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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선진국 농정으로 가자”

박진도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위원장 “공익형 직불금 내년 2조2천억원에서 더 확대해야”
등록 2019-11-06 09:54 수정 2020-05-03 04:29
김현대 선임기자

김현대 선임기자

한국 농업의 ‘예고’된 폭탄이 터졌다.

10월25일 홍남기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래의 농업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대외경제장관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지금까지 누리던 농업 부문 개도국 특혜를 앞으로는 고집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농업계에서는 “정부가 농업의 추가 희생을 또다시 강요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외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이 작용했다”고 풀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한국과 중국 등의 개도국 혜택 부당성을 지적하며 “90일 이내 개선을 이뤄내지 못하면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개도국 지위 상실이 한국 농업에 던지는 충격파는 간단하지 않다. 현행 농정의 근간인 막대한 보조금 지급과 고율 수입관세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한국 농정의 대전환이 불가피해졌다. 대통령 직속 기구인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이하 농특위) 박진도 위원장은 올 4월 출범 이래 “농정의 틀을 바꾸는 것이 사명”이라고 천명했다. 박 위원장의 농특위가 생각하는 대전환의 뼈대는 ‘공익형 직불제’의 전면 도입이다. 박 위원장을 10월29일 서울 신문로 농특위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계무역기구(WTO)는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를 발효하면서, 개도국으로 인정받은 나라들이 수입관세를 높게 매기고 농업보조금을 더 많이 지급할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했다. 그 덕분에 우리 정부는 그동안 513%의 초고율 관세로 쌀 수입을 방어해냈다. 쌀값이 떨어질 때면 변동직불금(최대 연 1조4900억원)을 풀어 농가 소득을 보전할 수 있었다. 앞으론 관세도 낮춰야 하고 변동직불금 규모도 줄여야 하게 됐다.

정부 논리에 반박하지 않은 이유

개도국 지위 포기라는 한국 농업의 큰 변화를 맞게 됐는데, 농특위는 왜 아무 목소리를 내지 않나.
농특위는 처음부터 농정 현안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그보다는 농정의 틀을 바꾸는 일에 매진한다.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정부 사정은 이해한다. 다만, 미국에서는 올해 초 개도국 지위 문제를 제기하고 7월부터 논의를 본격화했다. 그동안 정부가 이해 당사자인 농민단체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농업통상 협상에서 농민단체들과의 대화에 여전히 인색하다. 이 점은 아쉽다. 트럼프가 하지 마라 해서 따라가는 듯한 모양새도 좋지 않다.

정부 안에 농업계를 대변하는 단위가 없다. 농림축산식품부도 개도국 지위 유지가 어렵다는 경제 부처 논리를 대변하기에 급급하다. 이런 실정이다보니 농특위는 뭐 하고 있나 하는 소리가 농민들 사이에서 나온다.
농특위에서 농민단체들의 반박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서 무슨 실익이 있겠나. 농업에서의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변화다. 이제까지 개도국형 농업이었다면 앞으로는 선진국 농업으로 이행하겠다는 선언 아니겠나. 그런데 이번에 내놓은 정부 대책은 급한 불 끄기에 머물러 있다. 현 농정 틀 안에 머물러 있다.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있고, 바로 그 점에서 농특위가 할 일이 있다. 앞으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면, 새로운 농정을 해야 한다는 게 분명해진다. 농정의 틀을 바꾸는 일이다.

무엇이 기존 농정의 문제라고 보나.
그동안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쌀농가 규모가 많이 커졌다. 축산의 규모화는 더 비약적이다. 하지만 소수 농가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그쳤다. 전체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기르지는 못했다. 농가 양극화가 아주 심해졌다. 축산 분뇨 등 환경문제도 크게 야기했다.

농특위가 생각하는 선진국 농업·농촌 모습이란.
단순하다. 유럽의 예를 보면, 농업 경쟁력이라는 게 시장 경쟁력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농가 소득의 절반이 국가가 농가에 직접 현금으로 지급하는 다양한 직불금으로 충당된다. 직불금 중심 농정이 선진국형인 것이다. 정부도 이번 (개도국 지위 관련) 대책에서 내년 공익형 직불금을 2조2천억원 편성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정도로는 우리 농정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더 확대하기 위한 시발점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공익형 직불금이 전체 농업예산의 50% 이상은 돼야 한다고 본다.

홍남기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월25일 “세계무역기구의 농업 부문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는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남기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월25일 “세계무역기구의 농업 부문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는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축산 농가를 야단칠 게 아니라 설득해야

우리 정부는 지금도 연 1조8천억원 정도의 직불제 예산을 운영하고 있다. 다만 대부분 금액이 쌀 가격 하락을 보전하는 용도(쌀 변동직불금)로 쓰인다는 한계가 있다. ‘농업은 공공재’란 가치에 뿌리를 둔 공익형 직불제는 경관 보전, 친환경, 동물 복지 등 공익적 농·축산에 종사하는 농가나 소농에 직불금을 지급한다. 대신 그에 상응하는 엄격한 준수 의무를 부과한다. 농식품부는 내년부터 공익형 직불제를 도입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기존 직불제 예산 총액 1조8천억원을 웃도는 2조2천억원의 공익형 직불제 예산안을 우선 편성했다.

최근 유럽 농정을 둘러본 것으로 안다. 농민단체와 환경단체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고 들었다.
공익형 직불금을 받는 농가의 역할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크더라. 환경을 파괴하고 동물 복지에 소홀하지 않은지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감당하기 쉽지 않아, 그에 따른 반발이 상당했다. 공익형 직불제라 하면, 자칫 농민들한테 돈을 더 주기 위한 수식어로 비칠 수 있다. 농민들도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공익 기여 직불제이다. 직불금을 받는 농민이 공익 행위에 기여한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자칫 소홀했다가는,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유럽과 비교하면, 우리 사회는 농업의 환경 파괴에 아직은 관대한 편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농민들이 데모하는 것을 봤다. 환경단체와 언론의 공격이 너무 심해 반발한 것이다. 프랑스 농민들의 슬로건은 ‘함께 변화하자!’였다. 환경단체의 염려와 지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충남 홍성을 가면 축사 근처 주민들이 악취 때문에 문을 열지도 못한다. 마을 하천이 오염됐다. 그렇지만 참고 살아간다. 이런 인내심이 얼마나 오래갈까. 머지않아 급격한 변화가 올 것이다. 공장식 축산을 지속가능한 축산으로 바꾸는 것이 미래 농정에서 아주 중요하다. 깨끗한 농촌 환경과 깨끗한 농촌 경관이 미래 농정의 기초이다.

어려운 문제다. 어떻게 풀어갈 생각인가.
더는 늦출 수 없다. 축산 농가를 야단칠 게 아니라 설득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소·돼지 많이 키우라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똥 악취 풍긴다고, 환경 파괴한다고 심하게 야단치면 농가에서 반발하지 않겠나. 친환경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미래를 생각해서 과감하게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쌀농가도 마찬가지다. 비료를 많이 써서 하천 오염시킨다고 갑자기 야단치면 어떡하나. 농가에서 따라올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

공익형 직불제 예산을 전체 농업예산의 50% 이상 편성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오해의 소지가 있다. 기존 예산을 그대로 놔두고 공익형 직불제 예산을 순수하게 증액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존 농업예산 구조를 바꿔 공익형 직불제 예산 몫을 키우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농민도 기득권을 일부 포기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다만, 정부가 더 보태서 농업예산을 전체의 4.1% 수준에서 5%대로 키우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농민 동의를 끌어낼 수 있지 않겠나. 다행히 농민단체들이 아직은 공익형 직불제 도입에 우호적이다.

대통령이 농민과 격의 없이 대화 나눈다면

박 위원장은 10월30일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9개 도를 돌아가며 ‘농정 틀 전환을 위한 100인 원탁회의’를 연다. “건국 이래 최초로 9개 도의 도지사와 농민, 소비자, 전문가, 공무원 등이 모여 농정 틀을 바꾸자고 선언하는 자리”로 만들려 한다. 12월 둘째 주에는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농정의 새로운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를 계획하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은 해마다 농업박람회에 참석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올 2월 농업박람회에서 13시간 동안 농민,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그런 전통을 만들면 좋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하루 종일 농민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농정 변화를 앞당길 수 있지 않겠나.”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 이후


“중장기적 대전환 앞둬”


미국은 올 1월 세계무역기구 이사회에서 개도국 지위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대만, 홍콩, 중국 등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들이 개도국 우대를 받는 것에 대한 기존 선진국 공통의 반발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거나, 주요 20개국(G20), 세계은행에서 고소득으로 분류한 국가, 세계 상품무역 비중이 0.5% 이상인 국가 등 네 가지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경제성장을 반영해 네 기준 중 하나에 해당하는 국가는 개도국 우대 혜택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개도국 지위를 누리는 곳은 모두 150여 개국에 이른다. 한국은 네 기준 모두에 해당하는 유일한 나라다. 한 가지 이상 기준에 걸리는 나라는 38개국이다. 중국은 일찌감치 발전 수준에 걸맞은 기여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한국은 농업에 한해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는데 쌀(513%), 마늘(360%), 인삼(222.8~754.3%) 등에서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는다면, 지금 진행 중인 관세 감축 협상에서 쌀·고추·마늘·양파·감귤·인삼·감자 등을 특별 품목으로 지정해 관세 감축을 하지 않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이번 선언에 따라 관세 감축이 불가피하게 됐다. 예를 들어 쌀 관세는 70% 감축률이 적용돼 154%로 크게 떨어지게 된다. 농업보조금의 큰 폭 감축도 불가피해졌다. 현행 1조4900억원인 보조금 허용 상한이 5년에 걸쳐 8195억원까지 줄어들게 된다. 우리나라는 감축 대상 보조금 대부분을 쌀 변동직불금으로 지출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서진교 선임연구위원은 “쌀 등 소수 핵심 품목을 보호하기 위해 설득력 있는 협상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며 “허용 보조금의 대폭 감축이 불가피한 만큼, 쌀 변동직불금에 의존하는 현행 농정을 중장기적으로 대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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