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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미션 없는 ‘여성 예능’의 탄생

‘남성 중심’ 예능판에서 <삼시세끼> <캠핑클럽> 성공이 유의미한 이유
등록 2019-09-06 13:11 수정 2020-05-03 04:29
JTBC <캠핑클럽> 방송 화면 갈무리.

JTBC <캠핑클럽> 방송 화면 갈무리.

1995년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잡지 를 공동 창간한 미국 작가 앤디 자이슬러는 저서 에서 마저리 퍼거슨이 처음 쓴 ‘페미니스트의 오류’라는 표현을 소개한다. 페미니스트의 오류란 대중매체에 나오는 몇몇 유력한 여성의 모습을 실제 여성들의 “문화적 가시성과 제도적 여권 신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퍼거슨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소설, 영화, 텔레비전, 인쇄 매체에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가? 아니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가?”

자이슬러는 1990년에 던진 이 질문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적극 동감한다. 그러나 한편, 2019년 현재 한국은 여전히 미디어에 여성들이 나오는 것 자체가 유의미하고 절실한 사회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남성 중심으로 짜인 TV 예능판에서 계속 사라지던 여성들이 조금씩 자리를 얻은 것은 최근 2~3년의 흐름이다. 송은이와 김숙을 중심으로 한 여성 예능인들의 약진과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재시동) 이후 여성 시청자의 지지가 맞물린 결과다.

2014년 시작돼 출연진과 장소를 바꿔가며 ‘시즌7’까지 이어지며 방송됐던 ‘나영석 사단’의 히트작 는 여덟 번째 시즌을 맞이하며 처음으로 여성팀을 출연시켰다.

여성 예능도 재밌다는 ‘새삼스러운’ 입증

염정아, 윤세아, 박소담 등 예능 프로에 자주 출연하지 않던 배우들을 섭외해 화제를 모았고 초대손님 정우성을 활용해 초반 대중성도 높였다. 굳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하고 밭에서 채소를 수확해 하나하나 손질해 요리하는 과정은 이번 시즌에도 사서 고생임이 틀림없고, 그래서 특유의 재미가 있다. 힘을 합쳐 무거운 평상을 옮기고, 한쪽에서 요리하는 사이 손이 비는 사람이 미리 설거지를 해두는 등 누구 하나 헤매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는 “너무 맘에 들어, 애들이 다 잽싸서”라는 염정아의 말대로 보기에도 편안하다. 서로 배려하고 적당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친근하게 소통하는 방식 역시 농담과 면박이 뒤섞여 있다. ‘서열’을 내세우는 남성 예능의 화법과 달리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이 남성이 해왔던 형식의 예능을 여성이 해도 (당연히) 재미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증명한다면, JTBC 은 여성의 삶과 관계로 한발 더 들어간 예능이다. 21년 전 데뷔해 7년 동안 함께 일하고 14년간 각자 자리에서 고군분투해온 핑클 멤버들이 다시 만나 여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단지 1990년대 아이돌 스타를 한자리에 모은 ‘추억팔이’에 기대는 대신 이들의 변화와 현재에 주목한다. 첫 회에서 과거 히트곡 의 가사 속 화자를 떠올리며 “참 수동적이야, 애들이” “우리 스타일이 아니네”라고 깔깔 웃는 그들의 이야기는 동시대 여성들이 대중문화에 갖는 비판적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캠핑카 안 휴대용 변기를 비우기 위해 들고 다니며 “오줌 사세요~” 같은 농담을 던지고 자연스레 배설 문제를 이야기하는 모습 역시 ‘요정’이라 불린 여성들 스스로 먹고 자고 누는 ‘인간’임을 태연히 선언한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서열’ 대신 배려·화해·성장의 서사

범죄를 저지르거나 혐오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적 없는 출연자들이 착착 손발을 맞춰 일하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채식주의자인 멤버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대신 따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주는 의 쾌적함은 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대부분의 야외 예능과 달리 에는 미션이나 경쟁, 단체 행동에 관한 압박감이 없다. 일찍 잠에서 깬 사람은 혼자 차를 마시거나 해돋이를 보러 가고, 잠이 많은 사람은 좀더 자도 괜찮다. 아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각자 독서, 운동, 장보기를 즐기기도 한다. 제작진 개입이 최소화된 구성 역시 피로감을 적게 하는 요인이다.

tvN <삼시세끼–산촌 편> 방송 화면 갈무리

tvN <삼시세끼–산촌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이제 ‘더 이상하고 웃긴’ 여성 캐릭터 차례

예능의 재미와 더불어 이 인상적인 순간은 멤버들이 일에 관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다. “나는 욕먹지 않으려고 20년을 산 것 같아. 그러다보니까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라는 성유리, “괜찮은 척 많이 했지”라는 이진의 고백은 10대 때부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대중의 시선 속에 살아온 여성 연예인의 스트레스를 짐작하게 한다. 솔로 활동에 나섰을 때 “효리처럼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해야지, 너는 누가 듣지도 않는 음악을 하냐”는 엄마의 비교에 상처받아 “언니가 잘되는 게 너무 좋으면서도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올랐다”는 옥주현의 이야기는 같은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보여준다. 솔로 활동을 즐겼고 네 명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고 이들과의 관계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처럼 느껴졌다던 이효리는 여행 내내 좀더 많은 말을 나누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네 사람은 누구 잘못도 아니지만 맺혀 있던 갈등을 꺼내놓고 과거의 자신 혹은 타인과 화해한다.

과 의 비슷하고도 다른 성공이 여성 예능과 예능 속 여성의 증가에 어느 정도 청신호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여자들은 ‘재미가 없어서’ 예능, 특히 야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맞지 않는다는 편견을 깨뜨리는 데는 유의미한 결과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서 를 통해 ‘차주부’(차승원)나 ‘에셰프’(에릭) 같은 캐릭터로 인기를 얻은 남성에 비해 여성은 여전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 ‘요리 잘하는 남자’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역전시키는 서사 안에서 독특한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여성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로 해석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에 집착하고 칭찬을 갈구하는 정우성의 능청스러운 태도, 이서진의 ‘투덜이’ 캐릭터를 여성이 보여줬다면 자필 사과문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비호감’이 되지 않으면서 재미도 있어야 한다는 외줄타기는 여전히 여성만의 몫이다. 그러니 미디어에 아름답고 부지런한 여성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좀더 이상하고 좀더 게으르고 좀더 고집 센 여성의 등장, 그리고 그를 미워하지 않고 웃어주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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