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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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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의 고통을 쓰는 일에 대하여
등록 2019-08-17 14:57 수정 2020-05-03 04:29
식용 개농장에서 사육되는 개가 방문자를 겁먹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하재영 제공, ©팀 옐로우 독, 동물권 행동 카라

식용 개농장에서 사육되는 개가 방문자를 겁먹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하재영 제공, ©팀 옐로우 독, 동물권 행동 카라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라는 부제가 붙은 은 나의 첫 르포이자 (지금까지는) 유일한 르포다. 그러므로 나는 전반적인 르포가 아닌 이 책에 관한 경험만 나누려 한다.

무고의 알리바이가 되는 연민

버려진 개에 대해 쓴다는 것은 번식장, 보호소, 식용 개농장, 개시장, 도살장 같은 장소에 가야 하는 일이다. 또한 그 장소에서 고통받는 개들을 바라보는 일이다. 숨 막히는 폭염 속에 물 한 모금 없이 땡볕에 묶여 있는 개, 죽은 개와 한 철장 안에 갇힌 살아 있는 개, 벌레가 들끓는 음식물쓰레기를 먹는 개, 굶어 죽은 개, 허리가 부러져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개, 그런 몸을 하고도 나를 보자마자 철장 안쪽으로 기어가는 개, 문 앞에 있으면 다음 도살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아는 개, 시선을 피하는 개, 눈이 마주치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개, 내일 죽을 개, 몇 시간 뒤 죽을 개….

끝없이 펼쳐지는 고통과 죽음의 풍경 앞에서 나는 동물활동가들이 동물에 관한 잔혹 행위를 담은 이미지를 촬영하고 유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활동가들은 이미지를 통해 단지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사고방식과 소비 형태를 바꾸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동물에 관한 폭력적인 장면들은 우리가 먹고 입고 즐기는 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관심했던 사람들에게 충격과 경악을 줌으로써 알게 한다.

그러나 수전 손태그는 잔혹 행위를 담은 사진과 영상이 텔레비전과 컴퓨터라는 매개체를 거치면서 진부한 것, 멀리 떨어진 것, 관음증적인 것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충격과 분노를 일으키는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간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무감각에 빠진다. 연민은 우리의 무능뿐 아니라 무고(내가 한 일이 아니다)를 증명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잔혹한 장면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목격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더 많은 장소에 갈수록, 더 많은 고통을 볼수록, 나는 반응 능력을 잃어간다고 느꼈다. 한 마리 학대받는 동물을 봤을 때는 구하고 싶었지만 백 마리 학대받는 동물을 보자 무력감에 빠졌다. 연민이 극단에 이르자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또는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할 수 없었다.) 충격과 경악의 속성은 지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일 취재 내내 똑같은 강도로 지속했다면 나는 정신건강을 위해 더는 무엇도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먼저 경계해야 했던 것은 충격의 속성 그대로, 고통에 무뎌지는 나 자신이었다.

‘순간’이 아니라 ‘삶’이 되려면

내가 아무리 많은 장소에 가더라도 내가 목도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발을 디딘 ‘그 순간’뿐이었다. 그러므로 동물활동가보다 번식업자나 개농장 주인이 더 중요한 인터뷰이였던 것은, 대립하는 양쪽 입장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활동가들은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공간, 예를 들어 개농장이나 번식장에 들어섰을 때, 나와 마찬가지로 그 순간의 모습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떤 장소에 대해 일부가 아닌 전체를 알고 있다면 그는 방문자가 아니라 그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번식장과 보호소와 개농장에 대해 알지만 그것은 ‘단편적 사실’일 뿐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쓰려는 것이 단편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일 때, 일부가 아닌 전체를 보여주려는 욕망은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하다.

또한 인터뷰는 정보 수집뿐 아니라 인간형 발견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한 인간을 끝내 이해하게 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뫼르소를 이해하는 것처럼(알베르 카뮈 ,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배신하고 그 친구의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찰스 스트릭랜드를 이해하는 것처럼(윌리엄 서머싯 몸 ).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니체),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신형철)을 문학적 인간형이라고 한다면, 내가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쓰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의 빈곤한 상상력은 그런 인간형을 창조하지 못하지만 내 상상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바로 현실에서, 문학적 인간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쓰기 위해 만난 사람들 가운데 ‘행강대부’가 그런 인간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른바 ‘개장수’들의 도박판을 따라다니며 판돈을 대주던 사채업자였고, 사채업에서 손을 뗀 뒤에는 일흔일곱 마리의 모견과 종견을 악명 높은 ‘삼양 케이지’에 가둬놓고 새끼를 빼던 번식업자였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표현대로 “그 직업들을 다 버리고 동물보호판에, 개판에 뛰어들기”까지 과정은 내가 창작할 수 없는 삶이자,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잃기로 감히 선택한 이의 서사였다.

동물단체들이 동물에 관한 잔혹한 이미지를 유포하는 이유를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그 모든 이미지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유난히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을 올리는 어떤 단체를 보며 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개농장의 뜬장 안에서 다른 개에게 목덜미를 물린 어느 개의 상처 부위를 클로즈업한 뒤, 벌어진 살갗 사이로 드러난 시뻘건 속살과 꿈틀거리는 구더기까지 고화질로 보여주는 행위는 무엇을 의도하는가?

개농장 뜬장에 갇혀 사육되는 개들. 하재영 제공, ©팀 옐로우 독, 동물권 행동 카라

개농장 뜬장에 갇혀 사육되는 개들. 하재영 제공, ©팀 옐로우 독, 동물권 행동 카라

비인간화, 비생명화할 가능성

같은 맥락에서 글쓴이가 타자의 고통을 지나치리만큼 세밀하게 해부해 묘사할 때 글쓴이는 무엇을 의도하는가? 예를 들어 성폭력이 피해자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파괴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피해자가 당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대중의 알 권리를 충족한다는 명목으로 관음 욕망을 자극하고, 자신의 주장에 손쉽게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사유 없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상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그 자체로 리얼리티를 가진다고, 그런 방식을 통해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 타자의 고통을 밑바닥까지 헤집어 낱낱이 까발릴 자격이 있을까. 스스로 그런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글쓴이는 자신이 쓰는 대상을 한낱 글의 소재로만 소비하고, 모욕적으로 비인간화(내 책의 경우 비생명화)할 가능성이 있다.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욕망은 때로 내가 쓰는 것이 인간/생명 이야기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그렇게 인간/생명에 대한 예의를 잊게 한다.

르포를 쓰는 이의 또 다른 윤리는 자신의 자리를 작가나 창작자가 아니라 목격자이자 전달자 위치에 놓는 것인지 모른다.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윤리적인가?”라고 묻는다. 이어서 그는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연대하고자 한다면 그 슬픔과 고통의 주체를 함부로 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통의 주체를 나로 착각할 때, 쓰는 이는 타자의 고통을 이야기할 명분과 진실을 말하겠다는 글의 목적을 동시에 상실한다. 그러므로 나는 르포의 모든 문장이 이런 질문을 전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타자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목격하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있진 않은가. 자의식으로 충만한 글쓰기 행위 안에서 철저한 전달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슬픔과 고통의 주체는 나인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아직 이야기가 문장이 되지 않고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있을 때, 어느 부분에서는 헤매고 더듬거리며 개 산업의 카르텔(담합)을 좇는 내 모습을 쓰고 싶은 적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죽을 동물의 눈빛을 마주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고문당하고 학대당하는 동물을 지켜보는 무력함에 대하여, 악몽에 시달리다 소스라치며 깨어나는 나의 밤에 대하여, 쓰고 싶었던 적 있었다. 그런 욕망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잊게 했다.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내 고통이 아니다.’ 타자의 고통에 대해 쓰는 일은 그 행위가 담보하는 (듯 보이는) 윤리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비윤리성 위험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것만이 그 위험을 피해 마지막 문장에 도달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재영 작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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