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공부
이남순
글도 모르고
달력도 못보다
아무것 모르다
공부를 배우니
나는 살것네
버스도 혼자 타고
아들에게 전화도 하고
나는 살것네.
MBC 파일럿 예능 (4부작)의 문을 연 것은 85살 여성이 쓴 시 한 편이다. 경남 함양군의 문해 학교에 다니는 학생 다섯과 그들의 짝꿍이 된 연예인 다섯, 한글 선생님을 맡은 배우 문소리, 온 동네 수리 담당으로 가수 육중완이 출연한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따라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역 이름을 읽지 못해 지하철을 수없이 탔다가 내리고, 시계가 있어도 시간을 알 수 없고, 내 이름으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하며,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조차 읽을 수 없고, 그 사실을 남에게 들킬까봐 어딜 가도 주눅이 드는 삶을 뜻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다큐멘터리 의 연작</font></font>
2017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성인 문해 능력을 조사한 것을 보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읽기, 쓰기, 셈하기가 불가능한 비문해 인구는 약 311만 명으로, 전체 성인 인구의 7.2%에 해당한다. 만 18살 이상 성인 중 여성 9.9%, 남성 4.5%가 여기에 속하고, 70대 인구의 28.7%, 80대 이상 인구의 67.7%가 그러하며, 농산어촌 거주자의 16.2%가 비문해 인구로 분류된다. 올 2월 개봉한 이종은 감독의 와 김재환 감독의 은 각각 전남 곡성군과 경남 칠곡군에서 한글을 배우는 노년 여성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연작 격으로 만들어진 은 주인공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유가 바로 ‘가시나들’이었다는 데서 출발한다. 어릴 적 한글을 가르쳐주는 동네 할아버지를 찾아가니 “가시나가 글은 배워서 뭐할라꼬!” 하며 쫓아낸 바람에 간신히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었던 박무순씨의 한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가시내들은 갈치면 안 된다고 아버지가 취학통지서를 감춰서 학교를 안 보냈다고. 시집가믄, 글씨를 알믄 도망온다고 옛날 어른들이 그러더라고.”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씨의 이 회상처럼 많은 노년 여성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전남 순천 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 초등반 학생들이 쓰고 그린 책 (남해의봄날)의 제목처럼, 서투른 언어가 부족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제목에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라는 해석을 덧붙인 은 주인공들이 단단히 꾸려온 삶의 터전과 배움의 기쁨, 낯선 젊은이와 가까워지는 즐거움에 주목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0대와 40대 70·80대가 공존</font></font>
‘떠브리떠브리’(WWE) 시청을 즐기는 박승자씨, 젊을 때는 가수가 꿈이었던 김점금씨,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사별한 남편 사진 액자를 향해 말을 거는 소판순씨, 시험에서 1등을 해 전동연필깎이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한 박무순씨, 카메라 든 ‘양반들’을 그냥 세워두는 게 마음에 걸려 잡채를 40인분이나 만들어 대접한 이남순씨 등 남성 위주의 한국 예능판에서 보기 드물게 출연자 열두 명 중 열 명이 여성이고 20대와 40대 70·80대가 공존하는 의 주인공들은 존재만으로도 신선하다.
“분량을 뽑기 위해 특별히 뭘 하려고 하지 마시라.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짝꿍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이 사람의 매력은 무엇인지 열심히 찾아달라는 거다. 그러면 여러분의 매력은 제작진이 찾아드리도록 노력하겠다.” 지난해 12월부터 매주 함양을 찾아 할머니들의 삶을 관찰한 권성민 피디가 ‘애기 짝꿍’들에게 당부했다는 말은 이 프로그램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짐작하게 한다.
‘짝꿍 얼굴 그리기’ 숙제를 힘들어하는 이남순씨에게 “한쪽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니 윙크했나보다”라고 격려하는 이브(이달의 소녀), 마을회관 할머니들의 화투판에 뛰어들어 활약하는 최유정(위키미키) 역시 예능이 걸그룹 멤버를 소비하는 전형적인 방식인 ‘애교’나 ‘개인기’에서 벗어나자 훨씬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세대 간 소통과 디지털 소외 문제</font></font>
어쩐지 눈물이 고인 채 웃음을 터뜨리게 되고, 할머니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게 되며, 세대 간 소통과 디지털 소외 문제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의 정규 편성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프로그램 성공에 앞서 출연자들의 행복을 빌게 되는 이 독특한 예능의 향방을 권성민 피디에게 물었다.
“사실 처음에는 촬영이 끝난 뒤의 이별이 할머니들에게 너무 큰 상실감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방송이 그분들의 삶에서 나쁜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게 제작진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라는 사회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활동하는 분들이다보니 우리가 없더라도 할머니들의 삶이 고독이나 적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난 요즘도 가까이 사시는 친구들과 보리밥 비벼놓고 방송 재밌게 보신다고 들었다. ‘애기 짝꿍’들은 할머니들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고, 따로 찾아가 뵙고 온 친구도 있다. 기획 단계에서 나온 다양한 아이디어를 4회 안에 다 담아내지는 못했기 때문에, 만약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다면 해보고 싶은 게 많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직 보고 싶은 게 많다.
최지은 칼럼니스트<font color="#008ABD">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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