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극 세종기지 부근 펭귄마을, 턱끈펭귄과 아델리펭귄이 함께 산다. 사진 신동호
뒷산으로 충분하다. 떡갈나무가 2월의 외투를 벗고, 지빠귀 울음에는 3월이 들어 있다. 밤은 두더지가 파낸 흙더미를 무언극처럼 남긴다. 아침은 입김과 능선에 비스듬하게 걸린 안개, 희지만 희지 않은 것들의 풍경으로 온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수의 소박함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익숙해져야 한다. 바위에 앉아 거친 살갗을 쓰다듬으며 지친 시간을 얼룩지게 지워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젖은 땅, 나무뿌리를 세심하게 살피면서 쉬지 않고 산길을 달린다. 강아지들과 달리면 산의 흔적을 만나서 좋다. 초코는 냄새를, 하늘이는 소리를 쫓아간다. 뒷산만으로도 생명이 충만하다.
부스럭, 이불을 들추는 소리에 강아지들이 달려온다. 물을 가지러 부엌에 가면 가만히 기다린다. 돌아와 다시 누우면 낑낑, 운동복을 입으면 펄쩍펄쩍, 어서 목줄을 매라고 안절부절이다. 초코는 열세 살 푸들 암컷이다. 정 깊은 한 선배가 우리 집 막둥이 친구로 보내준 강아지다. 그 무렵 막둥이는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사람 언니와 동물 동생은 침대에서 같이 자고, 거실에서 먹을 걸 두고 다투며 함께, 아주 천천히 성장한다. 하늘이는 여덟 살 푸들 수컷이다. 초코가 낳은 강아지 일곱 마리 가운데 막내, 허약해서 집에 남겨두었는데 귀여운 맹수가 됐다. 막둥이 보호자로 낯선 이들의 접근을 막는다. 상처가 나면 부지런히 핥아준다. 전생에 의사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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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는 밤새 참았던 변을 산의 초입, 솔잎 더미 위에 얹어놓는다. 하늘이는 좀 낯을 가린다. 이른 아침 산책 나온 할아버지가 저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엉덩이를 깐다. 이제 달릴 준비가 끝났다. 초코는 가파른 계단 길을 성큼성큼, 앞만 보고 간다. 목줄이 팽팽해지도록 끌어당긴다. 썰매개였다면 분명 리더가 됐을 것이다. 변함없이 묵묵히 전진한다. 하늘이는 부산하다. 소나무들 사이에 숨은 고양이를 쫓아간다. 컹컹 짖으면 어디선가 산비둘기가 날고, 까마귀가 까악 하고 덤빈다. 하늘이 때문에 알게 된다. 푸들은 사냥감을 물어오는 개가 아니라 짖어서 새들을 놀래는 사냥개다. 다른 개들보다 짖는 소리가 크다. 아랫집의 민원에 늘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달리면서 짖다 말고 하늘이는 자주 뒤를 돌아본다. 잘했지? 묻는 듯, 주인놈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듯 하여 얄밉다.

수락산 귀임봉 데크에서 쉬고 있는 갈색 푸들 초코와 검정 푸들 하늘이. 사진 신동호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캥거루와 눈이 마주친다. 2021년 12월, 남반구는 한여름이었다. 도시 안에는 약간의 후회, 도시 뒤에는 아직 인간이 싫은 황야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 애버리지니들은 이곳을 ‘캄베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불렀다. 땅속 물의 소리를 쫓아 맨발로 만나 안부를 확인했을 것이다. 시드니와 멜버른 사이, 타협의 산물로 수도가 된 건 이주민들의 계획이다. 욕망을 좇아 사람들이 모였다. 코로나19가 끝나지 않은 힘든 시기, 문재인 대통령의 순방 역시 안정적인 광물 수입을 위해서였다. 자국 이기주의가 도처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관계가 아주 중요했다. 우리 광물 수입의 절반이 거기서 온다. 케이(K)9 자주포 수출의 방산협력으로 신뢰를 쌓는다. 그래도 ‘채굴’로 황폐해진 오스트레일리아와 광물 수입 없이 부를 축적할 수 없는 우리 사이의 삶이 불편하다. 수소경제, 태양광, 탄소포집장치 같은 친환경 분야의 협력 약속만이 불편함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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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라의 새벽을 달리면서 ‘숲이 우거진 수도’라는 별명을 체감한다. 여기서는 대형 산불과 고갈돼가는 나무와 목초지를 볼 수 없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벌어진 인간의 무지 위에 녹색을 덧칠한 느낌이다. 1788년 유럽인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왔을 때, 빅토리아의 유칼립투스는 절반 가까이 베어져 바다를 건너가 종이가 된다. 유럽에 필요한 양모를 위해 양이 방목되고, 유럽인들의 사냥 취미를 위해 들여온 토끼가 초목을 쓸어버린다. 다행이라면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자연의 소리에 응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풍경을 되돌리려는 안간힘을 캥거루들이 오래 바라본다.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의 거리를 달리다가 만난 캥거루. 사진 신동호
새벽의 캥거루는 곧 나무 그늘 속으로 숨어들 것이다. 벌리 그리핀 호수 부근 초지에서 밤새워 돌아다니다가 이슬 머금은 풀을 뜯는다. 가까이 다가가도 고개만 들 뿐, 인간이 때때로 포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인간을 오래도록 경험한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동물들은 인간을 잘 안다. 도망치거나, 맞서거나, 스스로 길들여져서 번식에 유리해지거나(나는 인간이 늑대 새끼를 잡아 길들였다는 가축화 이론보다 친절한 성격을 가진 늑대가 인간 거주지 주변을 서성이다가 스스로 길들여졌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동하거나 해서 인간과 공존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물들은 서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서툴다. 동물의 멸종으로 당황하고 자신의 멸종을 걱정한다. 캔버라에서는 캥거루가 인간의 심연에 다다른다. 계획도시지만 야생동물들이 가까이 있어 괜찮다. 어처구니없는 무저항이 인간의 마음을 조금씩 바꿔냈을 것이다. 늦었지만 괜찮다.
네안데르탈인에 관심이 많다. 정확히는 우리보다 힘도 세고, 뇌도 더 컸다는 네안데르탈인이 왜 사라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한때는 머리뼈에 구멍이 뚫린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을 두고 사피엔스의 살해를 의심했다. 제노사이드를 인간 내면의 잔인함이라 확신했다. 달리기에 빠지면서 사냥 방법의 비효율성으로 멸종했다는 이론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동물이 지칠 때까지 끈질기게 쫓아가 고기를 얻는 것은 피를 흘리지 않아 다른 동물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 추적을 위한 관찰, 추상적 예측이 상상력으로 발전해 인간의 인지능력도 높아졌다. 맞서 찌르다보면 부상을 막을 수 없었다. 빙하기로 큰 동물이 줄어들자 네안데르탈인도 굶주림으로 하나둘 떠났다. 장거리 달리기의 승리였다. 과학적으로만 본다면 생식 이론이 가장 믿을 만하다.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 사이, 이종교배로 태어난 아이는 사피엔스와만 생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될 수 없는 네안데르탈인이라니, 이종 간의 사랑이 멸종이라는 비극을 썼다. 그런데 사실은 강아지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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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의 캥거루들이 새벽녘 공원의 풀을 뜯고 있다. 사진 신동호
인류학자 팻 시프먼은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시기와 사피엔스가 개와 함께 살게 된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데 주목한다. 사피엔스는 눈동자의 흰자위로 개와 교감하고, 개가 엘크와 들소를 쫓아 진을 빼놓으면 손쉽게 먹잇감을 구할 수 있었다. 몽골에서는 ‘일곱 마리의 개와 함께 겨울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빙하기 동굴에서 개가 우리에게 어떤 친구가 돼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늑대를 길들이지 못한, 혹은 길들여지기 위해 찾아온 늑대를 받아들이지 못한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이 요즘 내가 받아들인 최신 이론이다. 어쩌면 미래 우리를 위해 강요된 이론일지도. 아무튼 그래도 강아지들이 고맙다. 강아지들을 대하는 이웃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마치 4만년 전 운명을 가른 인류의 태도와 비교해본다. 개와 함께 산책해라, 친절해질 것이다. 개와 함께 뒷산을 달려라, 달리기가 즐거워질 것이다. 자연과 익숙해져라,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멸종이 거기에 달렸는지 모를 일이다.

남극에서 마주친 빙벽, 서늘하다 못해 푸르다. 사진 신동호
동물은 잘못한 것이 없다. 2006년 남극 세종기지에 머물렀다. 기지에서 2㎞ 남짓, 펭귄마을의 턱끈펭귄, 아델리펭귄들은 어울려 산다. 사람들 발 주변에 함부로 모여든다. 1915년 남극의 유빙에 갇힌 인듀어런스호 선장 섀클턴과 승무원들이 이 천진난만의 펭귄들을 먹고 생존했다. 다행인가 싶다가도 당혹스럽다. 위대한 모험과 발견의 시대에서 우리는 위대한 겸손과 공존의 시대로 건너가는 중이다. 도둑갈매기가 툭하면 모자를 채간다. 모자를 뺏으려고 손짓을 해서도 안 된다. 남극의 모든 생물은 그대로 보존할 의무가 있다. 남극협약이다. 웨들해표가 해안에서 쉬고 있다. 눈만 뻐끔뻐끔한다. 저토록 무방비한 동물이라니. 남극 지의류는 곰팡이와 조류로 구성된 공생생물체다. 8년 동안 0.5㎜가 자라는 지의류에 느린 성장 속도를 운운하는 건 단지 인간의 기준일 뿐이다.
자연의 풍경은 삶을 바꿔낼 용기를 준다. 서늘하도록 푸른 빙벽 앞에서 작아지는 경험을 한다. 남극에서 돌아오자마자 등산학교 지원서를 낸다. 바위에 매달려 절절매면서 자연과 얼마나 멀리 있었는지 깨닫는다.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온 오가피 잎사귀가 눈에 들어올 무렵 겨우 암벽반을 졸업한다. 나뭇가지들이 그려낸 자음과 산새들의 모음이 만나 인간의 소리를 흉내 낸다는 것도 눈치챈다. 오르면서 내려오고, 내려오면서 오르는 산등성, 길을 벗어나야 비로소 오는 작은 공포, 자연이 매일매일 달라진다는 것을 달리면서 받아들인다. 나 또한 매일매일 달라진다. 그렇게 달리기도 시작했다.
멀리 가야 보이는 건 아니다. 강아지들을 데리고 나가는데 3월이 눈을 흩뿌린다. 걱정스러운 일들이 모서리 위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산의 속살이 하얗게 드러난다. 열세 살 초코는 여전히 힘이 세다. 오늘은 막둥이가 ‘채소장’이라 부르는(‘채석’이란 단어가 낯선 모양이다) 수락산 채석장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마구 데리고 간다. 습한 눈 때문인지 벌써 가지 몇 개가 부러져 있다. 삶의 무게란 저리 습한, 눈물 때문일 것이다. 저러다가 죽음조차 그리 황망하지 않아질까 싶다. 캔버라에서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을 터이다. 거기 사람들은 캥거루랑, 나는 강아지들이랑 자연으로 간다. 또 어디서 3월이 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들려준다.
글·사진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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