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라 쓰요시(34·가명)는 10년 동안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탈 수가 없었다. 누에고치처럼 몸을 웅크리고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스스로를 가뒀다. 휴대전화 설계·제조 업체였던 첫 직장에서 만난 상사는 “조직폭력배 같은 사람”이었다. 툭하면 화를 냈다. 고칠 수 없는 제품을 들이밀고는 “빨리 고치라”고 윽박질렀다.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왔다. 그로부터 10년은 암흑기였다. 가족의 지원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세월이다.
1년 전부터 그는 다시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됐다. 히키코모리 청년의 사회 참여를 돕는 비영리법인(NPO) 문화학습협동네트워크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직업체험을 하면서 시작된 변화다. 지금은 문화학습협동네트워크의 정보기술(IT) 사업 담당자로 일한다. 이하라는 “지하철을 타거나, 사람과 소통하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히키코모리와 니트 청년 150만 명얼굴 표정에 생기가 도는 사람은 이하라 혼자였다. 이하라 옆에 앉은 20대 청년 6명은 낯선 한국 기자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거나, 고개를 떨궜다. 히키코모리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6개월짜리 직업체험 연수 프로그램에 갓 참여한 청년들이었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4~5년 동안 히키코모리로 살았다는 가쓰오(가명)는 눈을 감은 채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노리코(가명)는 취직시험에 몇 번이나 합격하고도 자신감이 없어 출근을 포기했다고 한다. 아유미(가명)는 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렸다. 20살 때 친구와 크게 싸웠던 상처를 이야기하는 내내 아유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아키(가명)는 사람한테 담을 쌓은 지 5년이 넘었다. 사회에 대한 절망감은 없다.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신”이 절망스러울 뿐이다.
“한국에선 청년들의 마음이 크게 이슈가 되진 않죠?” 1990년대부터 도쿄 인근의 미타카시에서 청년 지원 활동을 해온 사토 요사쿠 문화학습협동네트워크 대표는 물었다. 그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선 청년실업이나 일자리 문제보다도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청년들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가 중요한 화두”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는 70만 명, 자발적·비자발적 취업 포기자를 의미하는 청년 니트족은 80만 명으로 추산된다. ‘사회 밖 청년’이 어림잡아 150만 명이 넘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2005년부터 민간단체, 학교, 지방자치단체 등이 연계해 니트족 등 청년 취약계층에게 진로 상담, 취업 지원 등의 서비스를 맞춤형으로 제공토록 하고 있다.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일본의 청년 세대는 사회를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세대이기는커녕 도리어 사회적으로 그다지 쓸모없는 존재로, 심지어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히키코모리, 니트족 등 ‘자립하지 않는 청년들’을 일컫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런 청년 담론은 문제의 원인을 ‘사회’보다 무기력하거나 유약한 ‘청년의 심리’ 탓으로 돌려버리기 십상이다. 만 15~39살 청년을 뭉뚱그려 ‘와카모노 세대’라고 한 묶음으로 규정짓는 것도 비슷한 착시효과를 낸다.
그런데 히키코모리같이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했던 일본 청년들이 알을 깨고 나오고 있다. 부화에는 두 가지 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일어난 3·11 동일본 대지진, 그리고 아베 정부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헌법 제9조를 다르게 해석해 지난 9월 강행 처리한 이른바 안전보장법(안보법).
사토 대표는 “자연재해와 인재(人災)가 더해져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데다, 경제적 번영은 물론이고 ‘전쟁 없는 나라’도 누릴 수 없다는 위기감까지 덮쳤다. 그러자 청년들이 충격받고 그동안 현실에 무관심하고 비정치적이었던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평화를 뺏길 수도 있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것 같다. 이념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라고 말했다.
3·11 대지진과 안보법의 충격고베에 사는 시오타 준(23)이 그랬다. 대학원에서 정치사회학을 공부 중인 그의 삶은 3·11 동일본 대지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원래 정치엔 큰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야구만 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외국 유학을 다녀오느라 정치나 사회문제는 스쳐지나가는 뉴스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난 동일본 지역에 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온 뒤로 달라졌다.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서, 그의 삶은 새로 시작됐다.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핵·반원전 시위에 나가고 ‘특정비밀보호법에 반대하는 학생의 자발적 모임’(SASPL·사스플)에도 참가했다. 사스플은 ‘실즈’의 모태가 된 학생조직이다. 지난해 12월 오쿠다 아키 실즈 대표와 인연을 맺은 뒤로는 실즈 활동에도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오사카, 고베, 교토 지역을 아우르는 ‘간사이실즈’의 핵심 멤버 가운데 한 명이다. 안보법에 반대하는 홍보물 디자인 등을 맡고 있다.
디자인 담당자답게 그는 실즈 티셔츠를 입고 ‘No War, No.9’(전쟁 반대, 헌법 제9조)라고 쓰인 액세서리를 배낭 뒤에 대롱대롱 매달고 나타났다. “청년 세대가 경험하는 불안, 위기감은 어느 사회나 비슷할 거다. 불안이 인종 혐오처럼 공격적인 쪽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직접행동으로 나아갈 것인가는 어떤 시기에,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그에겐 그 경험이 3·11 대지진과 안보법이다.
경험의 차이가 적대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간사이실즈가 처음 거리시위를 벌인 지난 6월 정부가 해결해야 할 여러 과제 중 하나로 재일 한국인 아동의 교육권을 언급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인터넷 우익들은 그를 “북조선 노동당 스파이” “자이니치”라고 인신공격했다. 실즈의 오쿠다 아키 대표는 살해 위협을 받기까지 했다. “우리 청년들 모두 희망을 갖기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살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약자를 공격하거나, 강한 힘을 가진 우익 정치인이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오타는 “체념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그가 목소리를 내는 방식은 ‘재밌는 데모’와 ‘감각적인 선전’이다. 실즈는 랩, 힙합, 댄스 등으로 시위를 물들였다. 어떤 구호가 감각적일지는 간사이실즈 회원 140여 명이 모여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채팅방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한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익숙한 행동들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안보법이 통과됐지만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1월 초부터 일본에서는 안보법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실즈는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목소리를 낸 뒤 자진 해산할 계획이다.
랩·힙합으로 ‘재밌는 저항’“일본 청년들은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익숙지 않다”는 고정관념이 실즈로부터 깨져나가고 있다. 꼭 안보법이라는 정치적 이슈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시오타는 빚이 100만엔(약 94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장학금과 장애인 지원시설에서 하는 아르바이트, 간간이 부모님께 받는 용돈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현재도, 그가 그리는 미래도 전형적인 ‘운동가’와는 거리가 멀다. “때때로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국민으로서 행동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활의 연장선에 있는 문제다. 졸업하고 나면 취업하고 싶다.”
3·11 대지진과 안보법이 각성의 계기였다면, 그 각성의 저 밑바닥에는 일본 청년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깔려 있다.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절망, 현실이 바뀌지 않으리란 불만이 꼭 포기나 체념으로만 이어지진 않는다.
청년노동을 둘러싼 논의의 작은 변화가 그렇다.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프리터’, 취업하지 않거나 못하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니트족’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지긴 했지만, 청년들의 의지나 의욕의 문제로만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돈벌이나 성공에 크게 관심 없는 일본 청년들의 심리적 상태를 일컬어 ‘사토리 세대’ ‘하류지향’ 등으로 분석하는 청년 담론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로 살려면 사회·경제적 조건을 바꾸기보다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에 가깝다.
그런데 2010년 무렵부터 일본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블랙기업’ 운동이 새로운 방향으로 청년 담론의 물꼬를 틀었다. 블랙기업은 비합리적 노동을 청년 구직자나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기업, 일상적인 노동 착취가 일어나는 기업을 뜻한다. 청년이 아닌 기업의 관점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언어다. 항상 ‘을’로서 기업을 대하던 청년 입장에선 ‘갑’인 기업을 고발하고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리는 적확한 말을 갖게 된 셈이다. 노동법 위반, 직장 내 괴롭힘, 장시간 저임금 노동, 그리고 이로 인한 청년들의 우울증이 집중 조명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이 운동을 본떠 청년유니온이 올해 처음으로 ‘블랙기업 시상식’을 열었다.
비영리법인 ‘포세’(POSSE)를 설립해 노동상담을 하면서 블랙기업 고발운동을 주도한 곤노 하루키 대표는 2013년 출간한 에 이어 올해 를 펴냈다. 그는 블랙기업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청년들이 회사를 그만두거나 우울증에 걸리는 게 ‘자기 책임’이 아니라 ‘나쁜 기업’ 때문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끌어낸 것”을 꼽았다.
“최근 노동상담을 한 청년의 이야기다. 대학교로 온 모집 공고를 보고서 한 유명 프랜차이즈 편의점 영업사원으로 취업했다고 한다. 공고에는 하루 8시간 근무, 1년에 100일 휴일 등이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 가보니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주말에도 연장근무수당이나 휴일근무수당 없이 일해야 했다. 대졸 취업률이 90% 이상 된다고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노동을 착취하는 서비스 업종의 대기업이 많다.” 곤노 하루키 대표는 ‘블랙기업의 노동 착취→우울증→퇴직→빈곤’으로 이어지는 청년들의 생애사가 표준이 될까봐 우려했다. 가난한 청년들은 부모한테 의존해 사는 ‘파라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이 되거나, 소득 양극화로 부모마저 빈곤해지면 인터넷 카페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넷·카페 난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청년의 상처는 ‘나쁜 기업’ 탓28살 오니시 렌은 이런 청년 빈곤 문제의 해결에 삶을 걸었다. 그에게도 ‘어떤 경험’이 있었다. 2010년 오니시는 도쿄도청이 내려다보이는 공원에서 노숙자에게 무료 급식을 하는 ‘밥차’ 자원봉사활동을 나갔다.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던 그는 노숙자들의 삶을 직접 접하면서 빈곤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그는 현재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자립생활 지원센터인 ‘모야이’의 대표를 맡고 있다.
주거 빈곤 문제 등을 상담하면서 또래 청년도 많이 만난다. 모야이는 집이 없는 노숙자나 빈곤층을 위해 집을 구할 때 연대보증을 서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상담자들 가운데 30~40%가 20~30대 청년이다. 최근 들어 청년 비중이 점점 늘고 있다. 15~25살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인데, 비정규직의 평균급여가 168만엔(약 158만원)으로 정규직의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제조업에서 파견직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청년 빈곤 문제가 더 심해졌다.”
문제는 청년 빈곤이 앞으로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비정규직, 노동착취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노후도 깜깜하다. 비정규직이라서 후생연금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거나, 저소득자라서 국민연금 보험료조차 납부할 수 없는 청년이 많기 때문이다.
“세대 갈등이 여러 분야에 잠복해 있다. 직장 내에서는 나이 든 정규직과 젊은 파견직 노동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다. 정규직이 월급은 2~3배 받아가는데 험한 일은 파견직이 도맡아야 하는 탓이다. 또 ‘지금 연금 내는 젊은이는 바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윗세대들은 고도성장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열심히 낸 연금으로 노후까지 보장받기 때문이다.” 교토에서 청년유니온과 비슷한 청년 노동운동단체 활동을 했던 나카지마 아키라(32)의 말이다. 그의 첫 직장은 파견노동자를 관리하는 대형 파견회사였다. 그도 ‘어떤 경험’ 뒤에 알을 깨고 나왔다. “파견직을 고용하면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며 파견회사를 대변하는 영업을 하다가 “파견노동에 대한 모순”을 느껴 노조활동가로 전업한 것이다.
‘포기하자’에서 ‘바꿔보자’로이처럼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본 청년들의 여러 움직임은 과연 ‘새로운 역사’로 이어질 수 있을까. 노동사회학자인 하시구치 쇼지는 “포기나 단념을 기반으로 새로운 저항이 생겨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 일본 사회에선 개인의 출세나 성공을 발판 삼아 현재의 절망적인 노동시장에서 ‘탈출’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면, 지금은 아예 탈출을 꿈꿀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양극화와 장기 불황, 저출산·고령화라는 암초에 걸려 일본은 ‘침몰해가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붕괴되는 순간,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이 싹튼다. 하시구치는 “지금이 ‘포기하자’가 아니라 ‘바꿔보자’는 분위기로 전환하는 국면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에서 지금 동시에 청년들이 꿈틀대고 있다.
도쿄·오사카(일본)=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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