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기업에는 ‘마중물’이 필요하다. 펌프에 물을 조금 넣어줘야 물을 쏟아내듯, 처음에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계속 투자를 해야 기업이 결실을 맺을 가능성은 커진다. 세계적 기업인 애플도 그랬고, 페이스북·구글도 이 과정을 거쳤다.
사회적(소셜) 벤처기업은 이런 투자를 받는 게 더 어렵다. 돈을 버는 것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돈을 넣어야 할지 망설인다. 그동안 ‘체인지 메이커’ 지면을 통해 소개된 여러 사회적 벤처기업들도 초기에 기업을 안착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좋은 사람은 기본이다”‘임팩트 투자’는 사회적 벤처에 마중물 역할을 한다. 임팩트 투자는 환경·빈부격차·에너지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적 벤처에 투자한다는 개념이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자료(‘임팩트 투자의 개념과 사례’)를 보면, 2011년 전세계 임팩트 투자 자산 규모는 890억달러에 이른다. 2008년 전세계 금융위기 이후 임팩트 투자의 연구와 도입이 늘었다.
한국은 아직 임팩트 투자가 걸음마 단계다. 사회적 벤처를 발굴·지원하는 ‘디쓰리쥬빌리’의 이덕준 대표는 “흔히들 생각하는 대박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동기로 창업하는 젊은 기업가가 많아지고 있지만 경쟁력 있고 가치 있는 기업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디쓰리쥬빌리는 9월24일 젊은 사회적 벤처 창업가들과 투자자를 이어주고자 서울 삼성동에 있는 ‘임팩트 허브’에서 집담회와 쇼케이스를 열었다.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곳에 투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일 중요한 게 인성이다. (벤처의) 리더나 구성원의 인성이 좋아야 (함께 일할) 좋은 사람을 불러올 수 있다. 자신의 사업에 헌신할 수 있는 유능한 팀을 구성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자신들의 인성이 좋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좋은 회사를 키울 수 없다.”(고영하 한국엔젤투자협회장)
“좋은 사람은 기본이다. (그런데) 벤처기업은 초기일수록 나중에 (사업 모델이) 바뀐다.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 봐야 한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나. (창업가가) 순하게 보이는데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최고다.”(이재우 보고인베스트먼트그룹 대표)
사회적 벤처기업의 옥석을 가리는 방식을 물었더니 ‘품성론’부터 등장했다. 사업 아이템이 아닌 인성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50여 개 벤처기업에 투자한 고영하 회장은 “아주 초기 기업에 투자하니까 매출이나 이익 등 계량 지표는 보이지 않는다.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가능성뿐이다”라고 했다.
이재우 대표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재우 대표는 개인적으로 6곳의 사회적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기업의 인수·합병(M&A)을 주도하는 사모펀드에서 일하다보니 그는 많은 기업이 크고 사라지는 것을 봤다. “예전에 1년에 70~80곳의 벤처기업을 만났는데, 지금 거의 다 망했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창업가들의) 자신감이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좋지만 (사업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창업자가 다이내믹한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나를 본다.”
이재우 대표는 자신의 투자 실패 사례를 하나 들었다. “벤처 광풍이 불 때였다. 잘사는 집의 아들이 미국 하버드대를 나온 뒤 친구들과 함께 벤처를 만들었다. 이 기업은 당시 잘나가던 야후 검색엔진과 관련된 일을 하니 고정 매출처도 있었다. 하버드대 출신에 매출도 보장되니 틀림없겠다 싶어 (투자금을) 많이 실었다가 깨졌다. 학벌이 좋으니까 믿었는데 실패했다.”
당신의 열정은 실현 가능합니까?가능성만을 본다니 젊은 창업가가 많이 달려들 법하지만 임팩트 투자를 할 만한 곳이 적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소풍(SOPOONG)의 임준우 대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임팩트 투자를 할 만한 곳이 많지 않다. 환경이 척박해서 (우리가 벤처기업의) 손발이 되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창업자 이재웅씨가 주도해 만든 소풍은 지금까지 사회적 벤처 12곳에 투자했다. 의 이 지면을 통해 소개된(http://h21.hani.co.kr/arti/SERIES/148/) 경험공유 플랫폼 ‘위즈돔’, 커피 찌꺼기를 재활용한 ‘꼬마농부’ 등이다. 소풍은 사회적 벤처가 문제에 접근하는 데 구체적이면서, 해결하는 데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한다고 했다.
집담회 뒤 열린 ‘D3 임팩트 엔진’ 쇼케이스에서도 투자자들의 고민이 보였다. D3 임팩트 엔진은 사회적 벤처를 발굴·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올해 약 4개월간의 과정을 거친 1기 4개 기업이 이날 투자자들 앞에 선을 보였다.
‘이노마드’는 흐르는 물을 이용해 에너지가 없는 곳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휴대용 수류발전기’를 만들었고, ‘히쳐’는 출퇴근 카풀을 연결하는 앱을 만들어 대기오염과 기름 낭비를 줄이겠다고 했다. ‘프렌트립’은 지역 야외활동 전문가와 이용자를 엮어줘 지역사회를 돕는 플랫폼을 개발했다. ‘프롬디엘’은 희귀성 질환을 가진 환자와 부모들이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젊은 창업가들은 자신의 사업이 어떻게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이야기했고, 투자자들은 이들의 열정이 실현 가능한지 질문을 던졌다. 고영하 회장은 “세계적인 시장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다른 기업이 특허를 가지고 준비하고 있는지, 우리가 앞서가고 있는지 확인을 시켜줘야 투자자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자신의 사업 아이템이 괜찮은지 법적 검토까지 마친 창업가도 있었지만 투자자들 앞에선 긴장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고영하 회장은 “벤처업계에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어떤 대학이든 강의실에 가서 물어보라. 졸업 뒤 대부분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취직을 준비하고 있다. 좋은 인재들이 다른 사람 밑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것만 선호하고 있다.” 공무원 시험과 대기업 입사 시험의 경쟁률은 매해 역대 최고를 기록 중이다.
그래서 고시반으로 떠난 인재들이 모이고 사회적 벤처의 창업을 활성화하려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 다만 그 역할은 “정부가 직접 지원을 하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회사에 민간이 투자할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좋다”는 게 이덕준 대표의 생각이다.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워 벤처기업에 대한 예산 지원을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박근혜 정부는 최근엔 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국 17곳에 대기업과 묶어 창조경제혁신센터도 만들었다. 벤처업계에서는 정부 주도의 벤처기업 육성 방식이 기업의 ‘창의성’을 높일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 시각이 많다.
정부는 건강한 투자 여건 만들어줘야이덕준 대표는 “건강한 시민사회의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창업투자사는 자본금 50억원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다. 이보다 적은 규모로 임팩트 투자를 하는 펀드를 만들려고 해도 어렵다. 정부의 역할을 이야기하지만 민간이 해야 할 역할이 더 많다. 정부는 제도적으로 막힌 것을 뚫어줘 투자 여건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게 맞다.”
임팩트 투자는 과연 한국 경제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재우 대표는 저성장에 빠진 한국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출구를 열어줄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한국 사회는 고령화가 심각하다. 은퇴 이후에 쓸 돈을 생각하니 사람들이 소비를 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돈이 없어서 못 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좋은 에너지를 채우는 방법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젊은이들이 벤처로 독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치킨집 등 자영업으로 가자는 게 아니라 좀더 창의력 있는 쪽으로 끌어줘야 한다. 임팩트 투자를 통해 사회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기업에 투자까지 되어 성공한다면,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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