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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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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청구될 입장료, 서구 역사가 나침반

1930년대 중남미, 19세기 유럽, 1970년대 독·일 참고한 기민한 전략을
등록 2025-08-07 20:53 수정 2025-10-20 15:2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8월1일(현지시각) 미국 메릴랜드주 앤드루 공군기지에서 뉴저지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 탑승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언제 한국과 정상회담을 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우리는 한국과 훌륭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8월1일(현지시각) 미국 메릴랜드주 앤드루 공군기지에서 뉴저지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 탑승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언제 한국과 정상회담을 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우리는 한국과 훌륭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7월30일 오후 6시16분(현지시각), 자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트루스소셜에 한국과의 무역협상이 전면적이고 완전한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인 7월31일에는 68개국과 유럽연합(EU)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캐나다, 브라질, 인도 등 미합의 주요국에 대해서는 징벌적 관세율을, 그리고 여타 국가에 대해서도 나라마다 서로 다른 상호관세율을 통보했다. 평균관세율의 정확한 수치는 관세율 구조가 안정된 다음 정밀하게 도출되겠지만, 관세율 변화에 따른 물량 변화를 가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평균 실질관세율은 18~19%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불과 6개월 전엔 2.5% 내외였는데 아득한 과거가 됐다.

 

관세율 2.5% 내외가 18%대로

8월7일부터 시행될 새로운 상호관세율은 과거 미국의 보호주의적 조치들과 비교해보더라도 역사적 수준으로 기록될 것이다. 19세기 말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시절의 매킨리관세법(Tariff Act of 1890)과 1930년 대공황 발발 직후 이뤄진 스무트-홀리법(Tariff Act of 1930)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물론 당시 개별 품목에 적용된 관세율은 지금보다 더 높은 경우가 많았지만, 거의 모든 상품 분야에 적용되는 트럼프 관세 정책이 훨씬 더 광범위하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이미 부분적으로 도입됐던 중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관세가 트럼프 2기에서 더욱 과감해져 전세계 모든 나라로 확대됐음을 상기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가 ‘윈윈(win-win) 정신’이 아니라 기존에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는 미국 일방주의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양자 협상을 통한 상호관세 원칙으로 다자주의 질서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미국 우선주의’는 전례 없이 과감하고 어떻게 보면 엉뚱한 무력시위로 보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의외로 유사한 장면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숨은 반복’의 역사 속 사례에서 우리는 현재의 고립주의적 통상정책이 가져올 예정된 파국과 의외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불연속처럼 보이는 흐름 속에 역사적 ‘패턴’이 웅크리고 있다.

19세기 말 유럽 열강의 보호무역주의 강화가 제국들의 공급망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비스마르크 시대인 1879년 7월12일 독일 제국의회는 ‘독일 관세법’(Gesetz über den Zolltarif des Deutschen Reiches von 1879)을 통과시킨다. 이 관세법은 곡물 등 농산물과 철강을 포함한 공산품에 대해 높은 수입관세를 부과해 농업에 기반한 전통귀족과 신흥자본가로 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이 보호무역주의 입법은 다른 열강을 자극했다. 예컨대 프랑스도 1892년 멜린 조례(Loi du 11 janvier 1892 sur le tarif général des douanes)를 통해 유사한 보호주의를 채택했으며, 미국도 1890년 관세율을 크게 상향한 보호무역법을 도입했다. 국외 식민지가 많았던 영국은 유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식민지와의 교역을 강화해 인도, 말레이, 남아프리카로부터 원자재와 곡물을 확보하고 공산품을 수출하는 폐쇄적이면서도 내재적인 경제블록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인도는 단지 면화 생산지로 전락했다. 이런 공급망 재구조화는 훗날 영연방 경제권 형성의 전초가 된다.

 

엉뚱한 미국 우선주의? 역사를 보면 숨은 반복

독일제국의 이 조치는 남북아메리카와 러시아 등지의 급증하는 곡물 생산에 따른 전세계적 곡물 가격 하락과 영국 산업에 대한 대항, 미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경쟁력 상승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 결과는 무역 패턴의 급격한 변화였다. 서로 앞다퉈 도입한 보호무역법으로 서구 열강 사이 무역량은 극적으로 감소했고 대신 식민지를 활용한 제국 공급망이 크게 확장되는 계기가 됐다.

현재 트럼프의 고관세 정책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공급망을 해체하거나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시도인데, 이는 향후 미국 중심의 경제블록화 가능성을 높인다. 이런 블록화는 글로벌 공급망의 ‘탈동조화’와 새로운 지역 허브의 부상을 불러올 수 있다. 미국의 시도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장의 분절화는 가속화되고, 이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지속적 번영에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한편 공급망상 긴장이 높아지면 국가 간 대립이 더욱 첨예해지고 이는 공급망의 전략화·군사화로 이어져 전쟁 가능성을 높인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이 구축한 새로운 공급망의 전략화와 군사화는 제국 간 대치와 갈등의 긴장도를 극적으로 높였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세계 대공황의 먹구름이 폭풍같이 몰려들던 1930년, 미국은 스무트-홀리 관세법이라는 칼을 뽑는다. 2만여 품목에 4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며 ‘자국 산업 보호’라는 깃발 아래 세계 무역의 흐름을 멈추게 한 이 법은 대공황을 더 악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른 나라들도 극도의 보호주의적 보복 조치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후 3년간 세계 무역은 65% 이상 감소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정책은 중남미를 자극해 의외의 지리적 재편을 가져왔다. 유럽과 미국의 수입길이 막히자 이미 독립해 더는 식민지가 아니었던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칠레 등 라틴아메리카는 식민지 모국과의 공급망 강화라는 달콤한 독약을 공유할 수 없게 됐다. 해법은 서로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 및 유럽 주요국들과 수직적 의존 관계에 머물던 이 국가들은 서로 간에 양자협정과 관세동맹을 시도하며 수평적 지역 통합의 씨앗을 뿌린다. 결국 라틴아메리카 지역주의가 강화됐다. 즉, 고립주의는 지역 통합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은 셈이다.

한-미 무역협상이 타결된 2025년 7월31일(한국시각)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수출선적부두 옆 야적장에 완성차가 대기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인 자동차에 부과하는 관세는 0%였으나, 2025년 4월 초 25%로 올랐다가 8월7일 다시 15%로 낮아졌다. 다만 대미 수출에서 한국산 자동차가 유럽연합 생산 자동차에 대해 누렸던 2.5% 관세 혜택은 사라졌다. 연합뉴스

한-미 무역협상이 타결된 2025년 7월31일(한국시각)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수출선적부두 옆 야적장에 완성차가 대기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인 자동차에 부과하는 관세는 0%였으나, 2025년 4월 초 25%로 올랐다가 8월7일 다시 15%로 낮아졌다. 다만 대미 수출에서 한국산 자동차가 유럽연합 생산 자동차에 대해 누렸던 2.5% 관세 혜택은 사라졌다. 연합뉴스


고립주의가 낳은 중남미 지역주의와 미 양자협정 체결

중남미의 새로운 움직임에 화들짝 놀란 미국은 1934년부터 자국 중심의 아메리카 통상질서 재편을 모색하며 상호무역협정법(Reciprocal Trade Agreements Act)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중남미 국가들과 양자협정을 통해 관세를 일부 조정함으로써 미주 지역의 정치·경제적 연대를 꾀했다. 100여 년 전 먼로주의의 재판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미국과 정치적 관계가 밀접했던 멕시코·쿠바·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미국으로부터 우호적 예외 조치를 받거나, 미국 시장에 계속 접근할 수 있는 양자협정을 체결하게 됐다. 이 국가들은 자유무역 확대를 통한 수출 다변화 대신 미국 시장에 종속적인 구조로 재편됐다.

이 사례는 오늘날 트럼프식 선택적 보호주의 속에서 ‘미국에 줄 선 국가만 혜택을 보는 양자주의 질서’와 매우 흡사하다. 오늘날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유럽, 아시아 국가들에 고율관세를 부과하는 가운데, 브릭스 정상회의 개최로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브라질을 제외하고 여타 중남미 국가들에는 비교적 관대한 새로운 합의를 모색하는 것은 이 과거의 ‘숨은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중남미 국가들에서 대미 시장 접근의 새로운 협력 기회를 찾아야 한다.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는 까닭은 변화된 새로운 체제가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서 출발한다. 시중에는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오래갈까, 트럼프가 임기를 다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한번 정해진 관세는 많은 시간이 지나도록 쉽게 철폐되지 않는다. 1930년 도입된 스무트-홀리법이 와해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고 나서다. 전쟁이 없었다면 더 오래갔을 것이다. 새로운 관세체계가 들어서면 이 새로운 질서에서 이득을 보는 집단이 국내에 빠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트럼프의 흔적은 매우 길게 남을 것이다. 서산의 긴 그림자가 아니다.

트럼프의 고관세 정책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직선적 해법으로 보인다. 한번 도입된 미국 시장의 입장료는 계속 징수될 것이다. 공짜 점심은 없고, 새로 온 보안관은 ‘질서’의 이름으로 보호비를 걷는다. 그러나 역사는 이러한 고립주의가 단기적 충격 이후 새로운 지역주의, 혹은 제국형 공급망과 같은 대체질서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직선적 해법이 낳을 다음 대체질서는

한국은 이 같은 전환기를 기민한 적응과 전략적 조율로 돌파해나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다자무역체제의 후퇴라는 위기를 맞았지만, 그나마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 기술혁신, 새로운 공급망 창출과 안정화, 지역 간 연대 강화, 산업정책의 국제공조라는 기회를 부여잡는 것이다. 1930년대 중남미처럼 새로운 연대의 축을 모색하고, 19세기 유럽처럼 지정학적 블록의 방향성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1970년대 독일과 일본처럼 글로벌 공급망 생산 전략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글로벌 사우스 전략, 새로운 글로벌 웨스트 전략이 필요하다.

‘숨은 반복’의 역사는 그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파고드는 나침반이고 예고 없이 닥칠 파도에 맞서는 항해지도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거가 말해주는 지혜를 존중하고, 지성을 바탕으로 대외전략을 면밀하게 설계하고, 그 결정을 과감하게 행동에 옮기고 있는가.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20세기 질서가 무너진 격변의 시대. 복잡한 세계 경제 현안을 깊은 시각으로 해설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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