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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여 판을 갈아라

등록 2004-06-10 00:00 수정 2020-05-03 04:23

2002년 4강 신화를 잊어야 산다… 모든 문제를 감독 영입으로 해결해선 안된다


코엘류 경질부터 메추 영입 무산까지 한국 축구가 대혼란기에 들어섰다. 해법은 무엇인가. 해외 유명 감독 영입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2004년 4강 신화를 빨리 잊을수록 희망이 다가온다. 이회택 축구협 기술위원장과 축구계의 ‘야인’ 조광래·신문선씨의 제안도 들어본다.


김경무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kkm100@hani.co.kr

‘월드컵 4강 신화’는 이제 한국 축구에 ‘독’인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과 태극전사, 그리고 붉은 악마들이 혼연일체가 돼 이룩해놓은 ‘4강 신화’가 되레 한국 축구를 옥죄는 악령으로 작용하고 있다.

축구협회는 히딩크 성공신화를 좇아 또다시 ‘외국인 감독 하나만 잘 영입하면 4강 신화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듯 외국인 ‘명장’ 영입에 혈안이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2004년 아시안컵 본선(7월·중국)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지난 6월7일 브뤼노 메추 감독 영입이 우여곡절 끝에 실패로 끝나는 등 국가대표팀 운영은 여전히 난맥상이다.

터키와의 2차전, 세대교체의 가능성

많은 축구팬들의 눈높이도 월드컵 4강 수준에 맞춰져 있다 보니, 2년 전에 비해 조직력이 현격히 떨어진 국가대표팀이 그 수준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다. 축구협회나 축구팬들은 여전히 국가대표간 경기(A매치)에만 매달린다. A매치에 관중들이 폭발적으로 몰려도, 축구 발전의 근간인 프로축구(K리그) 경기장 관중석에는 빈자리가 많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 오늘, 도대체 한국 축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히딩크의 수제자를 대신할 선수들

그동안 아시안컵 본선과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과정이었는데도, 행여 국가대표팀이 친선경기에서 패하거나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면 언론이나 축구팬들은 ‘무너진 4강 신화’라고 난리들이었다. 인내하거나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감독이나 선수들은 중압감에 시달려 위축될 수밖에. 오죽하면 4강 신화의 주역인 유상철(요코하마 마리노스)은 지난 6월5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터키와의 친선 2차전에서 2:1로 승리한 뒤 이렇게 말했을까? “솔직히 한-일 월드컵 이후 대표팀이 보여온 경기력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특히 베트남, 오만, 몰디브와의 경기에서의 부진은 큰 실망감을 안겼다. 대표팀 주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고,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대표팀 선수 전원이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되레 부담이 됐는지 앞선 파라과이·터키와의 경기 등에서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 같다. 오늘 경기마저도 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느 때보다도 정신적으로 잘 무장됐던 게 역전승을 이끌어낸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아시안컵을 비롯해 많은 경기를 하게 될 텐데, 선수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큰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 같아 후련하다.”

실제 이날 경기는, 한국팀이 1차전 0:1 패배를 통쾌하게 설욕한 승부였지만, 한국 축구에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히딩크 사단=국가대표팀 주전’이라는 등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증명한 것이다. 브뤼노 메추 감독 영입 실패로, 당분간 대표팀을 맡을 수밖에 없게 된 박성화 감독 대행은 이날 경기에서 예상 밖의 ‘베스트11’ 카드를 꺼내들었다. 공격 투톱에 김은중-조재진, 이를 후방에서 지원 사격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에 김두현, 바로 밑에 서는 4명의 미드필더에는 김동진-김남일-김정우-박진섭, 수비에는 김치곤-유상철-조병국, 골키퍼는 김영광. ‘월드컵 전사’ 유상철과 김남일 2명만 빼고 ‘젊은 피’ 올림픽대표팀 주전들이 주축을 이룬 3-4-1-2 포메이션이었다.

한국 축구의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2002년 이후 국가대표간 경기(A매치)에서 4강 신화의 주역들, 즉 히딩크 수제자들이 대거 빠진 것은 거의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박성화 감독 대행은 6월9일로 예정된 베트남과의 2006년 독일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 대비해 안정환·이을용 등 주전들의 체력 비축을 위해 젊은 피들을 대거 기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젊은 피들은 국제축구연맹 랭킹 7위인 유럽 강호 터키와의 경기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내며 그동안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 축구에 청량제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결국 이 경기로 인해 2년 남짓 4강 신화의 주역들에 의존해온 한국 축구는 세대교체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게 됐다. 박 감독 대행은 경기가 끝난 뒤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그동안 국가대표팀이 너무 침체돼 있었는데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게 됐다. 올림픽대표 선수들이 잘 해줬다. 베트남전에도 올림픽대표 선수들의 기용을 검토할 생각이다. 또 올림픽대표 선수들을 적절히 기용함으로써 앞으로 대표팀의 세대교체에 대비해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월드컵 이후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침체되던 대표팀에 상당한 자극이 됐다.”

이운재의 ‘대타’로 이날 주전 수문장으로 출장해 풀타임을 소화한 김영광(전남)은 1골을 허용했지만, 후반 중반 두 차례 대포알 같은 슛을 막아내는 등 가능성을 보였다. 벤치에 앉아 있던 이운재로서는 주전 자리에 위협을 느낄 만한 순간이었다. 김영광은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열린 2004년 아테네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6경기에서 단 1골도 내주지 않으며 한국형 ‘거미손’임을 보여줬다. 21살의 어린 나이지만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갖췄다.

중앙수비수 조병국(수원)도 홍명보의 뒤를 이을 간판 수비수로 쑥쑥 성장하고 있다. 이번 2차례 터키전의 ‘히어로’는 단연 조병국이다. 1차전에서 조병국은 베테랑 유상철의 대타로 중앙수비수에 포진해 안정적인 수비 능력을 보여줬고, 공격에서도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특히 코너킥 상황에서 세 차례나 위협적인 헤딩슛을 날렸다. 2차전에서 터진 김은중의 2:1 역전 결승골도 조병국의 머리로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최성국의 오른쪽 코너킥 때 탁월한 위치 선정과 놀라운 점프력으로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고 절묘한 헤딩슛을 날렸고, 상대 골키퍼는 허겁지겁 공을 쳐내기에 바빴다. 김은중은 튀어나온 공을 가볍게 왼발만 갖다대 골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조병국은 지난 2월14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레바논과의 2006년 독일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서는 코너킥 때 공격에 가담해 그림 같은 헤딩슛으로 A매치 첫 골이자 한국팀의 두 번째 골을 작렬해서 ‘골 넣는 수비수’에 이름을 올렸다. 축구인들은 그가 수비에서 가끔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골을 내주는 단점만 고치면 공격력까지 겸비한 대형 수비수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새롭게 발탁된 김은중(서울)도 골잡이답게 탁월한 위치 선정으로 골을 잡아내며 부활을 알렸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면서 밀려났던 박진섭(울산)은 오른쪽 윙백으로 돋보이는 플레이를 펼쳐 부동의 오른쪽 윙백 송종국을 위협하고 나섰다. 왼쪽 공격형 미드필더인 김동진(서울)도 이영표(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경쟁상대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일선 축구인들은 “2002년을 잊어야 한국 축구가 산다”고 입을 모은다. 한-일 월드컵의 감동과 교훈은 고이 간직하되, 한국 축구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더 이상 월드컵 4강 신화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감한 세대교체, 유소년 축구와 K리그 활성화로 한국 축구의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월드컵 4강이 (한국 축구) 모든 문제의 중심에 놓여 있다. 우리 국민들은 2002 한-일 월드컵 때 4강에 들어간 것을 두고 4강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 이런 분위기가 가장 안타깝다.” 코엘류 감독 사퇴 파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졸지에’ 축구협회 기술위원회를 책임지게 된 이회택 위원장은, 표류하는 한국 축구의 원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축구팬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측면이 강하지만, 축구협회나 감독들이 대표팀 운영에 난맥상을 보이는 것은 바로 한국 축구 실력에 걸맞지 않은 ‘4강 신화’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일리 있는 지적이다.

“지금 히딩크 할아버지가 온다해도…”

최근 축구협회의 외국인 감독 영입을 둘러싼 대혼선을 보며 뜻있는 축구인들은 “감독만 잘 뽑는다고 한국 축구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뼈있는 지적을 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난해 3월 한국 축구 사령탑을 맡은 코엘류 감독이 좋은 본보기다. 코엘류 감독은 부임 한달 남짓 뒤인 지난해 3월29일 콜롬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지휘봉을 잡아 0:0 무승부로 출발했다. 그 이후부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4월26일 일본에 0:1 패배. 언론들은 냄비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오만에서 열린 2004년 아시안컵 예선에서 베트남에 0:1, 오만에 1:3으로 지자, 코엘류를 경질해야 하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코엘류는 그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이어 그해 12월 제1회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홍콩(1:0)과 중국(3:1)를 연파한 데 이어 일본과 0:0으로 비겨 우승을 차지했으나, 경기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올 3월31일 2006년 독일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원정경기에서 약체 몰디브와 0:0 무승부를 기록함으로써 결국 경질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코엘류 감독은 어찌 보면 ‘4강 신화’ 때문에 쫓겨난 희생양일 수도 있다. 그가 재임기간 한국 축구를 가르친 시간은 72시간밖에 안 됐다. 그런데도 축구팬들은 그에게 히딩크 때와 같은 실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언론이나 축구팬들은 그에 대해 관대하지도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일선 축구 지도자들은 축구협회와 국내 언론들이 히딩크의 업적만 강조하다 보니, 대표팀 감독만 잘 뽑으면 한국 축구가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외국인 명장을 영입한다고 한국 축구가 근본부터 개혁되는가에 대해서는 모두 고개를 흔든다. 조광래 서울FC 감독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히딩크가 아니라 히딩크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모든 문제를 감독 영입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지난 6월2일 한국과의 친선경기 1차전에서 승리한 에르순 야날 터키 대표팀 감독은 한국 축구에 대해 “한국 축구는 공부를 좀더 해야 한다”고 의기양양하게 질타했다. 그리고 3일 뒤 2차전이 끝난 뒤에는 “한국팀에는 창조적인 선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유럽 축구의 변방이면서도 유럽 강호를 위협하는 강팀의 사령탑다운, 설득력 있는 지적이다.

새로운 대형선수 발굴에 실패

코엘류 감독 부임 이후 대표팀이 각종 A매치에서 부진을 보인 것은, 감독의 탓도 크지만 새로운 대형 선수 발굴에 실패한 탓도 크다는 게 축구계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미드필더, 특히 경기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플레이메이커 발굴에 실패한 것이 주요인이다. 현대 축구는 미드필드에서의 강한 압박과 스피드, 두 가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현대 축구 흐름에 맞는 대형 미드필더가 없는 게 현 단계 한국 축구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히딩크 감독 시절에도 플레이메이커감이 없어 고민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윤정환 등 플레이메이커감이 있었지만 체력이 뒤떨어진다며 기용하지 않았고, 결국 플레이메이커 없는 축구로 기적적으로 4강 신화를 만들어냈다. 축구인들은 “축구협회가 외국인 감독을 영입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만 내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장기 계획과 체계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유망주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2년의 환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대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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