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출신 시각장애인 아나키스트의 우화집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쓸쓸해요, 쓸쓸해. 사막에 있는 것처럼 쓸쓸해요.” 루쉰은 ‘발랄라이카’라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전통 악기를 메고 베이징에 나타난 한 시각장애 시인의 말을 기억한다. 봄과 가을이 증발해버린 1920년대 베이징에서, 그 시인은 마당의 연못에 올챙이를 풀어놓고 오리새끼를 사다 키웠다. “신음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그쪽 언어를 단 몇 개월에 익혀 그쪽 사람으로서 함께 글과 말을 통해서 계급투쟁을 같이했다.” 박노자 교수는 527호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서 이 시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고향의 풀냄새를 사랑하면서도 러시아에 안주하지 않고 국제주의적 이상을 추구했던 ‘착한 사람’을 박 교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바실리 예로센코. 4살 때 홍역으로 시력을 잃고, 에스페란토어와 아나키즘을 배운 뒤 일본·중국·인도 등 아시아를 떠돌며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불굴의 이상주의자.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로 돌아와, 소련 오지의 소수 민족 맹인 청소년을 교육하며 빈곤하게 살다간 휴머니스트. 그의 우화집 (길정행 옮김, 하늘아래 엮음)가 출간됐다. 그의 우화들은 세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담고 있지만, 슬프다. 예로센코의 작품을 중국어로 번역한 루쉰은 이 슬픔에 대해 정확한 통찰을 내놓고 있다. “나는 예로센코의 문학적 통찰이…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한 슬픔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 같이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진실함이 담긴 꿈… 혹시 이 꿈이 작가가 드리우고 있는 슬픔의 면사포가 아닐까?” 예로센코는 우화를 통해 어떤 꿈을, 그 꿈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슬픔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예로센코의 슬픈 꿈에 담긴 진실이다. 그 역시 “지나치게 꿈을 꾸었던” 루쉰은 1922년 서문에서 이것을 독자에게 당부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 꿈 속으로 불러들여 그 진실의 무지개를 보여준다면, 적어도 우리가 그 안에서 몽유병자처럼 헤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는 루쉰이 번역한 예로센코의 우화집(원래는 일어로 쓰였다)에서 모두 13개의 우화를 발췌해 묶었다. 이 중 예로센코 자신의 인생이 가장 진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사랑이란 글자의 상처’를 살펴보자. 화자는 지독하게 추운 나라 사람이다. 그는 백양나무 숲이 있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백양나무 숲으로 걸어들어간 ‘나’는 기이한 할머니를 만나 감옥 같은 궁전으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백양나무 아이’는 자신의 가슴에 ‘사랑’이란 이름을 새겨주면 ‘생명’을 다시 주겠다고 말한다. 눈을 떠보니 다시 숲 속. 그 뒤로 동양과 남방을 돌아다니다 10년 만에 다시 마을을 찾은 ‘나’는 다시 할머니를 만나 ‘백양나무 아이’의 소식을 묻는다. 그 아이는 횃불이 되어 사람들의 캄캄한 길을 비춰주다가, 백군 기병에게 살해됐다. 화자는 다시 추운 나라를 떠났다. 이번엔 그의 가슴이 계속 아파왔다. 점점 더 깊어가는 가슴의 상처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란 글자처럼 보인다.
샘물 같은 마음을 가진 이 착한 맹인은, 자신이 방문한 아시아 나라들의 모든 권력자에게 미움을 받았다. 일본 경찰은 그를 두들겨패고 진짜 맹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후비기도 했다. 조국 러시아마저 그의 귀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상처처럼 새겨진 ‘사랑’이란 글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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