건 선호랑 원래 하던 일이 아니었다. 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겪어내야 하는 건지, 용탁씨는 알지 못했다. 이제 만 23살이었다. 이틀 뒤 휴가를 나왔고 선호의 빈소로 향했다. 열흘짜리 휴가였다.
용탁씨는 17살에 선호를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 입학 날이었다. 모든 학생이 제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했는데, 교실 뒷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가 1반 맞습니까.” 부산 사투리를 쓰는 아이였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아이는 헐레벌떡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선호였다.
“인상은 안 그래요. 인상은 딱 봤을 때 무뚝뚝하고, 그냥 애가 항상 뚱해 있고. 근데 은근 겁도 많고 울음도 많고.”
자리가 가까워 금세 친해졌다. 처음엔 세 명이었다. 그러다 용탁씨와 선호의 친구 그룹은 열 명으로 늘었다. 점심은 항상 모여 먹었다. 급식실에 함께 앉을 자리가 없을 때면 식판을 들고 운동장 스탠
드로 나갔다. 다 먹고 나면 식판 치우기 가위바위보 승부를 가렸다.
선호는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았다. 해가 바뀌어 서로 반이 갈라져도 점심은 ‘무조건 같이’ 모여 먹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1년에 한 번씩 다 같이 여행을 갔거든요. 2018년까지 계속 갔는데, 하나둘 군대 가면서 잠깐 끊겼고 또 코로나19 때문에.”
고1, 고2 두 해 모두 충남 천안에 있는 펜션으로 갔다. 앞에 시냇물이 흐르는 외진 곳이었다. 운전을 할 수 없으니 기사님이 운전하는 소형 버스를 대절했다. 고3 때는 강원도 강릉이었다. 열 명이 10
만원씩 갹출하니 적잖은 돈이 모였다. 술은 부모님이 챙겨줬다. 적당히 즐기고 실수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용탁씨의 아버지는 양주를 한병 얹었다. 엑스오(XO)였다.
대학을 다니던 2017~2018년에는 방학 때마다 평택항에서 일했다. 선호 아버지가 일할 사람을 찾을 때면, 선호는 용탁씨에게 1순위로 연락했다. 일손이 더 필요하면 선호는 용탁씨에게 누굴 데려갈지묻기도 했다.
“친구들끼리 일하면 힘든 일이더라도 재밌잖아요. 그게 좋은 거같아요. 아마 저 혼자 갔으면 그 일을 한두 번 하고는 안 했을 거 같아요.”
보통 선호 아버지가 컨테이너 안에서 물건을 ‘파냈다’. 망에 담긴 양파는 V자로 파내면서 밖으로 꺼냈다. 선호가 둘 사이에서 자루를 받아넘기면 용탁씨는 그걸 팔레트(깔판)에 쌓았다. 여름은 해를 피할 데가 없었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처음 하루 이틀을 넘기면 몸은 적응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일했다. 사람이 매일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식대와 인력사무소 수수료 등을 떼고 나면 8만8천원 정도 받았다. 일찍 시작하고 일찍 끝나는 일이라 나쁘지 않았다. 일을 마치면 선호
와 함께 놀았다. 피시방에 가 롤(LOL·리그오브레전드)을 하거나 노래방에 갔다. 선호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다. 단골 꼬칫집에 가서 둘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날도 많았다. 선호는 항상 몸이 불편한 큰누나가 걱정이었다.
“조문객이 이름 적는 거를 뭐라고 하죠? 그걸 봤는데 친구만 250명이 왔어요.”
평택에서 또래끼리는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군지 다 아는” 친구 사이였다. 가까운 친구들은 59일 동안 선호의 빈소를 지켰다. 용탁씨 부탁으로 친구 김벼리는 선호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 벼리는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여러 언론이 찾았고, 많은 시민이 조문했다. 정치인의 발길도 이어졌다. 원청 회사인 동방은 전적으로 책임지고 사과하기로 했다.
“저희가 했던 일 자체는 안 위험한데, 환경이 좀 위험하거든요. 작업하다보면 제 머리 바로 위에서 크레인이 컨테이너를 든 채로 지나가요.”
크레인이 용탁씨가 일하는 가까운 곳에 컨테이너를 내리는 경우도 잦았다. 그는 신호수를 본 적이 없었다. 커다란 지게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렸다. 지게차 운전사가 “야, 나와”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이번에 선호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고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한 번만 더 체크했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잖아요.”
용탁씨가 보기에 항만에서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외주업체 인력이었다. 이주노동자가 70%를 넘는 것 같았다. 항만 내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과 지게차를 모는 사람 정도만 원청사인 동방 소속이었다.
열흘 뒤 용탁씨는 사관학교로 복귀했다. 그가 부대에 있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선호의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았고, 언론사 기자들을 응대했으며, 선호 아버지를 챙겼다. 늦은 밤에는 서로 모여 선호와 그들 자신을 추억했고, 낮에는 평택과 서울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했다. 그사이 용탁씨는 “원래 생각은 갖고 있었는데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던 일을 결심했다. 퇴교였다. 힘든 훈련은 모두 마쳤고, 반년만 더 다니면 임관이었다.
장교가 되면 진급 문제에만 매몰될 것 같았다. 내 가족에게,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걸 돌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선호의 죽음이 컸다. 대신 부사관을 준비하기로 했다. 군인은 어
릴 적부터 바라던 직업이었다. 40~50대에 퇴직하면 술집을 차릴 생각이다. 이건 꿈이다. 장사하다 친구가 오면 술 한잔 같이 할 수 있을테니 무척 마음에 드는 꿈이다.
이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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