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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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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는? 깨어 있는!

비즈니스로 사회문제 해결의 ‘엔진’을 달고 싶은 박서원 대표와
청년 혁신가-기업 사이의 ‘다리’ 역할을 꿈꾸는 정경선 대표
등록 2014-07-09 17:09 수정 2020-05-03 04:27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공유경제, 소셜벤처, 공유가치창출(CSV), 임팩트 비즈니스…. 이름은 다르지만 출발점은 같다. 경제활동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것. 사회와 경제라는 영역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더불어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은 변화를 만들어가는 ‘체인지 메이커’이자,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려는 ‘호모 임팩타쿠스’(인간을 뜻하는 ‘Homo’와 영향을 뜻하는 ‘Impact’의 합성어)다. 은 앞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려는 기업가들의 분투기를 격주로 소개한다. _편집자


박서원 빅앤트 인터네셔널 대표(왼쪽)가 ‘바른 생각’ 콘돔을 손에 들고 사회적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오른쪽)는 회사 연례보고서를 보여주며 회사 직원들을 소개하고 있다.

박서원 빅앤트 인터네셔널 대표(왼쪽)가 ‘바른 생각’ 콘돔을 손에 들고 사회적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오른쪽)는 회사 연례보고서를 보여주며 회사 직원들을 소개하고 있다.

두 사람은 속된 말로 ‘깬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왔다. 재벌가(家)의 아들로서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편한 둥지에 머물기보단 꿈을 품기로 했다. 단순히 나 한 사람 좋자고 품은 꿈이 아니다. 자신이 벌이는 사업을 통해 사회를, 세상을 바꾸겠단다. 재벌 3·4세라는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는’ 선택이다. ‘체인지 메이커’의 첫 번째 손님으로 두 사람을 만나기로 결정한 이유다. 두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증명하고 있다. ‘임팩트 비즈니스’(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업)가 이념과 신분, 세대를 넘어 우리 주변에 깊숙이 자리잡은 시대적 화두가 되고 있음을 말이다. 박서원(35) 빅앤트 인터네셔널 대표와 정경선(29) 루트임팩트 대표가 주인공이다. 박 대표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정 대표는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아들이다.

문신 vs 모범생, 속내는 닮은 ‘돌연변이’들

박서원 대표는 최근 그야말로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광고회사인 빅앤트에서 지난 6월 ‘바른 생각’이라는 콘돔 브랜드를 출시했기 때문이다. 그냥 낯뜨거운 콘돔‘만’이었다면, 입소문을 내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했다면 구태여 박서원이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게다. 박 대표는 “사회적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콘돔을 시작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제품을 차례로 내놓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왜 굳이? 박서원 대표는 세계 5대 광고제에서 상을 휩쓴, 이름난 광고쟁이다. 두산이나 아버지 이름을 등에 업지 않고서도 광고만으로도 돈을, 그것도 많이 벌기에 충분하다. 지난 7월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일단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기왕에 할 거면 좋은 일을 하고 싶다. 그러면서 돈도 벌고 싶다. 내가 갖고 있는 재능으로 재밌는 일을 하고, 그게 좋은 일이 되고, 비즈니스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면 좋겠다”고 말했다.

콘돔 출시도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한국의 낙태율, 성병 전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걸 바꾸려면 뭐가 필요할까 생각했다. 처음엔 계몽성 광고 캠페인을 생각했는데 별 소용이 없겠더라. 사람들이 콘돔을 살 때 부끄러워하지 않을 브랜드를 만들고, 그 수익금으로 청소년 성교육 콘텐츠와 각종 단체에 기부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콘돔에 ‘바른 생각’이라는 브랜드명을 붙인 까닭이다.

왜 그런 생각을 품게 됐을까? “첫째는 제가 누리고 받은 만큼 누군가한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는 제 성향이 그래요. 잘 가꿔진 나무에서 예쁜 열매를 따는 것보단, 아스팔트를 깨부숴서 흙을 퍼담고 거기다 씨를 심어서 새싹이 나게 하는 게 좋아요.” 재벌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돌연변이’ 같은 인생을 사는 이유다.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도 현대 집안에선 ‘돌연변이’다.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돈을 버는 일보다는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겉모습이나 성격은 전혀 딴판이다. 박서원 대표는 머리카락을 빡빡 밀고, 몸 여기저기에 문신을 했다. “가족들한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나서야 용기를 내어 감행한 짓이다. 박 대표가 끼 많은 혁명가라면, 정 대표는 차분한 활동가에 가깝다. 외모도 모범생 스타일이다. 일과 관련해서도 ‘재밌는 일’보다는 ‘선한 일’이 우선이다.

정 대표가 사회적 기업, 소셜벤처 등에 몸담고 있는 청년 사회혁신가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은 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대 재학 시절인 2008년 사회적 기업 동아리 ‘쿠스파’(KUSPA)를 설립해 휴먼라이브러리, 자선파티 사업 등을 벌였고, 대학 졸업 뒤에는 할아버지인 고 정주영 회장의 10주기를 맞아 범현대 가문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아산나눔재단’에서 1년여간 인턴으로 일했다.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건 2012년 루트임팩트라는 비영리 사단법인을 설립하면서부터다. 루트임팩트는 청년 사회혁신가를 발굴해 교육하고, 기업이나 투자자들과 연결해주는 지원기관이다.

시너지 일으킬 ‘공간’을 그리다

정 대표는 “청년 사회혁신가들과 기업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임팩트 비즈니스의 ‘중심’에 서 있지 않다고 겸손해한다. 스스로를 “사회혁신가들을 돕는 조력자”라고 소개한다. 지난 7월2일 정 대표를 만난 곳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골목에 자리잡은 ‘임팩트 허브’였다. 사회적 기업이나 소셜벤처에서 일하거나 일하려는 젊은이들이 모여 함께 작업하는 북카페 같은 공간이다. 이 공간처럼 청년 사회혁신가들이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나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정 대표의 목표다.

박서원 대표와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도 던졌다. 왜 굳이? “어릴 때부터 ‘나는 왜 다른가’라는 고민을 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누구 아들’이라며 제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걸 계속 확인시켜줬죠. 따돌림을 당하거나 선생님한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친구들을 보면서 한국 사회에 왜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부족할까, 왜 약자가 발생하는 구조가 됐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아직까지 루트임팩트는 걸음마 단계다. 매출 11억원, 직원 11명의 그럴듯한 외형을 갖추긴 했지만 운영기금의 대부분은 정 대표의 부모님 등 개인투자자에 기대는 형편이다. “부모님 도움은 딱 3년만 받기로 했다. 새로 시작하는 사업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컨설팅 등 외부 용역사업이늘어날 걸로 본다. 소액기부자들을 모으고 펀딩 구조를 다양하게 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갖고 시작한 일이라 해도, 재벌이라는 출신 성분 탓에 따가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까? 어쩌면 상처가 될지 모를 질문을 대놓고 물었다. “부잣집 도련님의 허영심이나 취미는 아니냐”고. 정경선 대표는 “(그런 시선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진정성을 갖고 묵묵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놨다. 박서원 대표는 좀더 솔직한 마음을 내비쳤다. “거꾸로 되묻고 싶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되죠. 굳이 사회에 뭔가를 베풀면서 살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요?”

이들이 품고 있는 다음 꿈은 뭘까? 박서원 대표는 기자와 5년 전에 만났을 때와 꼭 같지만, 한 단계 진화한 꿈을 털어놨다. “중소기업 제품이 국내외 소비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옷(브랜드)을 입혀주고 싶다. 좋은 제품은 있는데 디자인·마케팅이 안 되는 중소기업이 많다. 그런 중소기업들이 활성화될 수 있는 비즈니스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서로 자신 있는 분야를 맡아서 다 같이 수익을 창출하자’고 중소기업이나 창업을 준비하는 분들과 힘을 한데 모으고 있다.” 그는 내년까지 중소기업과 연관된 브랜드 10여 개를 론칭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바른 생각’의 뒤를 이을 2호 제품은 오는 10월께 세상에 첫선을 보인다. 또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중소기업이 모인 ‘단지’를 특정 지역에 조성하는 것도 꿈꾸고 있다.

정경선 대표도 비슷한 ‘공간’을 마련할 채비를 서두르는 중이다. 서울 성수동 서울숲 근처에 건물을 사서 10월에 ‘커뮤니티 하우스’를 열 계획이다. 이곳은 창업가, 예술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청년 사회혁신가 16명이 모여살면서 서로 꿈을 나누고 협업하는 보금자리다. 20~30대 청년 사회혁신가는 점차 늘어나는데 이들이 마음 놓고 모일 공간은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정 대표는 “유흥가에서 ‘창업자들의 디즈니랜드’로 거듭난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다운타운 프로젝트, 서울 마포 성미산마을 등 비슷한 모델을 참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심·진정성 있다 여겨지기에 특별한 그들

처음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두 사람은 비슷한 걱정을 했다. 두 사람을 묶어놓으면 자칫 ‘별난’ 재벌 3·4세로만 비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실제 만나본 박서원과 정경선, 두 사람은 물론 특별했다. 하지만 재벌 출신이라는 수식어 때문만이 아니었다. “말하기 낯간지러운데 내가 하는 일이 촛불 같았으면 좋겠다. 활활 타지는 않아도 꾸준히 타면서, 손 가까이 대면 따뜻하게 해주고 그랬으면 좋겠다.”(박서원 대표) “내가 어떤 직책에 있느냐는 중요치 않다. 나라는 사람의 미션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돕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음은 내가 앞으로 어디에 있든지 변치 않을 거다.”(정경선 대표) 세상을 조금씩 조금씩 바꾸고자 하는 진심이 담겨 있기에,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특별하다.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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