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통합을 주요 과제로 내걸었다. 18대 대선에서도 통합을 화두로 삼지 않은 후보는 없었다. 그만큼 분열과 대립이 크다는 뜻이다. 상대를 경쟁 대상이 아니라 ‘적’으로 규정하고, 정치 쟁점을 선과 악으로 양분하는 정치문화는 선거에서 유권자의 적대감을 자극해 동원하려는 행태로 나타난다. 보수와 진보의 일대일 총력전으로 펼쳐진 18대 대선에서 이런 ‘정치적 양극화’는 더욱 강화됐다. 이기는 게 최고의 선이 되는 선거는 경쟁이 아니라 전쟁이다. 보수세력은 색깔론과 저주의 언어를 쏟아냈고, 민주·진보 세력은 상대 후보의 존재 자체를 조롱하고 부정했다. 말은 넘치나 대화는 없는 정치문화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다.
“시대 흐름 패턴상 여성 지도자가 나올 타이밍. 문재인 후보는 눈에 자신감이 없으며, 박근혜 위원장의 눈은 살아 있다.”(시사평론가 이봉규씨, 채널A 에서)
“단일화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다. 안철수는 콘텐츠 없는 약장수다.”(윤창중 칼럼세상 대표, 채널A 에서)
종합편성채널(종편)은 증오와 저주의 말로 먹고살았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2012년 12월26일 MBN 에서 튀어나온 욕설은 귀를 의심케 할 정도다. 생방송이었다. “즉각 수사해야 하는데, 검찰총장께서 직무유기하고 있어요. 나라 도둑년이거든요. 선거는 중요한 게 공정성인데, 남을 욕하고 이래서 되겠어요? 이 사람은 처음부터 돈을 횡령하기위해 아주 계획적으로 나온 사람이지, 공정한 룰에 의해 출마해서 심판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 도둑년이죠. 왜 그냥 놔둡니까?”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에 대해 “대선을 완주할 능력과 의사가 없음에도 출마해 국고보조금 27억원을 지급받고,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검찰에 고발한 성호 스님의 말이다. 진행자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막말을 이어갔다. “이정희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처럼 훌륭한 사람 되라고 이름도 정희라고 지어줬는데 이런 후레아들년이 어딨어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피해가지 못했다. “국정원 여직원한테 문재인이가 왜 피의자라고 해요? 잡아넣어야 돼요, 문재인도.”
대통령 선거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1월 18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전체 심의 건수(66건)가 17대 대선(38건)에 견줘 74%나 증가했다. 위원회는 이를 “종편 등장 이후 채널 간 시청률 경쟁이 심화한 결과”라고 밝혔다. 66건 가운데 종편이 34건으로 절반이 넘었기 때문이다. 제재 건수도 채널A 10건, MBC 8건, MBN 7건, TV조선 6건 등으로 종편이 많았다. 종편의 대선 보도는 보도보다는 논평, 논평보다는 선동에 가까웠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1월21일 언론개혁시민연대 주최 좌담회에서 “종편은 모기업인 보수 신문의 논조를 여과 없이 방송을 통해 전달하면서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진보 진영을 상처 내기 위한 ‘선전방송’의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편향성이 심한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는 등 편파방송을 내보냈다”고 말했다. 종편의 시사·보도 프로그램 편성 비율은 평균 52.9%(채널A 66.2%, MBN 63.6%, TV조선 55.2%, jTBC 26.7%)에 이르렀다(언론개혁시민연대 2012년 12월3~9일 조사). 1일 24시간 기준 시간으로 따지면 채널A 15.9시간, MBN 15.3시간, TV조선 13.2시간이다.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했다는 얘기다. 종편의 시사·보도 프로그램은 대선 직전 일주일 동안 YTN과 EBS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언론’으로서 증오정치를 부추긴 종편의 정반대편에는 ‘이정희 효과’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정희 후보는 1차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정치 혁신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 새누리당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대 정당과 후보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통합진보당은 추후 18대 대선평가서를 통해 “1차 TV토론 이전까지 선거전은 한마디로 ‘이대로 가면 필패’였다. 이정희 후보가 주도해 선거판을 뒤흔들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1차 토론에 임했고, 우리의 작전은 적중했다. 선거판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자신들의 우세를 확정지으려 했던 새누리당의 선거 전략에 일대 파열구를 냈고, 밋밋한 선거전으로 흥미를 잃었던 선거전이 일약 국민들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이를 통해 통합진보당과 이정희 후보가 극적으로 부활했다”고 자평했다.
“새누리당 전략에 일대 파열구”?‘이정희 효과’가 선거의 승패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계측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증오정치의 행태가 오히려 상대편의 결집을 가져왔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이 후보의 TV토론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낳은 보수의 결집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여론조사 결과(리얼미터 2012년 12월22일)가 나오기도 했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은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고 했는데,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뭘 잘하겠다고 하고 나오지 이러지는 않는다. 도덕적인 문제는 아이들 수준으로 보면 된다. 선거라는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있을 수 없는 얘기를 한 것”(1월9일 인터뷰)이라고 지적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정당의 특별한 기준’을 강조한다. “이익집단의 갈등과 정당의 갈등은 다르다. 정당에는 공익을 둘러싼 경쟁을 한다는 윤리적 기준이 있다. 상대를 무작정 부정하거나 절멸시키려는 것으로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는 행위는 이런 정치의 윤리적 기준을 위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당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2040세대를 겨냥한 배타적 세대 전략에 집중함으로써 의도와 무관하게 다른 세대를 적대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5060은 꼰대’라는 식이었다. 정치가 민생을 해결해 달라는 국민의 요구는 ‘반이명박근혜’ 프레임으로 대체하려 했다. ‘독재자의 딸일 뿐’인 박근혜 후보를 이기려면 문재인 후보를 젊은층이 뽑아달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안철수 현상’은 양극화된 정치를 끝내라는 열망이었다. 국민이 바라는 정치 혁신의 기본은 정치를 ‘정상화’하라는 것이었다. 정치가 갈등의 표현이라면, 갈등을 잘 조정하고 해결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18대 대선의 시대정신으로 ‘증오의 종언’을 제시하며 “진영이 이겨야 하는 승자독식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상대를 부수려고 분노와 증오를 증폭시킨다. 이 상황에 대한 국민적 염증은 임계치에 와 있다. 기존의 정치권이 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면 안철수를 보자는 이야기”( 921호 정치 ‘안철수 쇼크, 노무현보다 셀 것’)라며 안철수 후보를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안 후보는 안철수 현상에 담긴 열망을 실현하겠다며 ‘새 정치’라는 화두를 들고 출마했지만 완주하지 못했다. 안 후보는 증오정치의 뿌리에 대한 성찰, 즉 그동안 권력과 이익을 독점해온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 등 보수 세력의 기득권 동맹 체제에 대한 비판보다 기존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는 양비론에서 출발했다. 안 후보가 스스로를 ‘야권후보’로 규정한 뒤에는 새 정치의 구체적 공약으로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역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샀다. 그리고 문재인 후보와의 야권 단일후보 협상은 오히려 정치 불신을 부추기는 기재로 작용했다.
박상훈 대표는 이렇게 지적했다. “안철수 후보는 증오의 정치가 문제라는 걸 이슈화했지만,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 정치’를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켰다. 파도 앞에 선 수도사가 파도를 멈추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파도가 쳐야 바다가 정화되는 것이다. 싸움은 오히려 정치의 본성이다. 싸움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잘못된 싸움을 공존과 통합의 효과를 갖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게 핵심이다. 싸우지 말자고 하면서 정치라는 싸움에 나서는 이율배반에 빠졌다.”
양비론이나 진영 논리에 빠진 민주·진보 진영의 지식인과 언론들도 증오정치, 정치혐오를 부추겼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근혜 후보의 집권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일’로 몰아붙이는 것은 박 후보뿐 아니라 박 후보의 지지자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탓이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는 “진보개혁은 먼저 자신의 편견과 무기력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투사를 멈춰야 한다. 그러니 수구보수를 더 이상 악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 악을 물리치겠다는 적개심으로 규합할수 있는 유권자는 20~30%뿐이다”( 1월5일치 기고문)라고 말했다.
정치적 양극화는 양쪽 가운데 어느 한 편에 설 것을 강제하며 중간의 목소리, 소수자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정치적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훼손할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많은 까닭이다. 세계적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2007년 란 책에서 정치적 양극화가 가져오는 악순환을 지적한 바 있다. “정치적 양극화 현상은 소득 격차를 확대해 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이는 다시 정치적 양극화를 가속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정치적 양극화는 자신들만의 이익 극대화를 노린 소수특권층의 계획적인 의도에 의해 촉발되고 반대 집단의 대응으로 점차 극대화된다. 따라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상기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은 1월4일 제주도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에서 “이제 우리는 뒤집어 보수를 선택한 51%의 생각을 들여다봐야 한다. 보수를 지지한 51% 안에는 우리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과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같다. 같이 잘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이야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차단해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철수 캠프에서 일했던한 핵심 관계자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nothing)라는 승자독식 구조의 현행 선거제도에서는 적대적인 정치문화가 지속될 우려가 높다. 다양한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절반이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 직시해야”“우리의 논쟁은 너무 극단적으로 대립되고 있다. 때론 우리의 토론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인지, 더 상처를 주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토론을 중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신중히 듣고 대안을 찾으며 도덕적 지혜를 기르자. 이 비극은 현재 우리의 시민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 높은 시민의식과 공공 담론을 갖춘다면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2011년 1월8일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식에서 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이다. 개브리엘 기퍼즈 민주당 하원 의원과 유권자들의 야외집회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로 6명이 죽고 기퍼즈 의원도 크게 다쳤다. 미국 언론과 평론가들은 증오와 분노를 부추기는 정치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독설을 주고받으며 책임 공방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고통의 원인을 돌리는” 문화를 청산하자는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큰 울림을 줬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그가 미국의 대통령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보수 정치단체인 티파티 창설을 주도한 글렌 벡은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에 감사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과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한국의 증오정치를 통합으로 바꿔내야 할 임무는 우선적으로 박근혜 당선인에게 있다. 대선 때 ‘100% 통합’을 외치고도 당선 직후 야당으로부터 “저주와 분열의 나팔수”라고 불린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를 대변인에 임명한 것을 두고 통합 의지가 실제로 있는지 의구심을 산 터다.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내는 계간 1월호 특별좌담에서 “박근혜 시대가 정말 운영이 잘돼서 우리나라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즉 절반이 자기를 안 뽑은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 집권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돌파해서 가야 된다고 하는 논리, 반대쪽에서는 집권당의 일방적인 독주는 그 어떤 경우에도 막아야 하고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 이 두 논리가 충돌하기 시작하면 똑같이 굴레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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