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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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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 지리산 밤 누굴 위해 100㎞를 걸었나

걸으며 기부하는 ‘옥스팜 트레일워커’ 지리산 100㎞ 종주기…

다음엔 ‘DMZ 트레일러닝’ 도전을? 
등록 2018-05-23 10:36 수정 2020-05-03 04:28
고스트버스터즈 팀이 출발 전날 “파이팅!” 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고스트버스터즈 팀이 출발 전날 “파이팅!” 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5월13일 새벽 3시. 이어폰에서 정인의 이 흘러나왔다. 남북 평화협력 기원 평양 공연 ‘봄이 온다’에서 들었던 은 분명 감동적이었다. 남과 북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함께 올라, 정상에서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줬다.

하지만 어둠과 비구름에 갇힌 지리산에서 밤비를 맞으며 들으니 희망의 찬가는 레퀴엠으로 바뀌었다. 웃음기가 사라질 줄만 알았지, 신음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한동안 미소를 못 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못 볼 줄은 몰랐다.

비 내리는 밤, 랜턴은 꺼지고

“휴우.”

그(남자3)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물리적 이동으로 교환하는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21시간을 80km로 바꿨다. 눈앞에 다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남자3은 지난달 말 일본 후지산에서 열렸던 후지산 울트라 트레일 170km 대회를 38시간51분33초에 주파했다. 그는 후지산 대회 이야기를 하며, 중간에 상한 달걀을 잘못 먹는 바람에 식중독에 걸려 후지산 한가운데서 ‘헛것’을 보았다며 씨익 웃었다. 나(남자2)는 이 사람이 ‘허깨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계속 내린 비와 반복된 오르막길 앞에서는 한숨지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나(남자2)에게는 눈앞에 오르막길이 마치 벽 같았다. 몸이 젖은 빨래처럼 무거웠다. 손발은 퉁퉁 부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발바닥엔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픈데,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지는 알 수 없었다. ‘무감각’과 ‘통증’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상황은 불편했다. 설상가상으로 헤드랜턴이 꺼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지난해 1천 루멘 밝기의 랜턴이 어두워서 고생했다는 선배(여자1)의 이야기를 듣고, 1만 루멘의 랜턴을 주문했다. 물건을 받고 어두운 방에서 켜본 나는 우리 큰어머니처럼 기뻐했더랬다(큰어머니는 기분이 좋으면 ‘전깃불이 밝아서 님 보기 좋다’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신다).

밝기가 10배 밝아지면 그만큼 지속 시간이 짧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 나는 ‘문송’(문과라서 죄송)했다. 나와 똑같은 브랜드의 1만 루멘 랜턴을 산 선배도 곧 불이 꺼졌다. 4명이 한 줄로 걷던 대열을 포기하고 2인 1조, 두 조로 나눴다.

내 걸음이 느린 진양조장단이라면 초인(남자3)의 걸음은 경쾌한 왈츠였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도 걸음만큼은 빨랐다. 나는 그의 랜턴 불빛에 의지해 걸어야 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따라붙었다. 보폭을 맞춰 걷다보니 뒤따라오던 남자1과 여자1이 보이지 않았다. ‘왈츠 리듬을 중모리 정도까지 늦춰주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90km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친다는 초인의 발목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빗물에 산길은 질어서 발이 진흙 속으로 빠졌다. ‘슉슉’ 소리가 났다. 물웅덩이에도 셀 수 없이 빠졌다. 발자국마다 마음이 주저앉았다. 나도 모르게 탄식 섞인 신음이 수시로 나왔다.

“재호씨, 운동 좋아해? 우리 내년에 100km 옥스팜 트레일워커 참가하려고 하는데, 함께하지 않을래?” 지난해 겨울 같은 팀의 선배(여자1)가 내게 물었다. 내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되도록 많은 회사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하던 때여서 별 망설임 없이 함께하겠다고 했다. 선배는 다른 팀의 선배(남자1)와 지난해 대회에 참가했다가 66km에서 포기했다. 이들은 올해 봄을 갈아넣어서라도 두 번째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팀 고스터버스터즈의 탄생

그렇게 팀 ‘고스터버스터즈’가 결성됐다. 여자1이 그맘때 좀 재미있게 본 영화 제목을 딴 팀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남자 둘, 여자 둘로 구성된 팀이었지만 훈련 과정에서 부상자(여자2)가 생겼다. 그렇게 영입된 사람이 초인(남자3)이었다.

옥스팜 트레일워커는 1981년 홍콩에서 처음 시작한 이벤트다. 옥스팜은 “100km를 걸으면서, 물을 얻기 위해 날마다 수십km를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선 팀(4명)당 50만원의 기부금을 모아야 한다. 올해 참가자들이 모금한 1억5200만원은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 캠프 현장 구호활동과 자립 지원 등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1월19일 개인 훈련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몸만들기에 들어갔다. 첫 훈련지는 설악산이었다. 강원도 양양 오색약수터에서 출발해 설악산 대청봉을 찍고 속초 방향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걸었는데도 25km가 채 되지 않았다. 100km는 얼마나 긴 거리인지 가늠이 안 됐다. 오대산, 북한산을 차례로 다녀왔다.

3월에 접어들면서는 본격적인 팀 훈련을 시작했다. 3월11일 42km, 18일 42.2km, 4월1일 50km를 걸었다. 주로 북한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을 걸었다. 하지만 50km 이상은 걸어본 적이 없었다. 밤새 걸어본 건 10년 전 냉천리(강원도 고성군)에서 한 ‘100리 행군’이 마지막이었다. 밤새 100km를 걷는다는 것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붕붕, 방귀 소리는 엔진이 되어
옥스팜 트레일워커 대회 코스 지도와 코스 정보.

옥스팜 트레일워커 대회 코스 지도와 코스 정보.

5월12일 오전 6시, 드디어 출발점에 섰다. 문제는 날씨였다. 출발과 동시에 비가 내렸다. 고즈넉한 섬진강 위에 무수한 동심원이 그려졌다. 전남 구례 산수유 자연휴양림(12km)을 지나 지리산 노고단 대피소(25km)까지 단숨에 올라가는 급경사에선 아예 비구름 속을 걸었다.

숲길을 헤치며 지리산 남부탐방안내소(38km)로 내려오는 길에서는 빗물에 미끄러워진 돌을 잘못 디뎌 왼쪽 발목을 삐었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부분에서 발을 헛디뎌 오른쪽 무릎이 꺾이기도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아서 계속 걸을 수는 있었지만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네 번째 체크포인트가 있는 구례 운조루 유물전시관(48km)에서 서포터즈에게서 음식물을 공급받고, 젖은 옷과 신발을 갈았다. 한 시간 정도 쉬고 다시 길 위에 섰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언덕길과 섬진강 둑길을 수차례 번갈아가며 걸어야 했다. 섬진강 둑길에는 달팽이와 개구리가 무수히 많았는데 밟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었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여도 몇몇 개구리는 발밑으로 뛰어들어왔다. 달팽이 집이 부서지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리면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마지막 10km를 걸으면서 느낀 고통은 앞서 90km를 걸으면서 느낀 고통의 몇 배는 될 것 같았다.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도착점에 마음도 지쳐갔다.

남자1은 “안쪽 무릎, 바깥 무릎 다 써서 이제 쓸 무릎도 남지 않았다”며 등산용 지팡이에 반쯤 의지해 겨우 걷고 있었다. 거의 네 발로 걷는 모양새였다.

남자3은 90km를 지나면서 확실히 표정이 밝아졌다. “음악을 틀어달라”더니 왈츠의 삼박자보다 더 경쾌한 이디엠(EDM)의 두 박자를 연상케 하는 걸음으로 시야에서 총총 사라졌다.

여자1은 “난 여자 10등 안에 들어야겠어”라고 뇌까리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결국 여자1은 여덟 번째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우리는 여자1을 “여팔”로 부르기로 했다.

나는 앞서가는 둘을 따르지 않고 남자1과 함께 천천히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일부는 괄약근의 힘 조절이 되지 않는지 가죽피리를 불며 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갔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섹스팜’
아이티 대지진 구호 현장에서 성매매를 한 옥스팜 직원을 규탄하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들고 결승점에 들어서고 있다(왼쪽). 고스트버스터즈 팀과 서포터즈가 함께 결승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아이티 대지진 구호 현장에서 성매매를 한 옥스팜 직원을 규탄하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들고 결승점에 들어서고 있다(왼쪽). 고스트버스터즈 팀과 서포터즈가 함께 결승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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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e on sexfam’(부끄러운 줄 알아라, 섹스팜)

결승점이 보이자 나는 배낭에서 위와 같은 문장이 쓰인 티셔츠를 꺼내 들었다. 2010년 강진으로 31만 명이 숨진 아이티 구호 현장에서 옥스팜 직원들이 성매매를 한 사실을 규탄하기 위해 준비한 티셔츠였다. 옥스팜 직원의 비위 사실은 훈련을 시작한 뒤인 2월9일 영국 의 보도로 알려졌다. 후원금과 참가비를 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참가를 하되 규탄 문구가 담긴 티셔츠를 입고 결승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구호활동을 하는 국제기구의 일탈은 비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부 문화가 위축되지는 않기를 바랐다. 국제구호단체가 불법과 부도덕한 일로 기부 문화를 위협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결승점은 24시간56분12초에 통과했다. 전체 팀 중 11등이었고, 남녀 혼성팀 중에서는 무려 3등이었다. 그제야 동이 트면서 하늘이 밝아왔다.

결승점에 서서 다시는 100km를 걷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서울로 돌아와 일상에 복귀하니 비 내리는 지리산의 밤공기가 문득문득 그립다. 인터넷에서 오는 9월에 열리는 ‘디엠지(DMZ) 트레일러닝 대회’를 검색하고 있는데, 선배가 묻는다. “디엠지 대회 나가볼래? 참가비 줄게.” 솔깃하다.

구례=이재호 기자 ph@hani.co.kr※마지막으로 고스트 버스터즈팀의 도전을 응원하고, 선뜻 기부금을 보태준 분들의 이름을 남긴다. 함께 끝까지 걸어준 팀과 팀의 완주를 도와준 서포터즈(레니, 이경하, 정은경)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김노경 김소윤 김성래 김양희 김종철 김지야 류현정 박수지 베베 박희수 송현순 심지연 양민영 에드워드 유명숙 이경하 이슬기 이안 이연아 장미 정민영 정은경 최연실 허수영

***“내 청춘에 죄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가슴 뛰는 도전을 시작합니다. 심신의 한계 때문에 규칙적으로 찾아뵙기 어렵다는 점과 끝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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