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7년 핀란드 탐페레대학에서 ‘핀란드 의회와 시민 참여’를 주제로 한 논문을 제출하고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과 연구 주제가 말해주듯이 핀란드의 의회, 정당, 선거 시스템 등 정치적 대표 체계와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은 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핀란드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2011년 말부터 지금까지 6년 주기의 대통령선거, 4년 주기의 의회 선거와 지방자치 선거, 5년 주기의 유럽의회 선거를 각각 두 차례 지켜보았다. 지방자치 선거에선 지역주민으로서 직접 투표권을 행사할 기회도 누렸다. 각종 유세 차량과 요란한 로고송으로 시끌벅적한 한국의 선거 풍경과 달리, 광장과 야외 시장 한쪽에 설치된 정당별 부스에서 출마자들과 시민들이 만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차분하게 진행되는 핀란드의 선거 풍경은 사뭇 인상적이었다.
선거 때면 정당별 부스에서 시민과 후보가 차 한잔 하며 대화를평화로운 선거 캠페인 광경 가운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게 있었다. 바로 많은 정당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후보 얼굴과 기호가 빼곡하게 전시된 선거 포스터 설치물이었다. 정당 수는 10여 개에 이르렀고, 각 정당의 후보 수십 명이 유권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내 정당만 꼽아도 급진 좌파동맹, 중도좌파 사회민주당, 중도우파 중앙당(옛 농민당), 보수 국민연합당, 녹색당, 극우 핀란드인당, 기독민주당 그리고 스웨덴인민당 등 8개나 되었다.
인구 약 550만 명의 작은 나라에 왜 이렇게 많은 정당이 있을까? 또 이렇게 많은 후보가 출마했을까? 내 호기심은 핀란드의 선거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금세 풀렸다. 이내 이 선거제도가 핀란드의 합의 민주주의와 보편 복지국가의 발전은 물론 높은 성평등과 여성·청년의 정치 참여에도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임을 깨달았다.
핀란드는 1906년 근대 의회제도를 채택한 이래 (권역별) 전면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다른 북유럽 국가들인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도 모두 비슷한 제도를 운용한다. 이 나라들은 전국을 여러 개 광역 선거구로 나누고, 해당 선거구의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비례 배분하는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전국을 13개 선거구로 나눠 운용하고, 특별자치 지역인 올란드(의원 1명 선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 선거구별로 최소 7명에서 최대 36명까지 비례대표 원리로 대표를 선출한다. 유권자 약 54만 명이 있는 헬싱키 선거구에서만 의원 22명을 한꺼번에 선출하는 방식이다.
2019년 총선 결과, 헬싱키에선 녹색당 6석(득표율 23.5%), 국민연합당 6석(21.8%), 사회민주당 3석(13.6%), 핀란드인당 3석(12.3%), 좌파동맹 3석(11.1%), 스웨덴인민당 1석(5.3%)으로 의석이 배분됐다. 이 과정을 거쳐 다양한 이념적, 정책적 스펙트럼의 정당들이 원내에 진입하고 있다. 특히 수도 헬싱키에서 녹색당이 1당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 인상적인데, 비례대표 선거제도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의원 중 여성은 40%, 청년은 절반 정도후보 명부 작성 등 투표 방식에서는 북유럽 국가들 사이에 일부 차이가 발견된다. ‘폐쇄형 명부 시스템’을 운영하는 노르웨이는 유권자가 정당만 선택할 수 있는 반면, ‘개방형 명부 시스템’을 운영하는 핀란드는 유권자가 정당과 개별 후보를 반드시 동시에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절충해서 ‘반개방형 명부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정당 투표를 기본으로 하지만 유권자가 개별 후보에게도 투표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정당투표만 허용하는 제도는 유권자의 선택을 쉽게 해 투표 참여율을 높이는 장점이 있고, 개인투표를 허용하는 제도는 유권자의 선택을 넓게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다.
핀란드의 개방형 명부 시스템은 선거에서 개별 후보를 선택하는 데 익숙한 한국 유권자에게도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투표 방식도 복잡하지 않다. 핀란드에선 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의 번호를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써넣음으로써 투표가 이뤄진다. 투표는 모두 취합해 먼저 정당득표수를 계산해 해당 선거구의 정당별 의석수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며, 그 뒤 개인별 득표수를 계산해 정당 내부의 의석 순위를 정한다. 여전히 정당득표율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비례대표 선거제도의 기본 취지를 살리고 있다.
북유럽의 비례대표 선거제도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다당제 정당체계와 여러 정당이 함께 내각을 구성하는 연합정부 등 포용적 대표 체계와 정부 거버넌스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좌우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연합정치는 포괄적이고 관대한 보편적 복지국가의 수립과 발전을 낳았다. 나아가 비례대표 선거제도는 교사·간호사·사회복지사·중소상공인 등 다양한 직업단체의 대표는 물론, 여성과 청년 등 소선거구제하에선 대표되기 어려운 집단의 정치 참여 확대를 증진한다.
현재 북유럽 국가들은 모두 40% 내외의 여성의원 비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45살 이하 의원의 비율이 거의 절반에 이르는 등 청년 대표성도 높은 수준이다. 그러므로 비례대표(Proportional Representation)는 단순히 특정 방식의 선거제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와 관점을 균형 있게(비례적으로) 정치적 대표 선출과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기본 관념에 기초한 하나의 ‘사회운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비례대표 의석 두고 35개 정당 경쟁하는 우리는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뒤 치르는 이번 총선에서 비례위성정당 난립 등 여러 난맥상이 연출됐다. 그러나 이는 소선거구제하에서 심화된 승자독식 정치와 극단적 진영정치의 폐단이 변형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일 뿐, 실상 비례대표제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총선 이후 선거제도를 다시 개혁하자는 논의가 나올 전망인데, 진통과 방황 끝에 정치개혁 후퇴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재도약을 위해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핀란드 탐페레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북유럽의 민주주의·복지국가·시민권 모델을 비교정치학 관점에서 연구하며, 특히 근대의 표준적 대의민주주의와 후기근대적 전환기 상황에서 출현하는 대안적 시민참여 기제 간의 정치적 긴장과 다이내믹을 중점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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