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특정한 장르나 스타일에 집착할 때는 스스로 어찌할 길 없는 충동이 솟아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스티븐 킹은 자신이 공포소설에 매달리는 이유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조금 내 식대로 바꿔봤다) 자신에게는 한밤중,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침대 밑을 들춰보고 싶은 충동이 있기 때문이라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침대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침대를 긁어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역시 두려움을 느끼지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침대 밑을 들춰보고 싶은 충동이 요동친다. 이 상황이 너무나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안겨주는 공포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붙은 문르포작가에게도 비슷한 충동이 꿈틀대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을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 너머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충동이라고 부른다. 가끔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문 옆을 지나갈 때가 있다. 나는 그런 표시를 보면 그 문들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문들을 모조리 열어보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때로는 관행으로, 때로는 무관심으로 감춰졌던 우리 사회의 각종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 안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나에게 계속 르포를 쓰게끔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충동이 강력해도 그것만으로 책을 완성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 연극 평론가가 무엇에 대해 쓰면 좋을지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극작가는 오직 무대에서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서만 온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소설로 썼을 때도 어딘가 부족하고 영화로 찍었을 때도 어딘가 모자라지만 연극이라는 형식과 제약 안에서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르포가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 나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물론 소설가도 현실을 다루고 웹툰 작가도 현실을 다룬다. 하지만 르포작가가 펜을 들도록 자극하는 현실은 그것들과 다르다. 르포는 현장에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전한다. 그래서 르포가 가장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사람들이 이러저러할 거라고 믿던 현실 사이에 깊고도 넓은 간극이 자리잡고 있을 때다. 실제의 현실, 각자가 몸으로 견뎌야 하는 현실과 이미지로서 현실, 각종 선전 활동 결과물로서 현실 사이에 모순이 생겨났을 때 말이다. 르포가 그 차이와 모순을 손가락질하며 까발려 보일 때 그것은 넘쳐나는 가짜뉴스와 말장난에 맞서 휘두를 수 있는 물리적 도구가 된다. 내게는 정혜윤의 이 그랬고 존 버거의 이 그랬다.
나는 그러한 현실을 제시한 다음 그 위에 유사한 성격을 가진 일련의 현실들을 중첩해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처음부터 이런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내 계획은 기존 르포들의 구성을 좀더 발전시켜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조지 오웰의 을 모델 삼아 을 쓰기 시작했는데, 오웰은 잭 런던의 영향을 받아 데뷔작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잭 런던은 1902년 런던 빈민가, 이스트엔드에서 생활하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영국에서 부랑자와 막노동꾼이 어떻게 살아가고 또 죽어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오웰은 에서 접시닦이와 부랑자 두 집단을 다뤘는데, 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한 좀더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어느 날, 일자리를 구할 때마다 펼쳐보던 벼룩시장의 구인 광고란 직종 분류 항목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래서 한 권의 책 안에 1차·2차·3차 산업, 더 구체적으로는 농업·어업·축산업·제조업·서비스업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봤다. 전체 윤곽이 잡히자 나머지는 순조로웠다. 내가 할 일은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자리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일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기록이 쌓이면서 글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겼다. 기록한 경험이 한두 개일 때까지만 해도 개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잡다한 주장이나 해석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항구의 임금 체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부는 이런 방향의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선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이런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는 식의 제대로 된 논리나 근거 없이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감상이 즐비했다(지금이라고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담아내려던 현실의 모습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질수록, 각각의 경험이 이전에 묘사한 현실의 빈틈을 메워갈수록, 사변은 줄어들고 그 자리는 나와 내 동료들의 대화와 행동, 그리고 작업장의 구체적인 정경들로 채워졌다. 그런데도 표현하는 바는 더 분명해졌고 생각할 거리는 더 풍부해졌다. 어찌 됐든 내 능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선 그러했다.
제시할 수 있는 현실의 모습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는 대목마다 작가가 나서서 상황을 평가하고 설명하고 진단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의 모습이 누적되자 이전까지 장황한 설명과 해석을 통해 전달되던 부분들이 묘사하는 상황과 대화, 행동 속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내가 구구절절이 설명하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말이다. 재밌는 건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특별한 서술 기법을 썼거나 대단한 통찰력을 발휘한 게 아니라 단지 다루는 사례의 양이 늘어났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현실을 풍부하게 담아내면 작가가 아니라 현실이 직접 말한다. 때로는 현실만큼 뛰어난 작가가 없다.
작가들은 종종 독자도 생각할 줄 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글을 쓰곤 한다(나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이 직접 독자에게 말하도록 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좋은 예방책이 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글쓰기에는 분명한 단점이 있다. 이런 글은 독자에게 모호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실제 내 책을 읽고 “글 쓴 사람이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때 나는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표정이 밝아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글의 주제나 방향을 정해놓아도 구체적으로 어떤 곳을 어떻게 들어갈지 생각하면 금세 막막해진다. 나는 이 단계가 가장 어렵다. 그럴 때면 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내 세계를 ‘벼룩시장’과 ‘교차로’로 한정해보려 한다. 여러분이 거실에서 요리할 때 바닥에 깔아둘 용도로 몇 부씩 챙겨오는 그 신문 말이다. 그렇게 하면 구상과 계획이 당장 실현 가능한 영역 안으로 한정된다.
상상력이 터무니없이 날뛸 때가 있다. 한때는 의 21세기 동아시아 버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잭 런던이 20세기 영국 최악의 빈민가에서 6주간 생활하고 책을 썼다면, 나는 한국·중국·일본의 빈민가에서 6개월간 살아보고 책을 쓰는 거다. 국제적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세 도시 이야기’라는 제목도 정해뒀다. 또 이런 계획을 한동안 고민해보기도 했다. 의 전세계판. 이번엔 각각의 대륙에서 한 가지씩 일해보는 거다. 유럽에서 하나, 아프리카에서 하나, 중국에서 하나, 북미에서 하나, 남미에서 하나. 이렇게 써놓고 보니 벼룩시장에 국내 광고만 게재된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에 넘어가 코카인을 채워넣은 풍선을 삼킨 채 프랑스 샤를드골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려 했을지 모른다.
구상이 방향을 잃거나 종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기만 할 때면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 계획이 벼룩시장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장소만으로 실현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다른 계획을 찾아보려 한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일 경험을 벼룩시장 안에서 모두 충족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준비는 끝난 셈이다.
마지막으로 재미의 문제가 남는다. 는 가편집한 상태였을 때 530쪽이 넘었다. 결국 적지 않은 양을 줄여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이 책에는 주제와 아무 관련 없는 시시콜콜한 사람들 얘기도 많이 들어 있다. 동료들과 나눈 잡담, 그들의 과거사, 쉬는 날 다 함께 놀았던 일 등등, 내 고민을 들은 사람들은 비슷한 조언을 건넸다. 맥락에서 벗어난 얘기는 모두 잘라내고 식용 동물이라는 본론에만 집중하라고. 나도 그런 논리에 공감했다. 하지만 막상 충고대로 고쳐서 다시 읽어보니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해보기로 했다. 사람들 이야기는 되도록 살리고 동물에 대한 분량을 줄여보기로. 나는 어떤 주제든 재미있게 쓰고 싶다.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선, 꼭 재미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독자에게 풍부한 독서 경험을 안겨줄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선 본론에 집중하는 것보다 때로 본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책 읽는 것을 여행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여행은 아주 추운 겨울날, 나무가 울창한 숲을 통과하는, 나무가 워낙 빽빽해서 길로 햇빛도 들지 않는 그런 숲을 통과하는 그런 여행이다. 이제 두 사람이 각각 길을 떠난다. 첫 번째 사람은 날도 춥고 길도 멀기 때문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앞만 보며 쉬지 않고 걸어간다. 이 사람은 그렇게 숲을 통과한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은 길을 걷다 너무 춥고 피곤하면 길에서 벗어난다. 아예 숲을 빠져나와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몸을 녹인다. 나무에 기대고 앉아 간식도 먹고 주변 경치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숲으로 돌아간다. 이 사람은 지칠 때마다 쉬다 걷기를 반복하며 숲을 통과한다. 여행을 끝마쳤을 때 둘 중 누가 이 여행이 즐거웠다고, 이 여행이 즐거운 추억이 됐다고 말하게 될까? 나는 두 번째 여행자가, 중간중간 숲을 빠져나왔던 사람이 이 여행을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를 쓴 로렌스 스턴의 이론이지만 두 이름 다 들어본 적 없다는 사람들에겐 내가 생각해낸 거라고 말하고 다닌다.)
같은 논리를 책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사회과학 서적이 그렇지만 읽다보면 가슴이 무거워지고 답답해지는 내용이 책 속에 가득하다. 400쪽 넘는 책을 그런 내용만으로 가득 채우기보다는 긴장을 풀며 웃고 또 사소하게나마 읽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건넬 수 있는 부분도 집어넣고 싶었다. 이런 선택에 자신도 있었다. 왜냐하면 농장들을 찾아 지방을 떠돌던 시절에 바로 내가 그런 만남과 대화에서 위로를 받고 즐거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맨얼굴을 보는 자리나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선 ‘르포=사서 고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의 절반일 뿐이다. 나는 르포 형식의 글쓰기가 나를 한국 사회라는 무대의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해주었다고 믿는다(백스테이지 통행권도 포함해서). 지난 몇 년간 삶에서 내가 만족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책이 많이 팔려서도 아니고(얼마 팔리지 않았다) 유명해져서도 아니고(조카들은 내가 돼지 키우는 사람인 줄 알고 있다), 내가 한국 사회의 맨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누구보다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의 맨얼굴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나와 또 내가 속한 공동체의 본질과 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번에 뭘 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최근 생활이 어딘가에 격리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빨리 르포 세계에 다시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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