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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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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브라이틀링시의 전투를 촉발했나

어떤 동물은 입고 먹는데, 왜 어떤 동물은 사랑할까

동물 차별 대우의 기원은 우리 몸에 있다
등록 2018-02-17 08:57 수정 2020-05-03 04:28
영국 런던 동쪽의 항구도시 브라이틀링시에서 일어난 시위는 동물을 위한 대중집회 중 가장 강력했다. 사람들을 이끈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위키미디어코먼스

영국 런던 동쪽의 항구도시 브라이틀링시에서 일어난 시위는 동물을 위한 대중집회 중 가장 강력했다. 사람들을 이끈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위키미디어코먼스

이 모든 것은 어린 양의 얼굴 때문이었다.

1995년 1월 영국 잉글랜드 동부의 작은 항구도시 브라이틀링시. 사람들이 울고 소리치고 바닥에 드러눕고 피켓을 흔들었다. 화물차가 가는 길목을 점거하고, 운전대를 탈취한다며 바퀴를 타고 올랐다. 그해 10월까지 수천 명의 시위대가 도로를 점령했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위해서!

시위대가 분노했던 건 영국 전역에서 가축을 싣고 브라이틀링시 항구로 가던 화물트럭 때문이었다. 트럭 짐칸에는 하얀 양들이 빼곡히 실려 있었다. 논쟁적인 동물도 있었다. 송아지였다.

금세기 최고의 ‘동물을 위한 전투’
송아지들이 고기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송아지의 거처는 1980~90년대 한 마리씩 들어가는 나무 울타리에서 최근에는 공간도 넓어지고 마당도 있는 등 동물복지적으로 일부 개선됐다(위). 동물을 인도적으로 대하는 사람들(PETA) 제공

송아지들이 고기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송아지의 거처는 1980~90년대 한 마리씩 들어가는 나무 울타리에서 최근에는 공간도 넓어지고 마당도 있는 등 동물복지적으로 일부 개선됐다(위). 동물을 인도적으로 대하는 사람들(PETA) 제공

화물트럭 짐칸에 양이 실려 있다. 페이스북 ‘브라이틀링시의 전투’

화물트럭 짐칸에 양이 실려 있다. 페이스북 ‘브라이틀링시의 전투’

현대 동물보호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된 (1975)에서 철학자 피터 싱어가 금세기 가장 끔찍한 고기로 묘사한 게 바로 송아지고기(veal)다. 어미 소에게서 태어나자마자 송아지는 몸을 돌릴 수도 없고 짚조차 깔리지 않은 나무 울타리에 혼자 갇힌다. 연한 육질을 위해서다. 어미 젖도 받아먹지 못한다. 철분을 영양소에서 제외해 고기의 빨간색을 빼내려는 것이다. 그리고 송아지는 16주 뒤에 도축된다. 비인도적인 사육 방식이 논란이 되면서 동물복지 선진국인 영국은 1990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송아지 사육을 금지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송아지는 우유의 부산물이다. 우유를 얻기 위해 인공수정을 하면 젖소에서 송아지가 태어난다. 송아지 고기를 못 만들게 된 축산업자들은 살아 있는 송아지를 유럽 대륙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동물단체인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RSPCA) 등은 살아 있는 동물 수출을 반대하는 캠페인으로 맞대응했다. 양도 문제였다. 프랑스는 양고기를 선호하는 나라다. 영국에서 기른 양이 프랑스로 수출돼 도축하면 ‘프랑스산 양고기’가 되었다. 영국 축산업자 편에선 고기를 수출하는 것보다 짭짤했다. 그때까지 영국 법률은 살아 있는 가축을 24시간 이상 운송하는 것을 금지했다. 물과 먹이 없이 이어지는 가축 운송은 동물에게는 생명을 건 여행과도 같다. 동물단체는 최대 운송 시간을 24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라고 요구했다. 사회적 압력이 거세지면서 메이저 운송업체는 운송을 포기했다. 영국항공은 화물기에 양을 태워 싱가포르로 간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하루도 안 되어 도축용 동물의 국제운송을 금지한다고 발표할 정도였다. 이제 살아 있는 가축의 운송을 자처한 회사는 로저 밀스 정도밖에 없었다. 이 회사가 뜨거운 여론을 피해 잉글랜드 서부의 작은 항구도시로 수출항을 바꿨고, 급기야 여기서 저항이 폭발했다.

시위대는 지칠 줄 몰랐다. 영국인들은 이 시위를 ‘브라이틀링시의 전투’라고 했다. 영국 사회는 동물복지 이슈의 파급력에 놀랐고, 시위대의 주류가 동물보호단체나 환경단체가 아닌 것에 더 놀랐다. 영국 방송 《BBC》의 린 윌슨 기자는 ‘전투 15주년’을 맞아 2010년 2월에 쓴 기사에서 브라이틀링시의 전투는 다른 시위와 아주 달랐다고 했다.

“사우스요크셔의 광부 파업 등 수많은 시위 현장을 취재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여성과 어린이, 유모차를 끈 엄마, 연금을 받는 노인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온 건 처음 봤다. 직업적 활동가와 함께 전선에 서서 분노했고, 때로는 폭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위대의 주류는 비이민자 중산층 영국인이었다.

동물 차별 대우의 기원

정치생태학자 테드 벤턴은 이듬해 에 이 투쟁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시위의 주요 참가자들이 “경찰과 다투다가 뜨거운 베이컨말이를 허겁지겁 삼키려고 휴식하는” 사람들이라는 언론 기사를 인용하며, 대중의 저항이 동물 그 자체에 이르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여론조사도 시민들이 을 읽고 행동한 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당시 영국 일간지 조사에 따르면, 68%가 살아 있는 가축의 수출 반대는 지지했지만, 동물 도축이 옳지 않다고 답한 이는 11%에 지나지 않았다.

브라이틀링시의 전투는 시민들과 동물단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긴 것은 아니다. 시위가 시작되고 열 달이 흐른 10월30일, 로저 밀스는 브라이틀링시 항구를 통한 수출 포기를 선언했다. 런던 남쪽 도버로 수출 터미널을 바꾸었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시민은 없었다.

사실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모순적이기 그지없다. 똑같은 생명인데, 어떤 동물은 먹고, 어떤 동물은 입으며, 어떤 동물은 손톱으로 눌러 죽이며, 어떤 동물은 이불 속에 데리고 함께 잔다. 생명 자체로 본연의 가치를 지닌다는 ‘동물권’ 이론이나, 동물도 고통을 느끼므로 고통을 줄여줄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동물복지’ 이론은 인간의 모순적 태도 앞에선 공허한 철학적 구호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순적인 인간 본능에 발을 딛고 질문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 왜 유기농 간식을 먹는 당신의 개는 어미를 그리워하는 송아지보다 특별한가? 인간은 어떤 동물에 반응하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이론은 인간은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에 더 잘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바닷가재나 갈치의 고통보다는 개나 돼지의 고통을 더 잘 상상할 수 있다. 신체의 감각기관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신체기관은 ‘눈’이다. 어떤 동물의 눈은 인간을 사로잡는다. (반면 바닷가재나 갈치, 이구아나의 눈은 평면적이어서 감정적 호소력이 없다. 바닷가재의 눈을 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나?) 인간은 동물의 눈을 보고 동물도 인간의 눈을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사로잡는 동물들은 인간의 눈빛을 주시할 줄 안다는 거다. 서로의 시선에 반응하면서 인간과 동물은 교감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물론 ‘흑역사’도 있다. 교감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인간은 인위적으로 다양한 품종의 개를 만들었다. 시추 같은 개는 귀여워 보이라고 눈을 크게 만들어서, 늙으면 거의 안구 질환을 앓는다. 일종의 유전병이다.

우리는 어떤 동물에게 끌리는가

영국 옥스퍼드대의 동물지리학자 제이미 로리머는 좀더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인간에게 유독 관심과 공감, 보호를 일으키는 ‘카리스마’가 동물에게 있고, 인간은 그런 동물에게 더 잘 반응한다고 말한다. 종 보전 캠페인이나 야생보호 정책도 주로 침팬지, 판다, 사자, 코끼리 등 ‘카리스마 종’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첫째는 생태적 카리스마다. 인간은 육상동물이며 두 발로 걷고 시각으로 대부분 정보를 받아들인다. 반면 지구 자기장을 감지하는 능력이나 후각, 청각은 제한적이다. 따라서 자기와 비슷하게 감각기관을 진화시켜온 종에 더 영향을 받을 것이다. 둘째는 미적 카리스마다. 인간은 귀엽고 멋있는 종을 좋아한다. 영장류의 특성상 자동으로 얼굴을 보는 습성이 있어, 매력 있는 얼굴을 가진 종이 카리스마가 있다. 이를테면, 고양이는 인간의 희로애락 중 ‘희’와 ‘락’의 얼굴을 가졌다. 성내도 귀엽고, 슬퍼해도 앙증맞다. 인터넷에서 고양이 얼굴을 보는 ‘무선랜 집사’가 늘어나는 이유다. 셋째는 신체의 카리스마다. 동물과 마주치고 때론 만짐으로써 인간은 영향을 받는다. 누구나 ‘에피파니’(평범한 사건이나 경험에서 직관적으로 진실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가 있다. 동물과 눈빛을 교환하며 직관적으로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것 같은 느낌, 세상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갑자기 조화를 이루는 순간. 많은 동물운동가나 환경운동가는 이런 경험이 자신을 회심하게 했다고 고백한다.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 저벅이는 경찰의 구두 소리, 시위대의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는 브라이틀링시의 항구. 그때 덜컹거리며 나타난 화물트럭의 뒤칸에 어린 양의 얼굴이 삐죽이 보였을 것이다. 마치 1980년대 포승줄에 묶인 한 학생이 재판정을 나오며 외친 ‘민주주의’와 비장한 얼굴이 찰나에 대중에 각인되어 죄책감을 일깨웠듯이, 어린 양의 얼굴과 침묵도 그랬을 것이다.

남종영 편집장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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