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권하’(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券下), ‘선광칠년정사칠월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 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淸州牧外 興德寺 鑄字印施)
세계가 인증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 <직지심체요절> 하권 끝장(39장)에 나오는 글인데 풀어보면 이렇다. “(이 책은) 백운화상이 뽑은 부처, 조사의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의 하권인데, 선광 7년(1377년) 정사년 7월 청주목 외곽 흥덕사에서 활자를 만들어 인쇄했다.” 특히 ‘선광칠년 정사칠월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 인시’는 위대한 기록이다. 이 열아홉자는 <직지>가 서양 최고 금속활자본 독일 <구텐베르크 성서>(1455년 간행)보다 78년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이라는 것을 인증했다.
유네스코는 2001년 9월4일 <직지>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했고, <직지> 본향 충북 청주는 이날을 ‘직지의 날’로 정했다. 청주시는 2023년 9월4일 직지의 날을 맞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직지와 한지: 한국의 인쇄 및 종이유산’ 특별전을 열어 세계에 <직지>를 새겼다.
특별전에선 <직지> 복본을 전시했다. 복본은 종이 질, 먹 성분, 오염 상태 등을 분석해 원본처럼 복원하는 3차원적 복제본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2021~202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등과 공동연구를 통해 <직지>가 평량(종이 두께·무게) 27.5±2.5g/㎡, 백색도 60% 전통 한지에 카본이 주성분인 먹으로 찍은 것을 확인하고, <직지> 복본을 제작했다.
복본을 전시한 것은 우리에게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유일의 <직지>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 한 권만 있다. 워낙 귀한 자료여서 자주 공개하지도 않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특별전’ 때 <직지>의 존재를 알린 데 이어, 이듬해 ‘동양의 보물 특별전’ 때 잠시 공개했다. 이후 베일에 싸였던 <직지>는 2023년 4~7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 때 5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왔다. 이 특별전에 초대된 이범석 청주시장은 “50년 만에 공개된 <직지>를 만나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금속활자 인쇄는 정보통신의 혁신으로 불린다. 서양은 성경, 동양은 불경 간행 등 활자문화를 통해 지식·정보가 폭발했는데 금속활자가 촉매 구실을 했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세계인쇄문화사에서 검증되진 않았지만 <직지>-<구텐베르크 성서> 사이에 금속활자 인쇄 정보가 교환됐을 수도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활자로드’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도서번호 109, 기증번호 9832’. 우리 것이지만 우리 것이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있는 <직지>의 주소다. 프랑스로 간 <직지>의 이력은 표지에 남았다. <직지> 표제 옆 ‘711’은 경매 번호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뒤 초대·3대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직지>를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뒤 1911년 3월 파리 경매장에 내놨는데, 이때 골동품 수집상 앙리 베베르가 180프랑을 주고 샀다. 앙리 베베르는 1952년 <직지>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고, 도서관은 표지 아래쪽에 한국 서적 109번 뜻을 담은 도장 ‘COREEN 109’를 찍었다.
<직지>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서 가치도 크지만 책 자체 가치도 빼어나다. <직지>의 본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고려말 백운 화상 경한(1299~1374) 스님이 부처·선사·조사 등의 가르침 가운데 주요 부분을 가려 기록한 책이라는 뜻을 담았다. 불가에 전해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이란 책을 초록했다는 설도 있다. <직지 강설>을 펴낸 무비 스님은 <직지>를 두고, ‘선불교 최고의 교과서’라고 했으며, 도올 김용옥 선생은 “직지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서가 아니라 내용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책 <직지>를 다시 가져올 순 없을까? 답은 ‘Non’(안 돼)이다. 그동안 수차례 요구했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 쪽은 반환은커녕 대여조차 거절한다. <직지>의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직지> 본향 청주는 위대한 공예품 <직지>의 얼을 공예비엔날레로 잇는다. 1999년부터 홀수 해마다 여는 비엔날레는 12번째다.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는 9월1일 개막해 ‘사물의 지도-공예 세상을 잇고, 만들고, 사랑하라’를 주제로 10월15일까지 45일 동안 펼쳐진다.
비엔날레 주 무대가 뜻깊다. 청주 내덕동 문화제조창과 동부창고 일원인데, 전엔 청주연초제조창이었다.
청주연초제조창은 1946년 11월 경성 전매국 청주 연초공장으로 출발해 1999년 제조창 안 담배원료 공장 폐쇄에 이어 2004년 12월 완전히 문 닫을 때까지 58년 동안 운영됐다. 노동자 2천~3천 명이 현란한 손기술로 해마다 담배 100억 개비를 생산하던 한국 최대 담배공장이었다. 건물만 24동에 면적은 12만2181㎡에 이른다.
옛 제조창은 이제 문화공간이다. 본관동(5만1515㎡)은 문화제조창으로, 남동관(1만9856㎡)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거듭났다. 본관동은 천장 높이 6.5m, 바닥 면적 9천㎡, 길이 180m 등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어떤 규모의 작품도 수용한다. 청주는 이곳을 화력발전소에서 세계적 미술관으로 거듭난 영국 테이트모던, 기차역이었던 프랑스 오르세미술관, 방적 공장이었던 독일 슈피너라이에 버금가는 문화 명소로 키우고 있다.
2023 청주비엔날레에선 정열의 스페인 공예가 눈길을 끈다. 이번 비엔날레 주빈국 스페인은 공예진흥원 푼데스아르테 등이 영혼과 물질을 주제로 150여 점을 출품했다. 때마침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피카소 도예 특별전’을 진행하는데,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기증한 피카소 도예 108점이 선보인다. 이웃 동부창고 등에선 플라멩코 공연, 스페인 문화 강연 등을 곁들인 스페인 문화주간 행사도 이어진다.
문화제조창 3층에선 ‘대지와 호흡하며 함께하는 사물들’ ‘인간-자연-사물을 연결하는 문화적 유전자와 맥락들’ 등 5가지 구성으로 18개국, 작가 63명(팀 96명)의 작품이 전시된다. 고혜정 작가의 ‘The Wishes’ 등 2023 청주국제공예 공모전 수상작 전시,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등이 선보이는 미디어아트, 공예·예술 전문가가 참여하는 학술행사, 시민 참여형 비엔날레 ‘어마어마 페스티벌’, 조소·회화·서예 등 작가 60명이 참여하는 ‘작가들의 사물전’, 공연 등도 이어진다. 강재영 청주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은 “청주비엔날레가 공예를 통해 이 시대를 반성하고, 미래를 상상하고, 일상에서 실천을 모색하는 새로운 문명의 지도가 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청주=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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