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내린 첫눈을 이어령 선생은 ‘아름다운 쿠데타’라고 했다. 하룻밤 사이 아무도 모르게 온 대지를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눈. 며칠 전 아름다운 쿠데타가 내렸다. 예전 같으면 내리는 눈을 소복소복 바라보다 잠이 들었을 텐데, 안 된다. 번뜩 밭에 있는 무가 떠올랐다. 이실직고하자면 짝꿍이 소리쳤다. “무 얼면 안 되는데!”
무는 영하로 내려가면 바람 들어 먹지 못한다. 일전에 솎아 무김치를 한번 담갔다. 서리 몇 번 더 내리면 뽑으려 했던 무다. 자정에 나가 무를 뽑았다. 눈은 내리고, 앞은 보이지 않고, 춥고, 손은 시리고, 발도 젖고, 총체적 난국. 아름다운 쿠데타가 아니다. 이렇게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 공격해오다니. 쿠데타 그 자체다.
이런 쿠데타는 자주 일어난다. 꼭 이런 일은 늦은 밤에 일어난다. 하루는 땅콩을 수확하고 제대로 말리지 않고 넣어놨다가 곰팡이가 핀 것을 한밤중에 발견했다. 곰팡이 슨 껍질은 벗겨내고 알만 급하게 꺼내 다음날 땅콩조림을 만들었다. 지난해엔 열심히 생강을 팔고 우리 몫의 생강을 포대에 넣어놨더니 곰팡이가 슬어 모두 버렸다. 이번에는 버리지 않겠다 다짐하며, 캐자마자 밤늦게까지 다듬어서 생강청을 만들었다.
밭일한다는 건 종종 이런 일을 견디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급하게 처리해야 한다. 수확한 것을 다듬고 씻고, 씨앗을 갈무리하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편하게 자고 싶지만, 이걸 지금 안 하면 쌓이고 쌓여 얼거나 버리게 된다.
귀농하던 첫해부터 지금까지도 밭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귀농하기 전 농사 교육을 받던 때도 나서서 밭을 일군 적이 별로 없었다. 밭에 나가 땡볕 아래 풀 뽑고, 두둑 만들고, 쪼그려 앉아 씨앗 넣는 일련의 행위가 도시생활만 30년 넘게 해온 내 몸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기계 없이 100평 땅에 생강을 키우면서 ‘아, 농사 진짜 하기 싫다’고 생각했다. 집 앞에 조그맣게 상추나 고추를 키울 공간만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밭에 있는 건 무엇인가. 토종에 유기농이다. 집 앞에서 따 바로 먹는 가장 신선한 채소다. 이런 채소는 밖에서 구할 수 없다. 조금의 노동만 더해도 먹을 수 있다. 이런 작물을 두고 차 타고 나가 돈 주고 슈퍼에서 사 먹다니 미련한 일이다. 바지런을 조금만 떨어도 신선하고 훌륭한 작물을 식탁에 올릴 수 있다. 밭에서 직접 작물을 길러 먹는다는 건, 사 먹지 않는다는 건, 시켜 먹지 않는다는 건, 택배 노동자, 마트 노동자, 축산 노동자가 새벽같이 일어나 험한 일 하는 것을 줄여주는 일이다. 다양한 생물을 죽이지 않고 더 키우는 일이다. 기름 덜 쓰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일이다.
‘이 좋은 걸!’ 내 마음속에서 솟구친 잔소리였다. 밭을 보며 다시 생각했다. 자주 풀 뽑고 바지런을 떨어야겠다. 열심히 커피가루 모아, 똥오줌 모아 거름 만들고 넣어줘야겠다. 밤사이 쿠데타가 일어나도, 밤늦게 자는 일이 잦아도 조금의 불편함이 남을 더 편하게 하겠구나.
닭이 흙을 뒤집듯, 물살이가 물을 가르며 나아가듯, 새가 하늘을 날며 먹이를 찾듯. 밭을 일구는 건 생명의 위대한 역동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음의 증거다. 눈을 떴다면 바지런히 먹거리를 찾아 헤매야 한다. 숙명인 것처럼.
글·사진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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