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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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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건 오직 여자들의 것

한국 범죄 액션 스릴러 장르를 촘촘히 미러링 한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등록 2019-07-02 20:34 수정 2020-05-03 04:29
포털 사이트 회사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tvN 제공

포털 사이트 회사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tvN 제공

고독한 주인공이 고층 빌딩 옥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운다. 그가 기분전환과 일 얘기를 위해 드나드는 장소는 유흥업소고, 조직을 위해 ‘몸빵’ 하도록 고른 부하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충성했던 인물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이들의 얼굴, 정확히는 성별이다. tvN 수목드라마 (이하 )는 거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웃는 얼굴로 상대의 등에 칼 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배신하고 미워하며 대결하는 이야기다. 다만 이들이 일하는 곳은 폭력조직이 아닌 포털 사이트다.

영화 같기도 같기도

국내 점유율 1위 포털 사이트 ‘유니콘’의 서비스전략본부장 배타미(임수정)는 대선 후보와 관련된 검색어 조작 의혹을 해명하라는 지시를 받고 청문회에 끌려나간다. 표면적으로는 대표이사 송가경(전혜진)과 대표 나인경(유서진)의 결정이지만 그 뒤에는 송가경의 시어머니이자 KU그룹 총수인 장 회장(예수정)이 있다. 배타미는 주어진 매뉴얼 대신 자신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조직은 그를 버린다. 유니콘을 ‘골드문’(영화 에 등장하는 폭력조직)으로 바꿔 상상해도 어색하지 않고, 믿고 따랐던 송가경을 원망하는 배타미에게서는 영화 의 유명한 대사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가 스친다. 즉, 는 남자들만 끝없이 등장하는 바람에 ‘알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한국 범죄 액션 스릴러 영화 장르의 법칙을 촘촘히 미러링(의도적 모방 행위)해 쌓아올린 세계다.

이런 영화의 세계에서 진짜 뜨겁고 끈끈하며 복잡한 감정은 오직 남자들만의 것이듯, 에서도 진한 애증과 성적 긴장감은 여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배타미가 이직한 업계 2위 포털 사이트 ‘바로’의 소셜본부장 차현(이다희)은 욱하면 주먹부터 나가는 성격이지만 고교 시절 동경했던 선배 송가경 앞에서는 한없이 순한 양이 되고, 둘은 마치 헤어졌던 비운의 연인처럼 애틋하게 재회한다. 함께 청춘을 바쳐 일했던 송가경에게 실망하면서도 그를 계속 의식하고,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차현과 부딪치면서도 동료로서 그를 신뢰하는 배타미까지, 세 여성은 서로에게 유일하거나 불변이거나 최우선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얽혀 있다.

위안은 되지만 이야기 중심은 아닌 연애들

물론 이들에게는 ‘공식적인’ 남성 파트너가 존재한다. 배타미가 지치고 외로울 때마다 화사한 조명과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등장하는 열 살 연하의 남자 박모건(장기용)은 세파에 찌든 배타미에게 마지막 남은 순수를 일깨우는 존재다. 어장 속 물고기가 되기를 자처하며 관계를 지속하는 그는 밖에서 피 흘리며 돌아온 배타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바쁜 배타미의 연락을 기다리다 지쳐 투정 부린다. (역시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거기에 각종 세제를 갖춰 화장실에 물때가 끼지 않게 관리할 줄 알고, 비가 쏟아질 때 겉옷을 벗어 배타미의 가방부터 감쌀 만큼 센스 있는 그의 캐릭터는 마치 이성애자 여성들의 파트너에 대한 다양한 욕망과 기대를 수집해 만들어낸 인공지능 로봇처럼 보일 정도다. 송가경을 위해 불법행위까지 저지르며 헌신하는 오진우(지승현), 상냥하고 해맑은 성품으로 차현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지환(이재욱) 등 의 남자들은 모두 유니콘 같은 ‘조신남’이자 순정파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주인공들에게 위안이 될지언정 이야기 중심에 놓이지 못한다. 의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이 모르는 복잡한 사연, 치열한 고민,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배타미가 자신의 이름을 ‘연예인 스폰서’ 지라시에 올린 오진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네가 필요해”라며 부르는 상대는 박모건이 아닌 차현이다. 앞서 두 사람은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삭제를 둘러싸고 격한 토론을 벌인 바 있다. 그러나 배타미와 대립하던 차현이 배타미의 한마디에 기꺼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달려와 함께 오진우의 차를 박살 내는 광경은 독특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공적 관계의 여성들이 이유 없는 적대감이나 소모적인 경쟁심을 드러내는 대신, 공동 목표를 위해 서로 비판하거나 지지하고 연대하는 구도는 ‘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를 가볍게 뛰어넘어 새로운 방향으로 달려나간다. 배타미, 송가경, 차현이 개인적 가치관과 업무상 원칙, 외부 압력 사이에서 펼치는 각각의 주장은 포털이 가장 거대한 미디어가 된 시대에 사업자, 그리고 사용자의 윤리적 성찰에 화두를 던진다.

내 욕망은 내가 만드는 거야

세 주인공 중 유일하게 가족사가 나오고 그 가족으로 인해 자유를 박탈당한 송가경을 제외한 배타미와 차현이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홀로 존재한다는 점 또한 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들에겐 ‘시집 못 간 딸’을 타박하는 부모도 없고, 옛 남자친구(이동욱)조차 배타미가 비혼주의자였음을 드러내기 위해 나온 존재다. 너라는 존재를 설명 혹은 납득시켜보라는 요구에 배타미는 “부모님 원수를 갚거나 전남편에게 복수”하려는 사연 같은 건 없다며 “내 욕망엔 계기가 없어. 내 욕망은 내가 만드는 거야”라고 선언한다. 는 이처럼 현대적 개인들이 각자의 윤리와 삶의 지향에 따라 행동하고, 타인의 그것과 부딪치더라도 수용하거나 존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침 그 세계의 다수를 구성하는 것은 대담하고, 다혈질이고, 냉정하고, 야비하고, 탐욕스럽고, 엉뚱한 여성들이다. 그들이 함께 일하고, 승부를 걸고, 고뇌하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 없어 점점 더 재밌어진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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