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4월 핀란드 헬싱키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를 한 시민이 쳐다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핀란드의 의회·시민·민주주의에 관한 박사논문 연구에 집중하던 2014년 가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일과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와 자전거로 귀가하던 길이었다. 자전거가 동네 어귀로 들어설 무렵, 때아닌 선거 포스터가 길게 설치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내가 모르는 선거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나?’ 가까이 가보니 교회 선거 포스터였다. ‘교회 대표들을 선거로 뽑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일반 총선보다 더 많은 후보가 출마했는데 대부분 정당이나 선거연합에 소속돼 있었다.
정당별 투표율로 개인 당선자 의석 할당그렇다. 핀란드 국민의 약 70%가 소속된 루터리즘 교회의 전국 약 400개 교구에서 약 9천 명의 대표를 뽑는 선거 포스터가 동네마다 내걸리고, 거기에 사회민주당(사민당)·중앙당·보수당·녹색당·좌파동맹·기독민주당·스웨덴인민당 소속 후보들이 출마해 대표로 선출된다. 4년마다 열리는 교회 선거는 총선과 똑같이 비례대표 원리로 치러진다. 선거연합별 명부에 기초해 투표하고, 후보가 속한 명부 전체의 득표율을 먼저 집계한 뒤 개인 득표율을 산정해 의석을 할당한다.
교회 선거는 만 16살 이상부터 투표할 수 있다(출마는 18살 이상). 전국적으로 15% 안팎의 투표율을 기록한다. 2018년에는 전국에서 약 300만 명의 교회 선거 유권자 가운데 약 44만 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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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핀란드에서 비례대표 선거제도가 적용되는 건 국회의원 선거만이 아니었다. 4년마다 벌어지는 지방자치 선거도 똑같이 개방형 명부 비례대표 선거제도로 치러진다. 유권자는 정당 투표와 개인 후보 투표를 동시에 하며(투표용지 1장),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할당한 뒤 개인 득표율로 정당 내 당선자를 가린다. 의회 선거와 마찬가지로 많은 정당이 지방자치단체 의회에 진입하며, 정당 간 연합으로 의회 다수를 형성한 뒤 정당별 권력 크기에 비례해 지방정부(집행부)를 구성한다. 자연히 합의적 형태의 민주주의 정치가 중앙과 지방 모두에서 발전한다. 현재 헬싱키는 보수당(5석), 녹색당(4석), 사민당(2석), 좌파동맹(2석), 핀란드인당(1석), 스웨덴인민당(1석) 대표들로 구성된 ‘무지개연정’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비례대표 원리는 핀란드 민주주의의 다양한 장소와 단위에서 진행되는 대표 선출 과정에 폭넓게 적용된다. 교회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중요한 공간이자 행위자인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이사회인데 여기에는 ① 교수 대표 ② 연구자·강사·일반 직원 대표 ③ 학생 대표 ④ 외부 인사 등이 골고루 참여한다. 이들을 선출하고 임명하는 ‘콜레기움’(Collegium·평등한 권리를 가진 이들의 회합이란 뜻) 역시 교수, 연구자·강사·일반 직원, 학생 대표가 비슷한 비율로 구성한다. 이들은 해당 그룹별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정당명부제와 유사한 원리가 작동된다.
시민사회의 촘촘한 네트워크대학 학생회는 어떨까? 나는 유학 기간에 수차례 학생회 선거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정당이나 선거연합별 후보 명부를 놓고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주요 전공별 학생협회가 별도의 후보 명부를 작성하기도 하지만, 원내외 정당들도 자신들의 공약과 정책을 내걸고 후보 명부를 제출한다. 그렇게 우선 학생 사회의 의회 격인 대표회의를 구성한 뒤 단체별 득표율을 반영해 연합 집행부를 구성한다. 현 총리인 산나 마린(사민당)도 2012~2013년 탐페레대학교 학생회 대표회의 의원을 했고, 2009년에는 같은 대학 콜레기움에서 학생 대표로도 활동했다.
세계 최고 조직률을 자랑하는 협동조합의 대의원 선거에도 비례대표 원리가 작동한다. 예컨대 헬싱키 지역의 대표적인 생활협동조합 HOK-엘란토(Elanto)는 4년마다 조합원 선거를 해서 25명의 대표회의를 구성한다. 2016년 선거에선 유권자 59만714명 중 15만3495명이 투표에 참여해 26% 투표율을 기록했다. 선거는 역시 개방형 명부 비례대표제로 치러지며 사민당, 보수당, 중앙당, 녹색당, 좌파동맹 등 주요 정당들이 모두 후보를 낸다. 후보 가운데는 현역 국회의원도 즐비하다. 예컨대 사민당의 에르키 투오미오야 의원은 다선 국회의원으로 역대 최장수 외무장관을 했을 정도로 유력 정치인인데, 오랫동안 이 협동조합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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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인구 550만 명의 작은 나라이지만 시민사회 전반이 촘촘한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고, 수많은 협회와 단체의 대표 선출과 의사결정 방식이 비례대표제와 합의적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돌아간다. 핀란드 시민사회와 생활 속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국 사회가 지금 어떤 원리로 크고 작은 권력이 조직, 운영되는지 새삼 돌아본다.
민주화 이후 채택된 결선투표 없는 5년 단임 대통령제와 단순다수대표 소선거구제 중심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승자독식 원리에 기반한 다수결 민주주의를 줄곧 심화해왔다. 권력은 독점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는 발상은, 한국의 정치 엘리트에게 여전히 낯설고 불편한 이야기다. 이는 비단 정치권과 중앙정부 수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자체, 대학, 교회, 학생회, 노조와 협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 전반에서 우리는 다수결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권력은 독점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것최근 우리 사회도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발전 경로에 있어 비례대표제 등 정치제도가 미치는 심대한 영향에 대한 인식이 커짐으로써 선거제도 개혁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 과정과 그 결과에서 승자독식 정치는 한층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정적 국정 운영과 코로나19 위기 극복, 불평등 해소 등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열망을 확인함과 동시에 대표성의 과잉-과소, 대결하는 진영정치 문제를 지닌 기존 선거제도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21대 국회 개원 이후 제도적 상상력을 더욱 가두는 방향으로 선거개혁이 논의될 것 같아 우려스럽다. 지금은 오히려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 전반에 걸쳐 비례대표와 권력 공유 원칙을 실천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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