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작은딸은 경기도 성남 사기막골로 이사 갔습니다. 살고 있는 빌라 주차장에 길고양이 여러 마리가 산다고 합니다. 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지난여름 길고양이들이 한꺼번에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는데 한 마리가 버려졌는지, 외따로 돌아다니는데 영 신통찮다고 걱정합니다.
숨만 쉬어도 번개처럼 도망가
2019년 9월 한국으로 갈 비행기표를 예매해놓은 어느 날입니다. 베트남에 있는데 작은딸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오시면 심심할까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엄마 집에 갖다놓았답니다. 또 어디서 고양이 새끼를 주워온 모양입니다. 어떻든 고양이가 있다니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뭐가 지나가는 듯한데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불을 끄고 누우니 두 개의 불빛만 반짝반짝하며 가만히 다가와 내 손 냄새를 맡아봅니다. 얼마나 작은지 손안에 쏙 들어올 것 같습니다. 숨만 크게 쉬어도 아기 고양이는 번개처럼 도망가 숨어버립니다. 물건 뒤에 숨어서 눈만 빼꼼 내밀고 절대로 사람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작은딸은 고양이 새끼를 잡아온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외톨이 새끼 고양이가 저러다 죽겠거니 했는데, 가을이 다 되도록 죽지는 않고 힘없이 돌아다니더랍니다. 등이 까맣고 얼굴은 하얗고 코 옆에 검은 점이 크게 있는 놈인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면서도 사람들이 놓아준 사료를 어렵게 먹는 것이 보입니다. 하얀색 중고양이 한 마리가, 그것도 수놈인데 새끼 고양이를 챙겨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태풍 링링이 온다고 뉴스가 나옵니다. 날씨도 점점 썰렁하게 바람이 붑니다. 새끼 고양이가 걱정입니다. 출근하려고 내려갔는데 차가 금방 빠져나간 자리에서 어디로 도망도 못 가고 주차장 가운데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그냥 두면 이번 태풍에 죽지 싶더랍니다. 들고 있던 카디건을 휙 던져 덮어씌웠습니다. 반항도 못하고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길로 새끼 고양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너무 약해서 병 유무를 알아보는 것보다는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게 수액부터 맞혔습니다. 무게를 재보니 500그램이었습니다. 사흘을 입원시켰는데, 의사선생님 말씀이 살려는 의지가 강해서 밥도 먹고 괜찮아졌답니다.
작은딸은 “엄마, 고양이가 예쁘지?” 합니다. “만져볼 수도 없는데 뭐가 예쁘냐” 하니,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 고양이가 집 안에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합니다. 맨날 고양이라고 하지 말고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태풍 링링이 올 때 주워왔으니 링링이라 할까 하다가, 무슨 중국 이름 같기도 해서, 우리 태풍이라고 하자 하니 딸은 그러자 했습니다. 태풍아 태풍아 하고 불러보니 이름이 너무 세게 들렸습니다. 그러지 말고 편안한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해낸 이름이 태평이입니다.
만져보지도 못하고 다시 베트남으로
태평이는 추르(빨아먹는 고양이 간식)를 좋아해서 추르가 먹고 싶으면 앙옹앙옹 하며 쳐다보고 조릅니다. 추르를 들고 있으면 다가와 추르만 열심히 빨아먹고 또 가서 숨습니다. 멀쩡히 혼자 놀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숨어버립니다. 큰 상자 안에 스티로폼을 깔고 한쪽 옆으로 입구를 내서 깊숙이 들어가 사람이 보이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가까이는 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안심되는 모양입니다.
빨리 사람을 따르게 해서 어디 마땅한 집이 있으면 입양 보내려고 갖은 친절을 다 떨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난해 가을 서울에 2주 머무르는 동안 태평이를 만져보지도 못하고 베트남으로 돌아왔습니다.
작은딸은 은근히 고양이 욕심이 많습니다. 입양이 안 되면 자기 사무실에 갖다놓고 키운다고 합니다. 내가 베트남으로 돌아간 뒤, 작은딸은 빈집에 들러 태평이와 서너 시간씩 놀아주고 집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오라고 하면 오지는 않지만 가만 누워 있으면 다가와서 냄새를 맡아본다고 합니다. 서너 시간 있다가 집에 간다고 하면 가지 말라고 애처롭게 양옹거린다고 합니다.
큰딸은 태평이를 꼭 입양 보내야 한다고 걱정이 대단합니다. 작은딸네는 부부가 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비실거리는 고양이 새끼를 주워다 키웁니다. 입양을 보내지 못하면 결국 자기네가 키워서 집에 가면 고양이 여러 마리가 있어 정신이 없습니다. 큰딸은 동생이 고양이를 또 늘릴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큰딸은 윗집 달콩이 아저씨한테 태평이 사진을 보여주며 입양을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달콩이 아저씨는 자기네 회사의 직원인 임평씨한테 태평이 사진을 보여주며 고양이를 키워보라고 했답니다. 임평씨는 예쁘다고 하면서 이름이 태평이니 자기 동생으로 입양한다고 했답니다.
큰딸은 얼른 태평이를 잡아놓으라고 토요일에 데리러 온다고 했습니다. 작은딸은 태평이를 입양 보내려고 토요일에 일찍부터 빈집으로 가서 작전을 짰습니다. 숨지 못하도록 냉장고 틈, 베란다 선반 밑, 침대 밑… 집 안 구석구석을 다 막았습니다. 텅 빈 식탁 구석으로 태평이를 몰아갔습니다. 태평이가 쫓기다 급한 나머지 식탁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이불을 확 씌워 붙잡았습니다. 태평이는 너무 놀라서 물똥을 찍 싸버렸습니다. 작은딸 옷도 다 버리고 이불도 똥투성이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태평이는 살려준 은혜를 괴상한 방법으로 갚고 떠났습니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자는 사진
큰딸은 먼 길을 달려와서 태평이를 데리고 가 달콩이 아저씨에게 맡겼습니다. 그렇게 태평이는 임평씨네 집으로 입양됐습니다. 임평씨는 태평이가 수고양이여서 임태평군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며칠 뒤, 임평씨가 태평이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자기 집에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자는 사진입니다.
태평이가 임평씨네 집으로 간 지 이제 9개월쯤 되었습니다. 딸들이랑 가끔씩 태평이 이야기를 합니다. 치사하게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간식을 달라고 나름대로 애교를 부리던 게 눈에 선합니다. 이름처럼 태평한 팔자가 되어 다행입니다.
전순예 1945년생 <강원도의 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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