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마주하는 관문은 ‘거울’이다. 12개월 안팎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외부 공간에 형상화된 자신을 감각적으로 인식한다. 철학자 자크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다. 이는 동시에 우리가 자아도취에 빠지는 첫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아직 몸이 덜 성숙한 단계이지만, 거울 속 자신은 완벽한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거울이 왜곡과 각성의 메타포로 문학이나 영화에서 즐겨 등장하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속 마법거울도 이 방정식을 따른다. 왕비는 거울을 보고 주문을 걸며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기만하려 든다. 왕비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야 비로소 존재 이유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 ‘상상계’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왕비는 좌절에 빠진다.
왕비의 마법거울이 자아를 환기시켰다면, 기술로 한껏 치장한 현대의 거울은 가상을 덧입혀 자아를 도취의 판타지에 묶어둔다. ‘메모리거울’ 얘기다. 요즘 말로 ‘스마트거울’쯤 되겠다.
메모리거울은 마법 대신 ‘트릭’을 썼다. 엄밀히 말하면 거울이 아니라 높이 1.8m짜리 대형 모니터다. 메모리거울엔 인텔의 ‘리얼센스’ 기술이 투사돼 있다. 리얼센스는 ‘인지컴퓨팅’ 기반 3차원(3D) 공간 인식 기술이다. 거울 위쪽에 달린 3개의 카메라는 사물의 깊이감이나 질감, 굴곡 등을 인지해 3D 공간을 재현해낸다. 이 리얼센스 3D 카메라는 거울을 보는 사람을 실시간 촬영한다. 여기에 특허를 낸 이미지 보정 기술을 더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실사 화면을 뿌려준다.
나르시스가 될 준비가 되셨는가? 자, 우선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어보자. 이제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패션모델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옷을 여러 벌 갈아입을 필요도 없다. 거울 앞에서 자신이 입은 옷의 색깔을 바꿔가며 어떤 옷이 마음에 드는지 결정하면 그만이다.
메모리거울은 동작 인식 기능을 내장했다. 거울 앞에서 손을 내밀어 주먹을 움켜쥐면 거울 속 빨간 스웨터가 초록색으로 바뀌는 식이다. 거울을 정면으로 보며 가까이 다가서면 옷 색깔이 바뀌고, 다시 뒤로 물러서면 또 다른 색깔의 옷을 띄워주기도 한다. 거울의 좌우를 분리해 서로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을 띄워놓고 비교해도 좋다. 촬영된 내 모습은 스마트폰 응용프로그램(앱)으로도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다. 메모리거울은 같은 옷에서 색깔뿐 아니라 패턴을 바꿔보거나 다양한 액세서리를 가상으로 착용해보는 기능도 제공할 예정이다. 다양한 디자인의 안경을 번갈아 써보는 기능도 곧 덧붙인다. 이용자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화면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공유하거나 전자우편으로 전송하고, 휴대기기에 직접 내려받을 수도 있다. 원한다면 매장 직원을 그 자리에서 연결해 구매 관련 조언을 들어도 된다. 일단 매장에서 옷을 입어보고 나중에 집에서 원하는 옷을 구매해도 상관없다.
판매자에겐 메모리거울이 매력 있는 호객꾼이다. 메모리거울은 온라인과 ‘클릭’에 익숙한 고객을 매장으로 자연스레 유도한다. 매장 방문이 늘어나면 매출이 오를 가능성도 덩달아 뛴다. 나이, 성별, 신체 치수, 선호하는 옷 색깔과 스타일 같은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는 건 덤이다. 이렇게 쌓은 데이터는 한 번 구매한 고객에게 맞춤형 상품 정보를 제공하는 데 쓰인다. 옷맵시를 보는데 갑자기 거울에 추천 상품과 함께 할인쿠폰이 뜬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고객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관심 상품으로 등록해뒀다 집에 가서 ‘구매’ 버튼을 누를 확률은 올라간다.
메모리거울의 잠재력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예컨대 운동 전후 바뀐 몸매를 두 화면에 나눠 보여주면 어떨까. 성형 후 몰라보게 바뀔 내 모습을 미리 이리저리 매만져봐도 좋겠다. 머잖아 성형외과나 헬스클럽 한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를 ‘상상계’에 빠뜨릴지도 모르겠다.
메모리거울은 인텔과 메모미랩스가 공동 개발했다. 올해 8월 ‘인텔 개발자 포럼 2015’에서 첫선을 보였다. 지금은 미국 패션 브랜드 ‘니만 마커스’ 매장 3곳에서 시범 운영되고 있다.
기자 asadal@bloter.ne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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