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쾰른에서 (Ganz unten)를 쓴 르포작가 귄터 발라프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Fürchtet euch nicht.”(두려워하지 마라.)
2015년 한 독일인이 이슬람국가(IS)에 붙잡혔을 때 귄터 발라프는 그 인질과 자신을 맞교환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어떤 일에든 대담했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신의 작업을 ‘놀이’로 표현한 부분이다. 자신이 아이같이 천진난만하지 않았다면 40년 넘게 르포문학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독일 일간지 에서는 그를 ‘유희자’(Der Spieler)라 일렀는데 그것은 예상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놀이로 간주하고 덤비는 사람이란 뜻이다. 르포를 말할 때 ‘두려움’과 ‘놀이’가 동시에 이야기되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를 쓴 스페인의 르포작가 안토니오 살라스는 네오나치를 취재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털을 밀고 직접 레알 마드리드의 극우파 그룹에 들어갔다. 또 인신매매 조직에 잠입해 13살 소녀의 ‘처녀성’을 경매에 올리기도 했다. 그것은 감정적, 심리적으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정서의 혼란을 감당하면서도 그가 르포 작업을 하는 것은 ‘진실을 찾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삶의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살라스는 가명이다. 책을 여러 권 냈지만 아무도 그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에 허영심이 있기에, 그도 자신의 책에 서명해주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는 순간 르포작가로서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갈수록 메마른 상태가 되어간다. 작은 건드림에도 쉽게 불타오른다. 메마른 상태에서는 타인은 타인이 ‘공포’이다. 그가 내민 손에서는 살인가스가 나온다. 우리는 서로 안전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병든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 첫출발은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부터다. ‘새로운 문제적 상황을 드러내주는 것, 사회적 편견을 이해의 시선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르포문학이 해야 할 일이며 ‘르포만이 삶을 여과 없이 포착’할 수 있다.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또한 잔인함에 무관심한 것도 한계가 없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에 맞선 싸우는 투쟁에도 한계가 없다.”(존 버거의 중에서)
잔인함에 맞서는 투쟁의 한 조그마한 구석에 르포문학이 존재했으면 한다. 이 글은 그런 세상의 변화에 참여하려 르포를 쓰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1. 새로운 현실 드러내기레일라 슬리마니의 은 귀엽고 자그마한 책이다. 대부분의 르포는 사회문제를 다룬 만큼 두툼하고 무겁지만 그녀의 책은 가벼웠다. 하지만 다른 르포처럼 사회적 편견을 헤치고 우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데려다놓는다. 남녀가 혼인 외의 관계를 맺으면 길게 징역 1년형에 처해지고 동성애는 3년형에 처해지는 모로코에서 열악한 여성의 상황을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이 섹슈얼리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뿐만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모든 관계가 엇갈리는 고밀도의 교차로’이다. 이런 억압이 ‘성적 빈곤’을 가져다준다. ‘성적 빈곤’이란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성적 빈곤은 사회적 빈곤과 긴밀히 연결됐으며, 단순히 물자와 자원이 부족한 ‘조건의 빈곤’이 아니라 ‘위치의 빈곤’이다. 그 모든 걸 견디며 모로코 여성들은 ‘세상 구경하기, 노래하기, 자기 의사를 표시하기’ 등 행동을 스스로 책임지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여성을 원한다.
2. 소설–코러스2017년 서울국제문학포럼, 단상 의자에 앉아 있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조용히 ‘미래에 대한 회상’이라는 체르노빌에 관한 자신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이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단단한 힘이 있었다.
“체르노빌 지대는 떠나는 즉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강은 평화롭게 흘러갔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친숙한 세상. 처음에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제자리에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처에 공포와 알 수 없는 일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목동들이 암소 떼를 몰고 물가에서 물을 먹이려 하면 암소들이 뒷걸음치며 물 마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전쟁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미래에서 온 전쟁. 미래에 인간이 겪게 될 공포였습니다.”
그이는 조곤조곤, 그러나 강렬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우리의 미래일 수 있어 더 소름이 돋았다. 알렉시예비치는 수백 명을 인터뷰해 소설처럼 읽히는 강렬한 매력이 있는 ‘다큐멘터리 산문’을 창조했다. ‘소설-코러스’라는 이 형식은 그이의 것만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벨라루스에는 이런 글쓰기 전통이 있었다.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시대를 다룬 다큐멘터리 소설 는 알렉시예비치의 문학적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책은 알레스 아다모비치, 얀 카브릴, 울라드 지미르, 카레스 닉의 공저였다. 그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면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런 수많은 타인의 목소리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거대한 감정의 사원을 세운다. 아주 성스럽고 풍요롭게.
3. 타인에 대한 ‘상상’타인의 삶을 기록할 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 존 버거는 유럽 이민자들의 삶을 기록한 에서 사려 깊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이 ‘꿈/악몽’에 관한 것이라 했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남들의 삶의 체험을 꿈/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희망이 너무 높아서 꿈이라는 이름도 너무 약한 건 아닌가.”
그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 모습을 해체해 다시 자기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중심부에 놓인 사실들의 별자리 자체가 다른 것이기 때문에.
4. 기술철학자 김진영은 프루스트의 를 해석하면서 소설가인 베르고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베르고트는 말년에 항구에 있는 성당 처마 밑 벽면에 그려진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러 간다. 그는 거기서 노란색 벽면을 계속 덧칠한 부분을 보면서 그 세밀함, 공들임, 끊임없는 반복의 인내성,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가들의 집념을 보았다. 베르고트는 자신이 신에게 뭔가를 바치기는 했는데 뭔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아, 더 공들여서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한탄하면서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예술가다운 죽음이긴 하지만 베르고트는 죽을 때까지도 베르메르의 그림 ‘델프트 항구’의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오로지 기예, 테크닉에만 매달려 있었던 거다. 베르고트는 어떻게 보는지의 문제를 못 보고 오로지 어떻게 잘 그리는지의 문제만 집착한 채 죽음을 맞이한 거다.
혼다 가쓰이치는 에서 르포작품을 쓰는 데 천재적인 문장가일 필요는 없으며 문장을 다룰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것도 90 이상이 훈련으로 숙달된다. 오랫동안 일해온 직장이라면 이미 취재가 끝난 것이며 문장으로 쓰는 일만 남았다. 그 글은 프로 르포작가가 쓰는 것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김민섭이 쓴 도 그런 경우다. 경험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 힘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후 김민섭은 시간강사직을 그만두고 대리운전을 하여 라는 르포집도 펴냈다. 일본 고단샤 논픽션상을 받은 을 쓴 야스다 고이치는 자신이 상을 받은 게 문장을 잘 쓰고 취재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제가 주목받은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상은 끊임없는 사회현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로 얻어진 결과인 것이다.
5. 환상르포가 다룰 수 있는 세계는 무한하다. 무엇을 다루느냐에 따라 그 세계도 달라진다. 심지어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도 가능하다. 라오웨이의 을 보면 마약중독자 시인 황허가 나온다. 그가 존재하는 세계에는 수많은 시어가 하늘을 날고 그 속을 시인은 걸어다닌다.
“갑자기 엄청 많은 시구가 내 눈 안에 들어와! 그 시구들이 철로처럼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갑자기 그 철로가 일어나기 시작했어. 땡그랑거리는 시구 속에서 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어.”
귄터 발라프는 흑인, 노동자, 신문기자 등 다양한 사람으로 변신해 사회의 많은 문제 상황을 드러냈다. 변장 기술도 신기술이 생길 때마다 진화해갔다. 스웨덴에서는 이런 발라프식 글쓰기가 탐구되고 유행했다. 유럽의 젊은 작가들은 발라프처럼 변신해 잠입 취재한 뒤 함께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잠입 취재한 내용은 사회적으로 파장이 컸는데 발라프는 “르포는 출간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매번 수백 건의 법정소송에 시달렸다. 한국에선 위장 취업하면 사문서 위조로 구속되지만, 독일에선 공익을 위한 위장 잠입은 합법이라고 판결해주었다. 차세대 르포작가들에게 안정적으로 작업하도록 법적 토대를 만들어준 것이다.
7. 여럿이서 함께은 피에르 부르디외 등 프랑스 사회학자 22명이 3년간 참여해 만든 르포집이다. 이들은 사회경제적 폭력성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으로 들어갔고 일상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행 조건을 탐구했다. 지금까지 해온 내 작업은 이 세계의 비참에 많이 빚졌다. 서울 청계천 사람들의 기록 , 비정규직 사람들의 이야기 , 이랜드 사람들의 이야기 , 세월호 부모들의 이야기 , 생존 학생들과 희생자 형제자매의 이야기 등이 작가들과 공동 작업을 한 결과물이다. 이런 공동 작업은 작가들의 다양한 개성과 시선이 어우러져 더 풍부한 글쓰기가 가능해지고 한 사람의 작가가 바라보지 못한 영역을 더 깊게 바라보게 했다.
8. 낡은 주제발라프가 이주민 르포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진보세력들이 그건 ‘한물간 이야기’다, ‘다뤄봤자 우익에 도움이 될 뿐’이고 별 반응을 못 얻어낼 거라고 냉소했다. 노조조차 ‘이건 우리를 위한 주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발라프는 그런 말들에 개의치 않고 작업을 해나갔다. 가 나오자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300만 부가 팔렸다. 이주노동자 르포는 많이 나왔지만 그들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여러 번 쓰였다 해도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 사회문제로 계속 남아 있는 한 르포는 멈출 수 없다. 발라프가 작가들에게 말했다. “모든 상황이 나에게 다가오도록 허용하라.”
*김순천은 르포작가이자 르포문학 강사로 활동하며 사람들 마음속 깊숙이 숨어 있는 말들의 소통을 꿈꾼다. 그동안 젊은 르포작가들과 함께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 이랜드 노동자들 이야기인 , 4·16 세월호 유가족 이야기인 등을 썼다. 그 외 기업에서 벌어지는 내밀한 일들을 다룬 , 배달호 평전 , 삼성전자 노동자 박종태 이야기 을 썼다.김순천 르포작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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