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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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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돌보느라 믿음을 저버렸네

베트남에서 키우던 형제 강아지 사랑이와 믿음이
등록 2019-08-21 11:20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나는 남편 일 때문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10년째 살고 있습니다. 하노이에 온 지 3년쯤 되었을 때 우리는 꽤 넓은 땅을 빌려 건물을 짓고 이사했습니다. 시골 출신으로 땅만 보면 뭔가 심고 가꾸길 좋아하는 나와 남편은 망고나무도 50그루 심고, 잔디도 심어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땅은 나중에 건물을 지으려고 풀밭으로 그냥 두었습니다. 길가 쪽으로 아름드리 바나나나무가 여러 포기 있었습니다. 바나나나무 밖으로 2m 되는 함석으로 담을 둘러쳤습니다.

병아리 깃털을 주워 먹는 믿음이

이사한 다음날, 개를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빈푹에 사는, 교회 다니는 주 집사가 강아지 암수 두 마리를 키우라고 데려왔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이사하고 정리도 안 되고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었는데 어린 강아지를 데려와서 속으로는 무척 야속했습니다. 키우던 ‘고고’라는 고양이가 있어 고양이나 잘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데려온 생명이니 거절할 수 없어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암놈은 ‘사랑’, 수놈은 ‘믿음’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사랑이가 믿음이보다 똘똘합니다. 건물 뜨락이 블록 세 장 정도 높이인데 사랑이는 염려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믿음이는 그 뜨락을 못 올라와 깨갱깽… 깽깽깽… 합니다. 벽돌로 계단을 쌓아주었는데도 올라오다 굴러떨어지기 일쑤입니다. 밖에서 놀다가 굳이 집 안에 들어와서 대소변을 볼 정도로 철이 없습니다.

강아지를 키우기도 정신없는데 남편은 병아리 열두 마리를 또 사왔습니다. 병아리를 사온 날 사랑이와 믿음이를 불러서 절대 병아리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건드리면 혼날 줄 알라고, 병아리를 입에 대주고 회초리로 살짝 몇 대 때려주었습니다. 꾀 많은 고양이는 쫓아오다가 강아지가 맞는 걸 보고 도망을 냅다 뺍니다. 사랑이와 고양이 고고는 병아리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도 병아리를 물지는 않는데, 깃털만 보면 주워 먹었습니다.

하루는 풀밭에서 사랑이가 자꾸만 짖어댑니다. 가보았더니 믿음이가 병아리 한 마리를 앞발로 누르고 털을 거의 다 뽑아 먹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가자 믿음이는 잽싸게 도망쳐 바나나숲 뒤에 가서 숨었습니다. 털을 몽땅 뽑힌 병아리는 숨만 벌렁벌렁하다가 숨졌습니다. 믿음이는 병아리 잡아먹지 말란다고 털만 뽑아 먹었는지 털이 맛있어서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이와 믿음이는 눈에 보이게 쑥쑥 커서 강아지 티를 벗고 개의 면모를 갖추어갑니다. 사랑이는 좀 누리끼리한 색에 주둥이 언저리나 발 같은 데가 약간 검은색입니다. 얼굴이 좀 길다는 느낌이 있지만 점잖고 지혜가 있어 말썽을 부리지 않습니다. 믿음이는 옅은 커피색인데 짱구 이마가 귀여움을 더합니다. 귀끝이 검고 가슴에서 목 밑까지 검은색 브이(V) 자가 있어 정말 멋있습니다. 오는 사람마다 믿음이의 짱구 이마를 만져보고 좋아들 합니다.

시름시름 앓는 개 전염병이 돌고

베트남 땅에선 들깨는 잘 안 자라는데 참깨가 잘됩니다. 꼬꼬 먹이로 준 참깨가 돌짝(자갈)밭에서 아주 알차게 영글었습니다. 사랑이와 믿음이는 개구쟁이 애들처럼 꼬꼬 밥도 뺏어먹습니다. 하노이에서는 새를 보기 힘든데, 먹이가 있으니 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랑이와 믿음이는 귀를 나풀거리며 새를 잡으려고 풀밭을 마음껏 뛰어놉니다. 풀밭에는 강아지만 한 쥐들이 겁 없이 들어옵니다. 특히 믿음이는 날렵하게 쥐 사냥을 잘합니다. 쥐는 급하면 2m 되는 울타리를 넘어가려고 뛰어오릅니다. 울타리에 부딪히는 소리만 요란할 뿐 넘어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잡혀서 놀잇감이 되고 맙니다. 혹시나 쥐약을 먹은 쥐면 어떡하나, 쥐를 먹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사랑이와 믿음이는 쥐를 가지고 놀다가 버리고 먹지는 않았습니다.

씩씩하던 사랑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밥을 먹지 않고 비실비실 누워만 있습니다. 믿음이가 같이 놀자고 아무리 뽀뽀하고 발로 끌어당겨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는 개 전염병이 돈다고 합니다. 평생 개를 여럿 키워봤지만 개가 죽은 적은 없었습니다. 약도 사다 먹이고 북어 대가리 푹 삶은 물을 입을 벌리고 수저로 떠먹입니다. 미음을 끓이고 약을 구해다 먹인 지 일주일이 되자 사랑이는 조금씩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개는 원래 잘 죽지 않는 법이야, 마음을 놓았습니다.

사랑이만 돌보느라고 믿음이한테 전염된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믿음이가 바나나숲 그늘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주 집사는 자기네 개들도 며칠 비실비실 앓다가 다들 툭툭 털고 일어났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이가 앓고 일어났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뭘 안 먹어서 오늘은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움직이지 않던 믿음이가 억지로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뜨락까지 올라오더니 푹 쓰러졌습니다. “믿음아 많이 아파? 오늘은 병원에 가보자.” 말하는데 벌써 파리 떼가 믿음이 입 주변에 달라붙기 시작합니다. 안아올리자 몸은 다 굳어 있고 목울대만 몇 번 벌렁벌렁하더니 목이 툭 떨어졌습니다. 다물지 못한 이빨 틈새로 쉬파리 떼가 쫓아도 쫓아도 모여들었습니다.

믿음아 미안하다

“믿음아 미안하다. 믿음아 미안하다. 엄마가 너무 방심했구나.” 믿음이를 안고 많이 울었습니다. 남편은 일찍 죽는 것도 다 개 팔자라고 큰 쌀자루에 넣어 뛰어놀던 풀밭에 묻어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죽어가던 믿음이를 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는 단순한 돌림병이 아니라 뭔가 잘못 먹어서 깊은 병이 든 것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 평생 동물을 키우면서 믿음이가 죽은 것이 가장 미안한 일로 남아 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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