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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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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열심히 살고 말았다

100을 넘어 110으로 살면 어딘가 탈이 나 있다
등록 2019-03-05 12:46 수정 2020-05-03 04:29
엄마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한겨레

엄마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한겨레

도서관에서 아이에게 책을 기계적으로 읽어주는 엄마를 보았다. 목이 쉬어라 읽어주는데 아이는 지겨운지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옆에는 책이 가득 쌓여 있었고 엄마의 음성에는 고저장단이 없었다. 무슨 동화책 읽기를 엑셀파일 만들 듯 하시나. 딱하고 안쓰러웠다.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잠깐이라도 대신 읽어주고 싶었다. 아니, 그냥 아이를 소파에 눕혀 위아래 쭉쭉이나 시켜주며 놀리고 싶었다. 어떠한 헌신과 노력도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헛짓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내가 책을 그렇게 읽어줬는데 우리아이는 왜 스스로 읽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든다면…. 그건, 엄마가 책을 ‘그렇게’ 읽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가까이서 보면 ‘호러’인데 멀리서 보면 ‘개그’인 일이 있다. 드물지만 거꾸로도 가능하다. 당사자냐 아니냐, 언제적이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한다. 직장과 학교에서 겪는 일도 그럴 것이다. 종종 너무 지나치게 열심히 하면 사달이 난다.

지인이 상사에게 폭언을 들었다. 침 튀기며 지시사항을 늘어놓던 상사가 경청하며 받아쓰는 지인에게 “아니 김 국장은 왜 이리 매사 부정적이야!” 소리를 지른 것이다. 지인은 그 자리에서 어버버버 하다가 제대로 대꾸하지도 못했다. 나라도 그랬을 거 같다. 그런 난데없는 상황이면. 그렇다고 그 상사가 유난히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니다. 가끔 일요일 아침 카톡으로 ‘조심스레’ 업무 지시를 하고 어쩌다 휴가인 날 회식에는 나오라고 ‘챙겨주며’ 권유하는 그렇고 그런 상사랄까. 한참 전 그가 밀던 (말도 안 되는) 일을 자신이 앞장서 거들지 않은 것에 마음이 상한 모양이라고, 김 국장은 추정한다.

전력 질주해오던 지인은 그 뒤 일과 삶의 ‘밸붕’(밸런스 붕괴)에 빠졌는데 같이 욕하고 위로하다 새삼 깨달은 게 있다. 아, 우리의 김 국장이 ‘신입이’처럼 일을 했구나. 한마디로 아주 열심히, 그것도 찍소리 내지 않고, 게다가 잘, 했던 것이다. 정작 오늘날 신입이들은 대체로 견지하지 않는 그 자세로 말이다. 늘 열심히 하면 귀한 줄 모른다. 특히 상사들은 말이다. 때론 조직 내 역학 관계상 ‘일 좀 한다고 잘난 척한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한다. 지인에게 앞으로는 매사 부정적으로 대충 일해보라 충고했다. 상사께는 잊고 있던 정체성을 찾아주셔서 고맙다고 조심스레, 챙겨주며, 손편지나 한 장 써드리는 건 어떨까.

양육자로서 균형이 깨지는 순간도 게으름 피우거나 설렁설렁했을 때가 아니다. 뭔가 잘하려고 욕심내거나 무리했을 때다. 내 경우에도 자폭하는 심정으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몇몇 순간이 그랬다. 버거운 일을 벌이거나 감당하고 난 여파였다. ‘내가 얼마나 애썼는데 너는 고작….’ 이 마음 말이다. 관계에서 섭섭함을 느끼는 것도, 조직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도 대체로 100의 능력치 가운데 100에 가깝게 할 때인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110, 120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이들은 지나고 보면 어딘가 ‘탈’이 나 있다. (내가 그나마 만렙을 안 채우고 회사에서 도망친 건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동급 레벨 최약체이던 친구가 오히려 직장생활을 꾸준히 잘하는 모습이 이제 와서야 보인다. 영화 의 고 반장 저리 가라다. 절대 안 죽어.

중학교 배정 신청을 하기 전 아이에게 대안학교 진학 의사를 물어본 적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 아이라 진로를 한번쯤 짚어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나름 숙고한 아이의 대답에 마음을 접었다. “엄마, 일반 중학교에서도 공부만 하는 건 아닐 거야. 놀 거 다 놀 수 있어. 놀려고 마음먹으면 다 놀아.” 이 말을 우리의 김 국장에게도 전한다.

새봄을 맞아 ‘신입이들’에게 귀띔하고 싶다. 회사는 학교처럼, 학교는 회사처럼 다니는 거라고. 그러니 배움도 벌이도 넘치게 하지는 말자.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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