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장관님, 수십 년간 판사 생활을 하신 분께 이런 편지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법은 아실지 몰라도 역사는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글을 보냅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4·19 혁명정신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4·19는 3·15 부정선거에서 촉발됐지요. 장관님의 전임 장관인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경찰서장들을 모아놓고 ‘어떤 비합법적 수단을 써서라도 이승만 박사가 당선되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4·19 혁명정부에서는 경찰의 중립성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고, 1960년 헌법 제75조 2항에 ‘경찰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명시했습니다. 이 조항이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알 수 없는 이유로 삭제됐고, 이어진 군사독재 정권에서 혁명정부의 경찰개혁 정책을 모두 수포로 만들어버린 것이 역사적 불행입니다.
군사정권하에서도 경찰에 의한 비극은 계속됐습니다.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을 미행하고, 고문하고, 탄압하여 정권을 유지시키는 것이 경찰의 가장 큰 사명인 듯 보였습니다. 1987년에 박종철 열사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끝에 숨졌습니다. 그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치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1975년 취임한 내무부 장관 김치열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박 열사가 숨지기 하루 전, 남영동 대공분실에 친히 방문하시어 초강경 대응 지침을 내린 사람도 바로 장관님의 전임 1987년 내무부 장관 김종호였습니다.
19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서울의 봄이 왔고,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1991년 국회에서는 경찰법을 제정하면서 내무부 장관의 임무에서 ‘치안 사무’를 삭제했습니다. 또 다수의 전문가와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7명의 경찰위원회가 경찰을 통제하도록 경찰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찰법은 이렇게 누군가는 정권과 결탁한 경찰에 의해 죽고, 누군가는 똥물을 뒤집어쓰고, 누군가는 성고문을 당하면서 그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리 장관이라도, 그것도 대통령 후배인 실세 장관이라도 시행령 정도로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아픔과 법치주의의 원칙, 헌법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장관님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겠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1991년도 경찰법 제정 이후에도, 경찰은 여전히 정권의 입맛에 맞추려 노력합니다. 2008년 광우병 집회를 막기 위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컨테이너로 산성을 쌓았습니다. 2012년에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 대한 수사 축소 은폐가 있었고, 2015년에는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이듬해 숨졌습니다. 2016년에는 총선에서 정보경찰이 여당 선거전략 보고서를 작성해서 현재 재판 중입니다.
경찰은 인사로 움직입니다. 행안부의 경찰청 통제는 곧 인사를 잡겠다는 것이지요. 제도개선위원회는 경찰 고위직 인사제청권을 실질화하고, 장관에게 경찰 고위직 감찰요구권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관님이 전국 총경 이상을 승진도 시키고, 보직도 바꾸고, 잘못하면 감찰도 하겠다는 뜻이지요. 법무부 장관이 최측근 인사들을 승진시키면서 검찰청을 장악하는 것이 부러우셨던 건가요? 언론에서는 앞으로 행안부가 경찰청장·국가수사본부장 외에 650여 명의 총경 이상 고위직에 대해서도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방침이라고 나옵니다.
이제 전국 총경 이상인 경찰 650명이 정권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아니죠, 총경이 되고 싶은 전국 3천 명의 중간 간부급 경정들이 정권 눈치만 보겠지요. 이제, 물대포는 광화문광장뿐만 아니라 한옥마을에서도, 해운대에서도, 금남로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국 경찰서에서 정권에 잘 보이려는 정보보고서가 정부종합청사로, 용산으로 보내지겠지요. 이전에는 은밀하게 이뤄지던 최고위층의 정권 결탁이 더욱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심지어 당당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그 똑똑하다는 검사들도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왜 경찰들이 난리인지 다소 억울하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검사들은 왜 법무부 장관의 인사, 예산, 정책 모든 지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걸까요? 검사가 그 지휘를 직접 하기 때문입니다. 법무부에서 주요 국장과 과장 자리를 검사들이 다 채웁니다. 법무부가 검찰청을 지휘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검찰청이 법무부를 주무르는 모양새입니다. 행안부 기획조정실장, 정부혁신조직실장을 경찰청 치안감이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받아들일 수 있으십니까?
경찰제도개선 자문위원회는 향후 행안부의 경찰 지휘·통제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정부조직법 개정을 권고했는데, 6월27일 장관님은 정부조직법 제7조 ‘장관은 소속청에 대해 지휘할 수 있다’는 규정을 근거로 시행령을 통해 경찰을 직접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시더군요.
그런데 정부조직법 제36조 1항에서 행안부의 직무범위가 정해져 있죠. 치안은 없습니다. 대신 정부조직법 제36조 5항에서 치안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행안부 장관 소속으로 경찰청을 두고, 6항에서 경찰청의 조직·직무범위,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 돼 있죠. 그 따로 정한 법률이 바로 경찰법입니다. 경찰법에 따르면 장관님은 경찰위원회에 안건부의권과 재의요구권을 갖고 있습니다. 경찰위원회를 통한 의결요청으로만 관여하라는 것입니다. 혹시 판사 출신이라 법해석을 이미 자신이 했으니, 그것이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길 바랍니다.
장관님은 경찰이 대통령과 직거래해왔다며 강력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경찰법을 잘 보십시오. 경찰법은 행안부 장관을 패싱하라고 만든 법입니다. 행안부 장관이 정권을 대표해서 경찰을 지휘했으니까요. 역대 행안부 장관이 정권과 뜻을 달리한 적이 있었나요? 경찰법은 경찰의 주요 정책에 대해 행안부 장관을 패싱하고, 경찰위원회의 통제를 받으라고 만든 법입니다. 경찰과 대통령실의 직거래가 있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장관님이 하려는 것은 그 직거래를 강력하게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행안부 아닌 경찰위원회가 통제해야권한이 커진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장관님 말씀에 백번이고 천번이고 찬성합니다. 그런데 그 통제는 행안부 장관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 민주적 통제는 경찰위원회의 몫이어야 합니다. 현행법상 경찰위원회의 역할이 부족하다면, 법 개정으로 경찰위원회의 통제 권한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장관님, 법률을 우회하고자 시행령을 통해 편법으로 경찰을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에서 벗어나려면 법률을 개정하십시오.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의 관계는 시행령으로 고칠 수준이 아닙니다. 국회에서 논의하십시오. 먼저 법을 고치고, 그다음에 그에 맞는 시행령을 만드는 것이 우리 헌법에서 배운 법치주의 아니겠습니까?
현직 경찰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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