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봤던 수많은 동화책 속 왕자와 공주의 결말은 늘 ‘그들은 결혼했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났습니다. 조금 더 자라서 본 수많은 소설·드라마·영화에서 큰 갈등 요소- 혹은 재미 요소- 중 하나는 서로 사랑에 빠진 연인이 함께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주변의 압력이었고, 이른바 ‘해피 엔딩’이란 것은 이들이 온갖 고난에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결혼하는 장면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현실의 결혼생활은 결코 동화나 드라마처럼 ‘영원히 행복한’(happily ever after) 상태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죠. 심지어 연애 시절에는 나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상대의 행동이나 기질, 특성이 결혼 뒤에는 오히려 사랑이 식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는 아이러니한 경우도 적잖습니다. 연애할 때는 나를 하나하나 챙겨주고 보듬어주는 것이 좋아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나를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듯하고 사생활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대에게 숨이 막힌다거나, 언제나 친절하고 넉넉하게 베풀 줄 아는 마음씨가 좋아 결혼했더니, 살다보니 남에게 좋은 일만 해주고 정작 내 것은 챙기지 못해 매번 손해만 보는 현실에 실망하는 것처럼 말이죠. 행복한 결혼생활을 오래 유지하는 부부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결혼 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아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전과는 다른 삶에 적응해 유연하게 대처한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포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세포는 개체의 성장과 유지를 위해 계속 분열합니다. 세포가 한 번 분열한다는 것은 기존 생을 끝내고 새로운 세포로 재탄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위험을 내포하는 갈림길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에는 유전물질 디엔에이(DNA)가 한 세트씩 존재합니다. 세포 하나가 가진 사람 유전체 세트는 기본 구성 단위인 뉴클레오티드(오탄당-인산-4종류의 염기 중 하나로 구성된 한 세트) 약 30억 쌍이 마주 보고 이중나선 구조로 꼬인 형태입니다. 보통 뉴클레오티드 1개의 크기가 약 0.34㎚이므로, 30억의 모둠은 약 1m, 두 줄이니 각각을 떼어서 이어보면 2m에 이릅니다. 사람 세포의 크기는 세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100㎛ 내외임을 고려하면(단순히 계산해도 1m는 100㎛의 1만 배입니다), 작디작은 세포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이죠.
세포는 한 번 분열할 때마다 이 기다란 DNA의 모든 가닥이 전부 다 복제됩니다. 전체를 한꺼번에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뉴클레오티드 30억 개에 2를 곱한 개수를 전부 하나씩 복제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 세포의 DNA 중합효소가 성능이 좋다 해도 세포분열을 할 때마다 똑같은 작업을 60억 번씩 하면서 실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인체에는 DNA 중합효소가 뉴클레오티드를 잘못 복제하는 것을 잡아내 이를 다시 고치는 성능 좋은 자가 점검 시스템이 있지만, 여전히 모든 실수를 잡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포는 한 번 분열할 때마다 복제 오류에 따른 돌연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있죠. 돌연변이는 무작위로 일어나기에, 특정 부분을 집중해서 더 신경 쓸 수도 없습니다. 또한 세포분열 과정에서 자외선, 엑스레이를 비롯한 방사선, DNA에 손상을 주는 활성산소와 세포독성을 지닌 각종 화합물에 노출되는 경우, 복제 오류 비율은 더더욱 높아집니다.
한 권의 책으로는 모든 이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없으니, 지식이 확장돼 인류가 더 똑똑해지기를 바란다면 책을 더 많이 필사해서 더 많은 이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글자가 30억 개라면 원고지 1500만 장을 빈칸 없이 꽉 채우는 분량입니다. 두 가닥이니 3천만 장이겠네요. 원고지 3천만 장에 이르는 글자를 하나하나 베껴 쓴다면 아무리 집중해도 몇 개쯤 틀릴 가능성이 크지요. 옆에서 시끄럽게 굴고 자꾸 불러대고 눈앞을 가리는 등 훼방을 놓는다면 잘못 베낄 확률은 기하급수로 높아지는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필사본만을 접한 사람들은 원본을 알 수 없기에 다시 이를 기준으로 필사해 오류가 추가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필사본으로만 책을 만들면 점점 원본과 다른 내용이 담길 수밖에 없지요.
오류 증폭을 막는 진화 기술1961년 레너드 헤이플릭과 폴 무어헤드는 세포분열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환경을 완벽하게 유지해줘도 세포는 일정 수 이상 분열한 뒤에는 스스로 사멸하는 현상을 관찰했고, 또 일부 세포는 분열을 멈춘 상태 그대로 상당 기간 지속한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훗날 연구 결과, 이렇게 분열을 멈춘 세포의 경우, 상당수가 복제 오류에 따른 DNA 손상과 세포 내부 환경 손상을 가진 ‘위험한’ 세포였다고 합니다.
보통의 세포분열기와 간기를 번갈아 거듭하면서 살아가지만 분열 스위치가 꺼진 노화세포는 다시는 분열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부 손상이 축적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포 사멸에도 저항성을 가져 몇 달에서 몇 년까지 더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노화세포는 왜 생길까요?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조지 윌리엄스(1926~2010)는 1957년 발표한 논문 ‘다면발현, 자연선택 그리고 노화의 진화’(Pleiotropy, Natural Selection, and the Evolution of Senescence)에서 노화는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종의 번성 가능성을 위해 진화적으로 세심하게 선택된 현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노화세포의 존재는 오히려 종의 생존을 위해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세포가 분열을 여러 번 하면, 아무리 환경이 완벽해도 점점 오류가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세포생명체에게 세포 하나하나의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개체의 생존이며, 시스템의 균형입니다. 그러다보니 특정 세포가 오류투성이가 돼서도 여전히 세포분열을 거듭한다면, 오히려 오류를 증폭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오류 세포는 암세포로 흑화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진화는 현명하진 않지만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효율적인 시스템을 남기는 특성이 있습니다. 진화는 오류 세포를 계속 분열시키기보다는 분열 스위치를 꺼버리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오류를 가진 채 계속 증식해 오류를 증폭하느니 차라리 분열을 멈춰버립니다. 하지만 세포를 그냥 없애버린다면 당장 공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세포가 죽어버린 곳을 다른 세포가 다시 분열해서 메워야 하는데, 그 세포의 분열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진화는 오류 세포에게 잔인함과 배려가 반반씩 섞인 효율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더는 분열해서 오류를 증폭하지 말 것, 대신 살아남아 일을 수행할 것, 사이토카인 등 염증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을 분비해 면역세포를 늘 준비 상태로 대응시킬 것, 그리고 오류가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면 면역세포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여 조용히 사라질 것. 이렇게 말이죠. 노화세포의 가장 큰 미덕은 오류 상태로 세포분열을 거듭해 암으로 흑화되는 것을, 그래서 개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만약 노화세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세포는 모두 오류의 비율에 관계없이 계속 분열할 테고, 이는 암세포 발생 가능성을 높여 개체 전체의 생존에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노화세포는 나이를 한참 먹은 뒤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에도 만들어집니다. 복제 오류는 언제나 일어나니까요. 다만 젊은 시절의 노화세포는 노화세포의 순기능, 즉 암을 억제하고 시간을 벌어줘 개체 전체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노화세포가 진화적으로 선택된 것이죠.
그러나 진화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인류가 이토록 오래 살게 되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평균수명은 50살을 넘지 못했고, 이 나이쯤에는 노화세포가 좀 생기는 것이 개체 수명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이후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평균수명을 크게 연장했지만, 엄청난 세월을 거쳐 느리게 일어나는 진화시스템이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체시계보다 느린 진화시계50대가 넘어가면 면역세포 기능이 떨어져, 효과적으로 노화세포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럼 노화세포는 점점 더 늘어나고, 이들이 분비하는 사이토카인이 주변 세포를 손상해 세포 사멸을 유도하지만, 정작 노화세포는 스스로 지닌 세포 사멸 저항성에 따라 살아남는 일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분열이 불가능한 노화세포는 지금 당장 살아남는다 해도 미래가 없습니다.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전체 시스템의 균형이 무너지고 개체도 생존을 담보할 수 없게 되죠.
노화세포의 등장은 다세포생명체가 전체 시스템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를 번식시킬 때까지 개체 생존을 도모하는 전략으로 선택된 결과입니다. 인류의 수명이 늘어나 번식 이후의 삶이 이전 시간보다 훨씬 더 길어진 현대인에게 노화세포는 건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습니다.
사랑을 이룬 연인이 이후로도 긴 세월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서로에게 맞춰 조율하고 바뀌는 과정이 필요하듯, 한때는 진화상 이점으로 발생한 노화세포도 인간의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달라져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진화의 시계는 인간의 생체시계보다 엄청나게 느려서, 자연선택의 힘을 빌리기에는 우리에게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수명을 늘렸듯, 스스로의 힘으로 노화세포를 조절하는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이미 몇몇 실험 결과, 노화세포의 선택적 제거가 개체의 노화를 늦추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노화세포의 무조건적인 제거는 암 발생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노화세포에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을까요? (제1414호로 이어짐)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후화되어가고 있나요. 노쇠되어가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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