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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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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쓰여도 괜찮은 풀, 겐티아나

동서양 모두 치유식물로 쓰이는 용담…약재부터 칵테일 증류주 원료까지 쓰임새 많은 기특한 풀
등록 2024-09-13 17:39 수정 2024-09-20 17:50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중1 학생)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중1 학생)


용담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가을이 온 것이다. 초록색 잎을 배경으로 트럼펫을 닮은 푸른 보라색 통꽃 대여섯 송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피는 용담. 짙은 파랑과 보라 사이, 좀처럼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강렬한 색감과 빛깔이다. 그런데 그 통꽃을 한 번 활짝 피우고 마는 것이 아니라 꽃부리를 열었다가 앙다물었다가 다시 열기를 반복한다. 용담은 스스로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어떻게? 온도와 빛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온 연구에 따르면 용담이 16도 이하 온도에 노출되면 30분 이내에 꽃을 오므리고, 반대로 닫힌 꽃이 22도 이상 온화한 온도에 30분 넘게 노출되면 다시 열린다고 한다. 단, 어두운 조건에서 꽃을 여는 반응은 더딘 편이라고. 온도와 빛 모두를 꼼꼼히 따져보고 나서야 꽃망울을 틔울지 말지를 용담은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이 찾아와 기온이 떨어지면 꽃을 오므리고, 날이 밝아 온화해지면 움츠렸던 꽃잎을 다시 펼친다는 말이다.

가을이 슬며시 다가올 때 용담은 푸른 보라색 꽃을 피운다. 허태임 제공

가을이 슬며시 다가올 때 용담은 푸른 보라색 꽃을 피운다. 허태임 제공


동서양 구분 없이 사람 구한 약용식물

용담은 약재로 원체 유명하다보니 되레 꽃 자체는 주목을 덜 받는 것 같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1853년 9월3일 일기에 용담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놀라울 정도로 짙고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파란색이었다. 사각형이나 마름모꼴의 위아래가 막힌 좁은 기둥이나 얄따란 반구형으로 생긴 꽃이다. 전체를 보면 고대 도시의 뾰족한 돔이 모여 있는 것 같다. 하늘이 피운 꽃이다.”

하늘이 피운 꽃이라는 극찬은 한자 문화권에서도 그대로 이뤄졌다. 곰의 쓸개인 웅담보다 약효가 더 좋다고, 용의 쓸개라는 뜻에서 용담(龍膽)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 임금(龍)에게 바친 쓸개(膽)만큼 귀한 대접을 받은 약재라서 용담이라 부른다는 속설도 있다. 좋은 약일수록 입에는 쓰다고 했던가. 용담의 체내 성분(아마로겐틴과 겐티오피크로사이드 등)은 식물의 쓴맛을 평가하는 척도로도 쓰인다.

지구에는 340여 종류의 용담속 식물이 온대 지방과 고산 지역에 산다. 그중 국내에 자생하는 건 10여 종이다. 식물분류학 전공 수업은 라틴어로 된 식물의 학명을 익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천 종의 학명을 일일이 외워야 하니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수고로움을 용담만큼은 덜어줬다. ‘괜찮아’로 기억하면 되는 용담 무리의 학명은 겐티아나(Gentiana). 십수 년 전 학명 암기 시험을 볼 때마다 속으로 속삭였다. 용담의 학명 중 첫 번째 단어인 속명은 겐티아나, 괜찮아, 용담은 참 괜찮은 식물.

그 학명은 그리스 문화권의 고대 국가 일리리아(지금의 알바니아에 해당)의 마지막 왕, 겐티우스의 이름에서 나왔다. 용담의 약효를 처음 기록했고 실제로 전쟁터에서 용담을 처방해 수많은 병사를 구했다고 알려진 겐티우스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명칭이다.

수천 년을 통과하며 동서양 구분 없이 용담의 약성은 높이 평가됐다. 중국의 전통 의학, 인도의 아유르베다, 유럽과 일본과 국내의 현대 약전까지, 용담을 중요한 약용식물로 기록한다. 20세기 말 서양의 대체의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은 ‘배치플라워요법’(Bach flower remedies)의 대표 식물 역시 용담이다.

약성은 주로 뿌리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간 얼마나 많은 용담을 약으로 쓰기 위해 뿌리째 뽑았을까. 얼마나 많은 용담이 본래 살던 땅에서 사라진 걸까. 효험이 특히 높다고 알려진, 북서부 히말라야 고산에 사는 ‘인도용담’은 멸종 위기에 놓인 대표적인 용담속 식물이다.

동아시아에 두루 사는 용담속 식물이 두 종 있다. 하나는 용담이고 또 하나는 과남풀이다. 조선의 대표 의약서인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은 위장과 간을 포함해 소화기관을 두루 이롭게 한다며, 용담과 과남풀을 주요 약재 식물로 다룬다. 그 두 종을 따로따로 구분하지 않고 한데 묶어 용담이라는 한약명을 쓴다. 관음초(觀音草)라고도 한다. 괴로움과 아픔 속에서도 중생이 열심히 그 이름을 되풀이해서 외면 도움을 받게 된다는, 아미타불의 왼편에서 교화를 돕는 관음보살의 ‘관음’을 굳이 풀 앞에 쓴 이유는 그 두 식물이 인간의 고통을 다스리는 치유의 풀이라서 그럴 거다.

용담보다 더 짙고 크고 아름다운 과남풀

용담과 과남풀은 아주 가까운 혈육 관계라 서로 닮았고 또 서로 다르다. 생김새로 쉽게 구별은 된다. 용담은 키를 최대한 낮춰 땅 가까이에 퍼지듯 자란다. 트럼펫 모양의 통꽃 꽃부리 끝이 활짝 열린다. 반면에 과남풀은 용담보다 껑충해서 내 허벅지에 닿을 정도로 자란다. 꽃부리는 탁 펴지지 않고 끝을 안으로 말고 있어서 마치 꽃이 덜 핀 것처럼 보인다. 전반적으로 과남풀이 용담보다 꽃이 더 짙고 크고 아름답다. 한때 과남풀을 ‘칼잎용담’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다. 지금의 정식 명칭은 과남풀이다. 과남풀은 앞서 말한 한자 관음초가 변한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용담과 과남풀을 신망의 화훼식물로 떠받든다. 농가에서 대량으로 키울 것을 장려하고 두 종의 품종을 개발하려는 연구도 활발하다. 도호쿠 지방의 이와테현은 반세기 넘도록 용담을 육종했다. 자국에서 생산하는 원예 용담류의 60% 이상이 이와테현에서 나오고 유럽과 미국, 뉴질랜드에 수출도 한다. 육종 기술이 도입되기 전에는 야생의 용담이 거래되었기 때문에 용담이 살던 자생지가 심각하게 망가지는 일도 있었다. 상업적 수요가 꾸준히 느니 이와테현은 용담 품종을 개발해서 키웠다. 1960년대 중반에 시작해 최초의 용담 원예 품종인 ‘이와테’를 1977년에 개발했다. 그 이후로 20개 이상의 품종이 나왔다고 한다. 당분간 이와테현은 용담 연구에 투자를 더욱 늘리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꽃을 여닫는 용담의 신비로운 행위라니

벌 중에 독립생활을 하는 좀뒤영벌이 있다. 용담꽃 안에 은신하는 벌이다. 무리를 짓지 않고 각자 살아가기 때문에 동족의 온기를 구할 곳이 마땅치 않다. 밤에 체온이 떨어지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그래서 용담을 처소로 삼은 거겠지. 좀뒤영벌의 몸집은 용담 꽃봉오리와 크기가 엇비슷하다. 용담꽃이 닫히는 저녁에 자신의 체구에 꼭 맞는 용담 품에 들어가 꿀을 먹고 잠을 자며 밤을 안락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튿날 꽃이 열릴 때는 꽃가루를 잔뜩 묻히고 밖으로 나온다. 다른 꽃으로 이동하며 좀뒤영벌은 이 꽃의 꽃가루가 저 꽃의 암술머리에 가닿도록 한다.

꽃을 여닫는 용담의 신비로운 행위에 우연이란 없다. 지독하게 능동적인 전략이라고 식물학자들은 말한다. 체내 수분을 조절한 결과 팽창과 수축의 힘이 생기고 그 동력으로 꽃부리를 여닫는 거라고. 수분 조절은 용담 체내 ‘아쿠아포린’이 담당한다.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아쿠아포린의 원리를 인류가 제대로 이해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92년 미국의 분자생물학자 피터 아그리 박사팀이 생리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아쿠아포린의 수분 이동과 조절 방법을 밝히면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아그리 박사는 2003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식물에는 동물의 몸에서 알려진 것보다 많은 수십 개의 아쿠아포린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식물은 환경에 반응해 체내 수분을 균형이 맞도록 바로잡는데, 그 방법은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뿌리, 잎, 줄기 등 각 신체 부위에서 다 다르게 제어하고 호르몬과 반응해 더 다양한 생리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식이다. 그러한 기작 때문에 가뭄이나 염분 피해와 같은 환경 스트레스에도 식물은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더욱 민감하고 치밀하게 기후위기에 대비하는 것일 테다.

과남풀. 용담과 같은 혈통의 자매 식물이다. 과남풀과 용담은 닮은 듯 서로 다르다. 허태임 제공

과남풀. 용담과 같은 혈통의 자매 식물이다. 과남풀과 용담은 닮은 듯 서로 다르다. 허태임 제공


술을 만들기 위해 유럽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기도

파란색과 보라색을 저토록 묘하게 배합한 생명체가 지구상에 또 존재했던가. 동트는 새벽의 시간, 꽃을 여는 용담은 눈부시다. 그 순간을 나는 놓치기 싫어 용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얼마간 관찰한다.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고 따뜻한 기운이 퍼지니 앙다물었던 꽃부리 입구가 열린다. 간밤을 꽃의 내부에서 보낸 좀뒤영벌이 몸을 쭉 펴며 날아오른다. 황금빛 털에 용담이 빚은 보얀 꽃가루를 흠뻑 묻힌 채로. 몸에 붙은 미세한 가루에 반사된 빛은 유성우처럼 흩어진다. 그리하여 나는 속수무책이 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할 방법이 당최 없게 된다.

알프스와 피레네와 쥐라산맥에는 보라색 계열이 아니라 노란색 꽃이 피는 ‘큰노랑용담’이 산다. 술을 만들기 위해 유럽에서 대량으로 재배하는 식물이다. 쌉쌀한 맛이 일품인 캄파리와 아페롤과 수즈와 같은 리큐어를 용담으로 만든다. 용담이 없었다면 클래식 칵테일 상당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 있다. 아주 먼 과거부터 유럽과 서아시아에서는 증류주의 원료로 용담의 뿌리를 썼다. 용담이 들어간 술에선 우아한 쓴맛이 감돈다. 쓰지만 깔끔하고도 향긋해서 용담 본연의 맛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증류주가 내게는 수즈 같다. 식전주로 즐기는 내 간단한 레시피는 이렇다. 수즈 2온스를 얼음 위에 붓고 그 두 배 정도 되는 소다(또는 토닉워터)를 타서 레몬 조각 하나 얹으면 끝!

술은 식물로부터 출발했다. 포도와 쌀과 보리와 홉은 알코올이 된다. 술에 풍미를 더하는 건 더 다양한 종류의 허브와 향신료 식물이다. 에탄올 분자로 변신한 식물이 내 혀를 자극하고 식도를 통과해 장기로 퍼지는 동안 마음은 아렴풋해진다. 자꾸만 얼굴은 불콰해진다. 그러면 용담처럼 웅크려 있던 내 속의 그 무엇이 환하게 열릴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내게는 혼자서 술을 음미하는 고요한 행위가 식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의식이기도 하다. 지금 피기 시작한 파랑과 보라의 용담을 보고 있노라면 부쩍 더 술 생각이 난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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