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봉이 1925년 12월7일치로 작성한 비밀편지가 있다. 35살 때였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었던 시기다. ‘당 내부에 대한 정리 문제’라는 제목이 달린 24쪽 분량의 육필 문서였다.1 제목이 말해주듯이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전하는 극비 문서였다. 비밀결사의 긴급한 현안을 다루고 있었다.
잉크를 찍어서 펜으로 썼다. 어쩌면 만년필 글씨일 수도 있겠다. 국한문 혼용체의 달필이다. 잘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유려한 글씨체였다. 향리(태어나서 자란 곳)인 경북 안동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보통학교와 중등과정의 중동학교를 마쳤으며, 고등교육기관인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사람다웠다. 근대교육 시스템이 채 갖춰지지 않았던 식민지 초기 1910년대였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수할 수 있는 최상급 교육을 받은 셈이었다.
수신처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누구에게 보냈는지를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코민테른 동양부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옛 코민테른 문서관에서 발굴된 이 문서는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 1925년 창립 이후 조선공산당의 내막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내부 기록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당 문서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이 문서는 그러한 사료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다. 비밀결사의 최고 책임자가 쓴 것이니만큼 최상급 비밀정보를 다루고 있다. 어떤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내밀한 정보가 담겼다. 그뿐인가. 이 문서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긴장된 내면 의식과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조선공산당 1차 검거 사건 와중에 작성</font></font>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비밀결사의 존재를 탐지했기 때문이다. 발단은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일어난 한 집단 폭행 사건에서 비롯됐다. 폭행 피의자로 지목된 청년들의 집을 수색하던 신의주 경찰이 뜻밖에도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의 비밀문건 뭉치를 발견했다. 국외 통신을 맡던 비밀 연락 기구가 우연한 사건으로 적발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공산당 1차 검거 사건이 터졌다.
첫 검거는 일주일 전인 그해 11월29일 밤에 일어났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이 자택에서 체포됐다. 이튿날 새벽 7시에는 주종건, 유진희, 임원근, 권오설이 피검됐다. 다행히 그날 오후 주종건과 권오설이 일시적으로 석방됐다. 두 사람은 바로 잠적했다. 이튿날 12월1일에는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한양청년연맹, 신흥청년동맹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검거는 지방 도시로 확대됐다. 경기도 강화에서 박길양이, 경상남도 마산에서 김상주가 체포됐다. 12월3일에는 조리환이 체포됐다. 이날 체포망이 공산당 핵심부까지 치고 들어왔다. 책임비서 김재봉과 중앙집행위원 김찬의 거처에 가택수색이 들어왔다.2
김재봉은 긴장했다. 다행히 가택수색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경찰 체포망에 포함된 게 틀림없었다. 비밀편지에 쓴 것처럼 “모든 것이 위기일발에 걸렸다”고 봐야 했다. 즉시 잠적했다. 일상생활을 중단하고 평소의 활동 공간에서 벗어나야 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10여 명이 검거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에는 당 중앙간부(유진희)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공산청년회 구성원에게 위험이 집중되고 있었다. 검거망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지 알 수 없었다. 사태의 진전을 날카롭게 주시해야만 했다.
여차하면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현안이 쌓여 있었고, 유사시에 대비해 당무를 이어갈 후계 간부진도 구성해야 했다. 잠적하거나 망명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고 원활한 장소 이동을 위해서는 돈이 들었다. 한 푼 준비도 없이 무작정 잠적한,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에게는 긴급히 자금을 제공해야 했다.
김재봉이 경찰에게 쫓기는 위험 속에서도 비밀편지를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돈 때문이었다. 그는 편지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물질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긴급히 도망쳐야 하는 동지들에게 여비를 주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당 규율 위반 반대파에 초강경 제명 조처</font></font>
잠적 중에도 일은 해야 했다. 처리해야 할 가장 긴급한 당무 가운데 하나는 당내 분파에 관한 것이었다. ‘김약수 그룹’이 말썽이었다. 김약수 그룹이란 공개 사상단체 북풍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 공산주의 단체로 ‘북풍파’라고도 했다.
되돌아보건대, 1925년 4월17일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기 전에도 조선 사회주의운동은 활발히 전개됐다. 그 주역은 국내외에 걸쳐 존재하는 공산주의 그룹들이었다. 국외에는 상해파·이시파·국민의회파가 있었고, 국내에는 화요파·서울파·북풍파·상해파가 포진했다. 각 공산주의 그룹은 조직·정치적 공통성에 입각해서 형성된 비밀결사였다. 자체의 중앙기관과 세포단체가 있고, 독자의 조직적 규율을 갖춘 조직체였다. 또 독자의 정치사상과 정책을 갖춘 정치세력이었다.
단순화해 말하면 조선공산당 창립은 두 개의 공산그룹이 연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재봉이 속한 화요파와 김약수를 위시한 북풍파가 연합한 게 곧 조선공산당이었다. 하지만 화학적 결합이 아니었다. 두 그룹은 따로 놀았다. 공산당이 창립된 뒤에도 그랬다. 혼연일체의 동지적 연대감이 아니라 경쟁심과 호승심이 두 그룹 구성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북풍파 공산그룹은 자파의 이익을 늘리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임원진을 구성할 때 자파의 구성원인 서정희가 반드시 상임 총무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내에서 자파 인원이 화요파보다 한 사람 적은 것을 수정하기 위해 임시 당대회를 열 것을 요구했다. 김재봉이 보기에 이 요구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위 혁명당이어야 할 공산당을 마치 연립내각 같은 느슨한 연대기구로 만들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당 규율을 해치는 행위도 용서할 수 없었다. 공개 대중단체의 집회에서 비당원이 여럿 섞인 자리인데도 당내 기밀 사항을 입 밖에 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뿐인가. 당내 논의에 앞서 자파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만 사전 논의를 하곤 했다. 당보다 자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규율 위반 행위였다.
김재봉은 북풍파와의 결별을 각오했다. 당에 가입한 북풍파 인사는 3개 야체이카(세포단체)에 속한 15명뿐이었다. 그들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조직 기반이 와해될지도 모르는 강경한 대책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코민테른 지부 승인 뒤 자신감 반영</font></font>
강경한 카드를 꺼낸 데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코민테른의 1925년 9월 결정서가 조선공산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해 4월17일 설립된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사실상 승인한다는 결정이었다.3 모스크바에 파견한 대표자 조봉암이 코민테른 동양부의 보이틴스키의 협력을 받아서 이뤄낸 외교적 성과 였다.
경성 주재 소련영사관에서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는 9월 결정서를 접수한 이후 조선공산당의 자신감이 묘사돼 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신은 사라지고, 노동자적인 분위기가 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유쾌해졌고, 어떤 분쟁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4 또 하나는 공산당의 조직 역량에 대한 자긍심이었다.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세포단체가 전국에 33개 있고, 그에 망라된 당원 수는 133명이라고 집계했다. 그에 더해 후보 당원 49명이 있었다.5
김재봉은 자신했다. 당원 대다수가 노동자단체, 청년단체, 사상단체와 신문사·잡지사 등 언론기관에 소속돼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전국 각지의 사회단체 600여 개를 동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역량도 있었다. 이들의 수는 더 많았다. 1926년 2월 현재 공청의 세포단체는 63개였고, 그에 망라된 공청 회원은 284명, 후보 회원은 229명이 었다.6
<font size="4"><font color="#008ABD">체포 전 조직한 후계자는 강달영</font></font>
김재봉을 필두로 하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부의 결심은 단호했다. 이 사안으로 혹여 코민테른에서 불리한 조처가 내려지더라도 감내하기로 했다. 만약 코민테른이 15명 제명을 문제 삼아서 코민테른 지부 승인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재봉은 이왕 결성된 조직을 잘 발전시켜서 조선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성심껏 전진할 뿐이라고 썼다.
이 비밀편지를 쓴 뒤 얼마 안 돼 김재봉에게 불행이 닥쳤다. 1925년 12월19일 밤이었다. 비밀편지를 쓴 지 12일이 지나서였다. 경성 돈의동에 잠복 가옥을 정한 채 당무에 여념이 없던 김재봉은 어딘가에 전화하기 위해 종로에 나왔다가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누구에게 무슨 전화를 하려고 위험을 무릅썼던 것일까.
그래도 천만다행인 게 있었다. 체포되기 며칠 전, 후계 집행부 조직에 성공했다. 체포와 망명 탓에 결원이 된 중앙집행위원을 보선했던 것이다. 후계 책임비서로는 경남 진주의 열렬한 혁명가이자 사회주의자인 강달영을 선정했다. 의외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게 강점이었다. 경찰의 주목을 비교적 적게 받는 점, 당 내외 반대파 공산그룹의 반감을 적게 사는 점, 의지가 강하고 업무 능력이 탁월한 점 등을 고려했다. 책임비서 김재봉은 붙잡혔지만, 후계자 강달영의 진두지휘 아래 비밀결사의 혁명 사업은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 었다.
<font size="2">참고 문헌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 책임비서 金在鳳, ‘黨 內部에 대한 整理問題’, ,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7 л.20-43, 1925년 12월7일.
2. 고공청중앙집행위원 權五卨·金東明, ‘고공청 제13호, 본회 및 조공당 관계자 被逮사건 顚末’, , 3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2 л.80-84, 1925년 12월31일.
3. The last resolution of the presidium of the ECCI on the Korean question,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4 л.53-56, 1925년 9월.
4. Мильнер(밀러), тов.Серегину(세레긴 동무에게),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0 л.151-154, 1925년 11월13일.
5. 김재봉, 앞의 글, 20~21쪽.
6. Ответств.ген.секретарь Коркомсомола(고려공청 책임비서), В ИКИ КИМ no.17 Общее положение ячеек комсомола, 28/Ⅱ-26 г.(제17호, 국제공청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공청 야체이카 일반 상황)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140.</font>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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