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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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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의 ‘데스 밸리’ 건네주는 뱃사공

고영하 엔젤투자협회장,

청년 창업가와 투자자 잇는 네트워크로 벤처 살리는 멘토
등록 2018-11-06 12:41 수정 2020-05-03 04:29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청바지를 즐겨 입는 고영하(66) 한국엔젤투자협회장은 창업하는 젊은이들의 멘토(스승)다.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 역정이 창업의 길과 일맥상통한다. 대학 다닐 땐 세 번 퇴학당하면서 감옥생활을 했고, 10여 년간 정치권에 몸담을 땐 새로운 ‘정치 창업’에 나섰다.

그가 요즘 답답함을 많이 호소한다. “정부가 말로만 혁신을 외치고 있어요. 전세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30%는 우리나라에서 영업을 못해요. 우리 법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거든요.” 10월30일 오후 서울 역삼동 한국엔젤투자협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연세대 의대 세 번 퇴학</font></font>대학을 졸업 못했다고 들었다.

세 차례 퇴학당했으니…. (연세대) 의대 본과 1학년 종강을 앞둔 1974년 1월의 일이다. 긴급조치 1호가 발동돼, 유신헌법 비판만 해도 처벌되던 시절이었다. 마침 휴강이라, 아이들한테 유신헌법에 대해 토론이나 해보자고 제안했다. 내가 사회를 맡았는데, 경찰이 금세 들이닥치더라. 같은 반 120명이 서대문경찰서로 잡혀갔고, 유신헌법 비판 발언을 한 6명과 나, 그렇게 7명이 구속됐다. 비상군법회의 1심에서 10년형을 받았다. 1년1개월 만에 석방됐는데, 그사이 학교에서 퇴학됐다.

두 번째 퇴학은.

1975년 2월 감옥에서 나와, 3월 학기에 곧바로 복학됐다. 그 무렵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여러 대학생이 감옥살이를 했는데, 연세대 학생들만 복학할 수 있었다. 당시 박대선 연세대 총장이 용기를 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달 만에 다시 퇴학당했다. (박정희 정권이) 5월에 박 총장을 쫓아내고, 복학생들을 다시 퇴학시켰다.

고영하 협회장은 이때 처음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과외 아르바이트도 하고 포장마차도 하다가, 1977년 정식 창업을 했다. 복학은 기약이 없었다. 베어링 같은 기계공구를 수입하는 오퍼상(무역상)을 열었다. 고속성장기여서 사업이 잘됐고, 돈도 제법 벌었다. 그런데 1979년 10·26 사건이 터졌다.”

그래서 의대생으로 돌아갔나.

‘서울의 봄’이라던 1980년 3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면서 두 달 만에 짧은 평화가 끝났다.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진상 보고 유인물이 서울에 뿌려졌는데, 내가 그 범인으로 지목됐다. 경찰에 붙잡힌 누군가가 “고영하가 뿌렸다”고 거짓 자백했던 것이다. 내 고향이 광주 아닌가. 무조건 사람 잡을 때였으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1년 동안 전국 거리와 식당 벽에 붙은 지명수배자 전단에 내 얼굴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세 번째 퇴학을 당했다. 회사도 망하고 빚만 짊어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의대생 꿈 접고 ‘정치 창업’했으나</font></font>

1981년 지명수배가 풀렸지만, 의대생의 꿈은 영영 사라져갔다. 직장생활을 몇 년 하다가 1984년 다시 오퍼상을 했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를 맞게 된다. 그는 “옛 동지들과 여러 차례 ‘정치 창업’에 나섰다.” 하지만 거듭 실패의 쓴맛을 본다.

‘정치 창업’이라니.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 두 김씨가 싸우면서 지지세력이 분열됐고,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선 이듬해인 1988년에 제정구, 유인태, 원혜영, 김부겸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다. 모두 정당활동 경험이 전혀 없는, 신출내기 정치 초년병들이었다. 그전까지 없던 새로운 정치에 도전했다. 정치의 물을 바꾸고 싶었다. 그게 ‘창업’ 아닌가.

두 차례 국회의원 출마도 했더라.

한겨레민주당으로 정치를 시작해 진보정치연합, ‘꼬마’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로 이합집산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1992년과 96년 두 차례 서울 노원구에 출마했다. 첫 선거에선 2천 표 차이로 떨어졌고, 두 번째도 2등을 했다. 2000년 정치에서 손을 뗐다. 나한테 정치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1995년 디제이(김대중)가 정계 복귀할 때 “왜 대통령 하려고 하나, 후계자를 키우면 얼마든지 정권 교체할 수 있다”고 대놓고 반대했던 전력도 있다. 공천받을 수도 없었고, 공천 신청도 하지 않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넷플릭스보다 먼저 스트리밍 서비스 </font></font>

그가 살아온 역정이 흥미진진하다. 평소 그를 알고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의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직선이 아닌 굴곡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리라. 하나의 단면으로 전달되지 않는 간단치 않은 속내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 뒤 인터넷 세상에 뛰어들었나.

1996년쯤 인터넷이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직감이 들었다. 1998년 젊은 기술인들과 작당했고, 그들이 먼저 ‘셀런’이란 회사를 창업했다. 인터넷티브이(IPTV) 셋톱박스를 만드는 회사였다. 나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2001년 합류해 이듬해 ‘셀런티브이’를 세웠다. 지금으로 치면 영화와 드라마를 스트리밍 서비스하는 넷플릭스 같은 회사다. 넷플릭스보다 훨씬 먼저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를 세웠던 셈이다. 2002년엔 미국 현지법인도 세웠다.

셀런티브이는 어떻게 됐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다. 정연주(KBS), 최문순(MBC) 사장 등을 만나, 셀런티브이와 지상파 3사의 합작회사를 만들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을 앞서가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했다. 그때 하나로텔레콤이 우리 회사를 인수해 세계 최초로 아이피티브이 서비스(하나티브이)를 시작했다. 하나티브이는 2004년과 2005년의 히트상품이 됐다. 그 회사가 2007년에 다시 에스케이(SK)로 넘어가, 에스케이브로드밴드로 통합된다. 나는 2008년까지 회장을 맡다가, 그만둔다.

하나로에서 에스케이로 회사가 넘어갈 때, 인생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뭘 할지 고민했다. 젊은이들과 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젊은이들이 나와 놀 수 있는 게 뭘까 궁리해보니, 그게 창업이었다. 그래서 젊은 창업가 7명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 경험과 네트워크로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 ‘고벤처포럼’의 출발이다. 판을 깔았더니, 친구들이 친구를 데려오고 또 소문을 듣고 스스로 찾아오더라.

고벤처포럼도 10년을 훌쩍 넘겼다.

2008년 10월에 시작했으니…. 매달 마지막 화요일에 여는데, 오늘이 그날이라 지금도 아래층에서 모임이 열리고 있다. 창업이 활성화하려면 창업가와 투자자가 만나는 생태계가 잘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우리 현실은 아주 척박하다. 고벤처포럼은 창업가와 투자자를 이어주는 네트워크 역할을 한다.

지금은 한국엔젤투자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고벤처포럼을 끌어가면서 창업 초기 자금을 공급하는 엔젤투자를 시작했다. 그 친구들한텐 투자받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 않나. 엔젤투자를 3년 하다보니,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엔젤투자자들의 협회를 만들자고 했다. 그래서 2012년 협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창업 생태계가 취약하니, 엔젤투자협회에서 할 일이 많겠다.

창업 생태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사람들이 잘 모른다. 자기 자금으로 소규모 사업을 시작해, 정부의 창업지원자금(최대 1억원)을 받아 창업하고, 엔젤투자를 받아 시제품을 만들고, 그다음 5억~10억원을 투자받아 제품을 양산하고, 그래서 매출과 이익이 가시화하면 벤처캐피털에서 투자에 나서는 단계를 거친다. 미국에선 이른바 슈퍼엔젤 투자자들이 양산 단계의 5억~10억원 투자에 나서는데, 한국에선 그 과정이 구멍 나 있다. 우리 창업가들에게는 ‘데스 밸리’(죽음의 계곡)다. 그 죽음의 계곡을 건널 수 있는 투자 재원을 마련해주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래서 길을 찾았나.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20조원인데, 돈이 많이 샌다. 교수들이 예산 집행을 결정하는 게 큰 문제다. 물정을 모르니, 실패가 많다. 엔젤투자자들이 팁스 프로그램 운영사를 맡아 투자처를 찾아내고, 정부 연구개발 예산과 창업지원자금을 보태 10억원까지 ‘슈퍼엔젤’ 투자에 나서도록 했다. 2013년부터 기술벤처를 키우는 팁스(TIPS)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안목 있는 투자자들이 먼저 투자한 사업에 예산을 지원하도록 정부를 설득한 것이다. 그렇게 역량 있는 엔젤투자자 44명이 그동안 키운 기술벤처가 550개에 이른다. 2천억원을 투자했는데, 벌써 8천억원의 민간 후속 투자가 이뤄졌다. 대한민국의 미래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자부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카풀과 택시의 갈등, 정부가 풀어야</font></font>

그는 최근 ‘소통과 협력의 플랫폼’이란 모임을 만들고 있다 했다. 급속한 기술 변화의 현장에서 일할수록 “심한 답답함을 느낀다”며 “책임 있는 정부가 책임 있는 소통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카카오 카풀 사업 진출을 놓고 택시와의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다. 뭐가 잘못됐나.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동남아시아를 장악한 그랩(차량 공유 서비스 회사)에 이어 최근 우버에 투자했다. 중국의 디디추싱과 인도의 올라에도 투자했다. 그랩에는 현대자동차와 에스케이, 네이버, 미래에셋도 투자했다. 왜 그럴까? 머잖아 택시산업은 이동서비스 전반을 제공하는 모빌리티산업으로 변하고, 자율주행차 시대가 열린다. 카풀 업자나 피해를 입는 택시의 처지에서 문제를 보면 답이 안 나온다. 나무의 관점이 아니라 숲의 관점에서 보자.

누가 그런 일을 해야 하나.

당연히 정부다. 국가적으로 이런 기술이 필요하다면 갈등 해결 프로그램을 작동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이야기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부가 이해당사자들을 모아서 설득할 것은 설득해야 하는데, 못 풀고 있다. 네이버나 카카오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거다. 그것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고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두 손 두 발을 꽁꽁 묶어서야 되겠는가. 택시기사들의 생존권을 충족할 해법도 진정성 있게 찾아야 한다. 서로 머리를 맞대면 못하겠는가. 대화를 시작하자.

정부의 혁신성장에도 비판적인데.

지금은 얼치기 혁신에 멈춰 있다. 무엇이 혁신성장인지 다들 잘 모른다. 제대로 하려면, 혁신의 안전망부터 만들어야 한다.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하는 거다. 그래야 안심하고 혁신에 도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보유세를 올리고 누진세를 강화해야 할 텐데, 정부가 결단을 못 내리고 있다. 그러면서 원격의료와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 소유 제한)는 무조건 금지 원칙을 고집하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보지 못하는, 의사들과 기존 은행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꼴이다.

고영하 협회장은 “이제는 상호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쌓아야 한다”면서 ‘옛 동지’들이 끌어가는 진보 진영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공통의 과제를 놓고 서로 소통하면서 신뢰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봤나. 보수와 마찬가지로 진보도 기득권의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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