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불행을 경쟁하고, 가장 큰 피해자가 가장 올바르다는 논조의 질문은 정치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조건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34쪽, 2013년
이용수씨 기자회견 이후 한동안 답답함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두어 번 후원금을 냈을 뿐 정의기억연대와 아무 상관 없는 내가 이런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 그들과 긴 시간 함께 싸워온 활동가들은 오죽할까. …여기까지 썼을 때 생존자 쉼터를 지키던 손영미 소장의 비보가 전해졌다.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하랴. 다 그만두고, 이 글도 다른 주제로 쓰는 게 낫지 싶다. 익숙한 것, 감당할 수 있는 것, 덜 힘든 이야기를 하며, 늘 그랬듯 피하고 싶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기에 막막한 심정으로 탁자 위의 책을 펼친다. 지난 한 달 동안 시도 때도 없이 펼쳐보며 두번 세번 읽은 책,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다. 나온 지 한참 된 책이다(초판 2005년). 나도 오래전에 읽었는데 그때는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번엔 뜻을 헤아리느라 거의 모든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을 펼치자 머리말부터 밑줄 친 문장이 가득하다. 15년 전에 쓴 그 문장들을 읽는데,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되살려낸 이들은 고통을 겪고, 역사를 삭제했던 이들은 “불행을 경쟁”시키며 다시 삭제를 시도하는 오늘의 현실이 떠오른다. 그에 맞서 큰소리로 읽는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다, 상처에서 새로운 언어가 자란다.” 이 문장이 나를 위로했듯 상처 입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생각해보면,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배우는 일이, 더구나 막힌 귓구멍을 향해 말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래도 “거의 모든 인간의 고통은 ‘말’, 즉 지배 규범을 내면화할 때 발생”하므로, 고통을 벗어나려면 새로운 언어로 말해야 한다. “언어는 차별의 시작이다.” 그리고 언어를 바꾸는 건 차별을 금지하기보다 어렵다. 가령 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당연하듯 장애인이란 말도 당연하게 여겼다. 한데 이 책은 장애인이란 말이 차별적임을 일깨운다. 장애/비장애,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없을뿐더러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상’이란 하나의 기준이 없다면, 늙으면 늙은 대로 병들면 병든 대로 각자 자기의 조건에 맞게 살 뿐, 굳이 장애인을 만들고 차별을 금지할 필요가 없다.
여성/남성, 동성애자/이성애자, 흑인/백인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한 가지로만 규정되지 않으며 그러길 바라지도 않는다. 더욱이 누가 피해자로 평생을 살고 싶겠는가. 피해자를 넘어 인권운동가로, 주체로 살고 싶었던 이용수씨가 수십 년을 싸우고도 여전히 ‘순수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분노할수록 그는 점점 더 ‘순진한 피해자’로 부각된다.
지난 30년간의 싸움에도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되는” 남성 중심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 침묵이 아니라 새로 30년을 기약해야 하는 까닭이다.
김이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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