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할머니는 일하시는 데 탁월한 솜씨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삼베는 하루에 한 필을 짜고 명주는 사흘에 한 필을 짜셨습니다. 밭을 매도 남자들과 맞먹을 정도로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파는 데는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젊은 어머니가 장돌뱅이가 되다시피 집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건을 파는 담당이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던 해 봄, 어머니는 명주를 팔러 장에 갔습니다. 저녁때가 되어도 팔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삐루갱이(벼룩)가 다 파먹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명주 한 필과 바꾸자고 합니다. 아무도 사지 않는 삐루갱이 먹은 송아지를 망설이지도 않고 명주와 바꾸었습니다.
늦은 장꾼들의 도움을 받아 송아지를 끌고 집으로 왔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보시고 쯧쯧… 다 죽어가는 송아지를 어쩌려고 사왔느냐고 걱정이 대단하십니다. 어머니는 걱정 마시라고 자기가 버젓이 잘 키워서 우리 집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십니다.
큰소리는 쳤지만 속으로는 난감합니다. 마구간에 들일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예 부엌에서 같이 키우기로 마음먹습니다. 밥하면서 버럭지에 물을 떠놓고 시뻘건 불덩어리를 집어넣습니다. 치지직 치지직직~ 무럭무럭 김이 나며 꺼먼 숯물이 우러납니다. 수건을 숯물에 적셔 삐루갱이 먹은 송아지를 골고루 닦아줍니다. 숯물로 닦으면서 보니 그냥 볼 때보다 더 심각합니다. 털이 거의 없고 살가죽을 깊이 파먹어 고름이 나는 곳도 많습니다. 고름이 심하게 나는 곳에는 아주까리기름을 발라줍니다. 아기라도 키우는 것처럼 송아지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꿉꿉하고 아프냐.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얘기를 해라.” 사람도 못 먹는 콩죽을 끓여 오지동이에 담아놓고 송아지만 먹입니다. 그것도 손으로 떠서 먹입니다.
“아이구~ 얄궂어라. 부엌 구석에서 소를 키우다니.” 흉을 봅니다. 사람들이 보고 “기구 가관이다. 뭔 언나도 아니고 저것이 뭔 소 노릇을 하겠나.” 혀를 끌끌 찹니다.
송아지는 어머니의 정성을 알았는지 한 달쯤 지나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 2년만 키우면 송아지를 낳고 또 그 새끼가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소를 늘려 다수리 논을 사서 이사도 하고 부자가 될 꿈을 꿉니다.
어머니의 꿈이 한창 부풀어오를 때입니다. 아버지가 으슬으슬 춥고 떨린다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아버지지만 병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한 사흘은 춥고 떨리고 하루는 괜찮은 하루거리(하루씩 걸러서 앓는 학질로 ‘초짐’이라고도 함)에 걸렸습니다.
가장이 농사철에 일을 못하고 앓다보니 농사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나물을 뜯어 나르고 어머니가 장에 내다 팔아 쌀 한 됫박 사다가 나물에 어쩌다 쌀 한 알 보이는 죽을 끓여 먹고 삽니다. 너무 못 먹어서 할머니와 아이들까지도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송아지를 팔아서 양식을 사먹으라고 합니다. “이 미련한 사람아, 온 식구가 다 죽은 다음에 소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합니다.
우리 집에서 송아지는 그냥 소가 아니라는 걸 사람들은 알 리 없습니다. 우리 송아지는 가족이기 때문에 생사를 같이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이 굶어죽으면 같이 죽고 살아나면 같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저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애쓰다보니 한 해가 갔습니다. 다시 봄이 되자 아버지도 그 지긋지긋한 초짐에서 놓여났습니다. 힘써 일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소 노릇을 못한다던 송아지는 버젓한 암소로 자라났습니다. 새끼를 낳기 시작합니다. 해마다 암송아지를 낳습니다. 송아지가 커서 또 새끼를 낳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하든지 소를 10마리 이상 늘려서 다수리 논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가 점점 불어납니다. 사람들은 우리 암소가 삐루갱이가 다 파먹어 비실거리던 송아지라는 걸 다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 집 암소는 새끼를 잘 낳는 소로 소문이 났습니다. 새끼를 잘 낳으니 많은 사람이 배냇소(소를 데려가서 먹이고 돌보며 2년 안에 송아지를 낳으면 송아지는 빌려간 사람이 갖고 소는 도로 돌려주는 제도)로 달라고 합니다. 황소는 농어소(큰 소를 데려가 농사를 지으며 키워서 1년 뒤 돌려주는 제도)로 주었습니다.
마지리에 사는 봉균이네가 농어소를 달라고 여러 번 부탁해 잘 크는 황소를 주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그 집 이웃 아저씨가 소를 죽이지 않으려면 소를 도로 데려가라고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먹이를 안 주고 배고파 소리를 지르면 지게 작대기로 때리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사람이면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고 가보았더니 뼈에 가죽만 씌워 있습니다. 소를 보자 눈물이 와락 솟는 걸 억지로 참고 “이 사람아, 소가 왜 그리 삐쩍 말랐나” 물으니 “세상에 그렇게 입이 짧은 소 새끼는 처음 봤소. 뭘 줘도 잘 처먹어야 말이지. 그동안 먹인 품값이나 주고 도로 가져가소” 하며 거의 반말지거리를 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서 봉균이라 안하고 봉갱이 이놈 평생 놀고먹고 잘살아라 하며 소를 몰고 왔습니다. 잘 먹이니 금세 살이 올랐지만 불쌍해서 다시 남의 집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갓난아기일 때 우리 집에 온 삐루갱이가 다 먹었던 암소는 새끼를 낳고 또 낳았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어느 가을걷이가 끝났을 때입니다. 배냇 소로 주었던 소도 돌아오고 농어소로 주었던 소도 돌아 왔습니다. 문푸래 꼭대기에 사는 나상호씨네는 암소를 배냇소로 데려가서 네 마리로 불려 소를 삼부자가 몰고 왔습니다. 그것도 소만 몰고 온 게 아니라 청차조 인절미를 해서 지게에 지고 왔습니다. 소를 잘 키워 와서 우리가 고마운데 자기네가 고맙다고 수수 백번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고동골 사는 낙현씨네도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농어소를 몰고 왔습니다. 큰 소가 열한 마리가 되었습니다. 삐루갱이 먹었던 암소만 남기고 다 팔아 소원이던 다수리 논 일곱 마지기를 샀습니다.
어른들은 세월이 흘러도 어느 해 흉년에 살아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우리 집이 밥술이나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삐루갱이 먹은 송아지 덕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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